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2
신필천하(神筆天下) 12화
‘다행히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지만, 네 운명이 이제 곧 정해질 터. 쯧쯧. 가련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이제 필사본이 거의 완성되어 가니 때가 되면 제거할 수밖에.’
사실 그는 지금껏 진양을 내심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수려한 필체를 구사하는 것을 보자니 서예를 좋아하는 그로서도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한데 이제는 진양이 맡은 일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다. 며칠만 지나면 필사할 책도 남지 않게 된다.
천상련이 진양을 살려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사실 풍천익 역시 처음에는 진양의 운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한데 지난 사 년 간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든 것이다.
양진양은 자신을 바라보는 풍천익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주 어르신,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흠, 아니다. 오늘 한 필사본을 주지 않고 뭐하느냐?”
“아, 예. 여기 있어요.”
진양이 얼른 필사본을 챙겨주며 물었다.
“필사할 책이 이제 거의 없는데…… 그 후에는 전 무슨 일을 하나요?”
풍천익은 천진하게 물어오는 진양을 보자니 괜스레 마음이 아렸다.
그는 짐짓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필사본을 모두 완성하고 나면 너는 이곳을 떠날 게다.”
“그럼 이제 학립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어딜 가든 네 마음이겠지. 밤이 깊었으니 이제 그만 자거라.”
풍천익이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방을 나섰다.
사실 필사가 끝나면 천상련에서는 곧바로 진양을 죽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곧이곧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며칠 후, 양진양은 예정대로 마지막 무공서 필사를 마쳤다. 그날 밤 풍천익은 공소부를 데리고 진양의 방으로 들어왔다. 진양은 공소부가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들고 오자 입이 귀밑까지 벌어졌다.
“와아! 맛있겠다!”
“필사본은 어디 있느냐?”
“여기 있어요.”
진양이 풍천익에게 마지막 필사본과 무공서를 넘겼다. 풍천익은 필사본을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수고했다. 오늘 저녁은 소부와 함께 푹 쉬도록 해라. 오늘은 특별히 음식을 많이 차린 것이니 마음껏 먹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각주 어르신. 그럼 전 언제 떠나면 되나요?”
“조만간 알려줄 것이다. 급할 것은 없지 않느냐?”
진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풍천익은 그저 천진난만한 얼굴로 들떠 있는 양진양과 공소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진양과 소부가 인사를 했지만, 풍천익은 두 사람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집무실로 돌아온 풍천익은 탁자에 앉은 채 진양의 필사본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과연 보면 볼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필사본은 책을 엮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하나같이 해서체로 적혀 있었다. 서법이 좀 더 자유로운 행서나 초서에 비해서 비동(飛動)이 약하지만, 진양의 글씨는 충분히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도록 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그 아이가 무공의 요지를 파악하지 않고 쓴 것인지 의심스럽단 말이지.’
풍천익은 그동안 진양을 상대로 몇 번이나 시험해보았다. 혹시라도 필사하던 무공서의 구결을 암기하고 있거나 무의식중에 몸으로 익히지는 않았는지 알아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진양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오히려 진양의 재능이 몹시 떨어진다는 것만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진양은 글씨만큼은 수려하게 썼다. 단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각 글자가 뜻하는 바와 문장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는 필체였다.
사실 진양은 글자 하나에서도 철학을 발견할 줄 아는 아이였기에 그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진양의 필사본을 홀린 듯이 읽어가던 풍천익은 가장 마지막 장 아래에 또 다른 화선지가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지?’
그가 절반으로 접힌 화선지를 펼치자 시의 일부 구절이 나타났다. 화선지 사이에 모래먼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진양이 바깥바람을 쐬다가 적은 모양이었다.
風吹客衣日??
樹攪離思花冥冥
乃知貧賤別更苦
呑聲??涕泣零
햇살은 밝은데 바람은 나그네 옷에 불어들고
꽃빛은 어둑한데 나무는 이별의 심사를 어지럽히네.
가난한 사람의 이별이 더욱 아픈 줄을 이제야 알고
울음을 삼키며 머뭇거리니 눈물이 흘러내리는구나.
시구를 읽은 풍천익은 양손을 가늘게 떨었다.
이 글은 당대(唐代)에 시성(詩聖)이라고도 불렸던 두보(杜甫)의 취가행(醉歌行)이라는 시의 일부였다.
취가행은 제목 그대로 술에 취해 부른 노래라는 뜻인데, 진양은 그 시에서 자신의 심사를 나타내는 구절만 따로 떼어내 화선지에 적은 것이다.
구절구절마다 진양의 애절한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니 풍천익은 내심 격한 감동을 이기지 못했다. 시의 내용이야 두보가 썼으니 두말할 것도 없지만, 햇살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필체는 풍천익의 마음을 옭아매는 듯했다.
사실 진양은 이제 곧 천상련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그동안 정이 들었던 사람들이 아쉬웠다.
특히 매일 자신을 야단치고 꾸중하던 풍천익도 앞으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풍천익에게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두보의 시 구절에서 일부를 떼어내 적은 것이었다.
비록 지난번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창작한 구절은 아니었지만 쓰는 순간 진양의 마음은 시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때문에 필체에도 그 진실함이 묻어나면서 유려하게 흘러간 것이다.
‘어린 녀석이 필체에 혼을 담아내는 경지에 이르러 있으니 그 재주가 참으로 기특하구나.’
풍천익은 화선지를 접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날 이때까지 속세의 모든 현상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며 살아왔다. 한데 진양의 필체는 그런 풍천익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이 아이가 날 이처럼 각별히 생각하니 내가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처음부터 죽이기로 한 아이를 이제 와서 내가 먼저 살려 보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구나.’
그가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풍천익은 얼른 화선지를 접어 소매에 넣고는 불렀다.
“밖에 누구냐?”
“곽연입니다.”
“들어와라.”
풍천익의 말이 떨어지자 곽연이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풍천익이 앉은 채로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인고?”
“련주님께서 일을 진행하라 이르셨습니다.”
“일이라니?”
풍천익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곽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진양이 녀석 말입니다.”
“그럼 필사본이 모두 완성됐다는 것을 련주님께서 아신단 말이냐?”
“예.”
“아니, 그걸 어찌 아신단 말이냐? 천보각의 일은 외부의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아, 그건 제가 련주님께 직접 보고했습니다.”
곽연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풍천익은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곽연은 야욕이 많은 자였다. 부각주인 그가 앞장서서 진양을 죽인다면 작은 공이나마 세우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련주의 눈에 들고 싶은 것이리라.
풍천익은 곽연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넌 그 아이에게 여러 도움을 받았으면서 참으로 모질구나.”
“후후, 각주님께 배운 것 아니겠습니까?”
곽연으로선 각주를 추켜세워 준다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그 말이 풍천익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곽연보다 더욱 모질게 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풍천익은 진양에게 마음이 동했고, 곽연이 이처럼 매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옛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진양의 글씨를 보았지만, 서예에 조예가 깊은 풍천익은 곽연보다도 훨씬 많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어쨌거나 곽연은 진양을 살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
“명을 내리시면 지금 당장 녀석을 처리하겠습니다.”
그야말로 매정한 말투였다.
평소 진양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고마워하던 곽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강호의 모습이다.
필요할 때는 안으로 품지만 불필요해지면 가차없이 내친다.
심기가 불편해진 풍천익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사 년 동안 고생한 아이다. 오늘 하루는 푹 쉬게 두어라.”
“그럼 언제쯤…….”
“내일 정오에 처리해라.”
“후후, 오늘 저녁이 녀석에겐 마지막 만찬이로군요. 알겠습니다.”
곽연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나갔다.
홀로 남은 풍천익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소매에서 화선지를 꺼내 보았다.
보면 볼수록 매혹적인 필체였다.
그는 촛불에 화선지를 가져갔다.
순식간에 옮겨 붙은 불길이 진양의 수려한 필체를 거침없이 태워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양진양은 자신의 방을 정리했다.
천상련에 들어온 지 어언 사 년.
짐을 정리하다 보니 처음 천상련으로 들어오던 날이 떠올랐다. 새삼 감회가 새로워진 진양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문득 인기척이 들렸다.
“진양아, 잠시 들어가도 될까?”
공소부의 목소리였다.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형님.”
진양의 환대에 공소부가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이내 썰렁해진 방 안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너도 떠나는구나.”
“보고 싶을 거예요, 형님.”
“나도 그럴 거야.”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각주 어르신께서 이걸 네게 전해주라고 하셨어.”
공소부가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양진양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물었다.
“이게 뭔데요?”
“나도 몰라. 참, 각주 어르신께서 네가 바쁠 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어. 난 그럼 그만 가볼게.”
공소부가 방을 나가고 나서 진양은 서신을 펼쳐 보았다. 서신에는 풍천익이 손수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한데 그 내용이 너무 뜬금없어서 진양은 한참이나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지하에 있는 창 자루로 조를 베어오너라.
그게 싫으면 발끝마다 침을 뱉고 보아라.
진양은 다시 한번 글을 꼼꼼하게 읽어봤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첫 구절은 뜬금없긴 해도 억지로 이해를 한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구절은 또 무슨 소린가?
어쨌든 풍천익이 시킨 일이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얼른 방을 정리한 뒤 지하로 내려갔다. 혹시 심부름이 끝나면 당장에라도 떠나라고 할까 봐 그동안 필사하던 자양진경을 품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양진양은 지하의 책장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창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한데 이상하게 창처럼 생긴 거라곤 단 한 자루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뭐람? 혹시 소부 형님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착각한 게 아닐까?’
진양이 허탈한 마음에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데, 마침 위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어수선하게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매우 다급한 것이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진양은 얼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