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21
신필천하(神筆天下) 121화
진양은 다시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냇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극락세계가 다시 펼쳐져 있었다.
비록 석 달이 넘도록 의식을 잃고 있었던 진양이지만, 한번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회복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진양이 기본적으로 가진 내공의 깊이가 심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노인의 약이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진양은 몸을 가볍게 움직일 정도가 되자 집을 나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매우 지형이 독특했는데, 사방이 너른 들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을 보나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냇물은 절벽 아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아마도 절벽 아래 어느 틈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듯했다.
진양은 자신이 분명히 저곳에서 떠내려 왔으리라고 짐작했다.
냇물은 너른 터를 완만하게 굽어 돌아가서는 남쪽의 절벽 아래에 난 동굴로 흘러들어 갔다.
진양은 그 동굴을 따라 걸어가 보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끝을 알 수가 없어 다시 되돌아왔다.
이곳의 생활은 불편한 것이 없었다.
나무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북쪽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야생동물이 뛰어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구나.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진양은 내심 감탄하면서 몸과 마음의 안정을 취했다.
그렇게 시간이 하루하루 흐르자 진양은 부쩍 건강해졌고, 이제 서서히 운기를 시도해도 될 만큼 나았다. 체내의 독기는 완전히 빠져서 느낄 수도 없었다.
노인은 이곳 위치를 오태산과 소오태산 사이에 위치한 이름 모를 골짜기라고 했다. 그는 농담 삼아 자신이 ‘극락곡(極樂谷)’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는데, 진양이 보기에도 그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릴 듯싶었다.
하루는 진양이 냇가에 앉아서 경치를 감상하는데 문득 마음이 움직여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바닥에 글씨를 새겼다.
問余何事棲碧山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공력을 살짝 실어 바닥 깊이 새긴 글씨는 그야말로 풍경 속에 그대로 녹아 버린 듯했다.
보는 이가 절로 흐뭇하게 웃게 되니 그 필체의 우아함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 시는 진양이 어렸을 때, 학립관에서 마지막으로 적었던 이백의 산중문답이었다.
이 시를 적던 날 진양은 여동추와 다투었고, 풍천익을 만났으며, 학립관을 떠났다.
문득 옛날 일을 떠올리니 진양은 그리움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내 노인의 경탄이 이어졌다.
“호오, 명필이로군, 명필이야. 글자에 혼과 뜻을 담을 줄 아니 과연 그대의 필력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구먼.”
“과찬입니다, 어르신.”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하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입에 바른 소리가 아닐세. 빈도는 진심으로 감탄했네.”
“보잘것없는 재주를 높이 평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네의 글을 더 보고 싶네. 내가 적는 글을 보고 뒤에 이어질 내용을 받아 적을 수 있겠는가?”
진양은 노인의 제안이 뜬금없이 느껴지긴 했지만, 내심 그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이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허허허, 만약 자네가 내 뒤를 받아 적지 못한다면 자네가 진 것일세. 내가 곧바로 구절을 적지 못하면 그땐 내가 진 셈으로 하지.”
“하하하! 좋습니다, 어르신.”
“그럼 잠시 기다리시게.”
말을 마친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보폭이 넓었지만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진양은 그의 수양이 몹시 깊을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저런 보법은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가 없겠다. 어째서 저런 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제야 진양은 노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는 새로 얻은 깨달음 때문인지 노인이 누군지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으로서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노인이 손에 수호필을 들고 나타났다. 진양이 그걸 보고 반색하며 말했다.
“그것도 보관하고 계셨군요?”
“자네에게 중요한 물건인 듯싶었네. 물에 떠내려 오면서도 이것만은 손에 쥐고 놓질 않더군. 과연 기물은 기물일세. 받게나.”
노인이 진양에게 수호필을 휙 집어 던졌다.
수호필 자체의 무게가 노인이 감당하기에는 만만하지 않을 텐데 그는 아주 쉽게 그것을 다루고 있었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자네가 든 나뭇가지를 내게 주게.”
진양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었다.
노인이 그것을 들고는 말했다.
“바닥에 그 글귀를 쓰면 너무 쉽게 알아볼 수 있으니 우리 허공에 쓰도록 하세. 서로가 마주 보고 있으면 글씨는 뒤집혀 보일 테니 그 글귀를 알아내는 것도 재능에 맡겨야 할 것일세. 어떤가?”
“좋습니다. 재미있겠군요.”
“허허, 아주 재미있는 일이지. 이 내기에서 진 사람은 오늘 한턱 쏴야 할 것이야.”
“좋습니다. 제가 진다면 노루 한 마리 잡아 대령하지요.”
“허허, 좋네. 참 좋네.”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뒤 노인은 천천히 자세를 취하며 나뭇가지를 들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싹 가시고 오로지 진지함만이 남아 있었다.
진양은 그런 노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경직되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노인의 손에서 노르스름한 기운이 뭉실뭉실 뭉쳤다
순간 그가 나뭇가지를 훅 내찌르며 글을 빠르게 적어갔다. 진양은 다음 순간 입을 척 벌리고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노인의 글씨는 그야말로 물이 흐르는 듯, 바람이 부는 듯하늘하늘 부드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야 할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폭포수가 쏟아지듯, 혹은 폭풍이 몰아치듯 힘차게 이어졌다.
花葉隨天意 꽃과 나뭇잎은 하늘 뜻을 좇고
江溪共石根 강과 개울은 돌부리와 같이 있다.
이는 두보의 동심(冬深)이라는 시였다.
진양은 노인의 필체에 새삼 감탄에 젖어 한동안 멍하니 선 채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노인이 불쑥 물었다.
“음? 벌써 포기한 것인가?”
그제야 진양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의 필체가 너무나 아름다워 잠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필체가 남은 듯합니다.”
“허허허, 입에 바른 소리는 그만하시게.”
“진심입니다.”
진양은 정말로 허공에 여전히 글씨가 남아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노인이 허공에 휘갈겨 쓴 필체의 잔상이 여전히 보였던 것이다.
“그럼.”
진양이 포권을 해 보인 뒤에 수호필을 들었다. 그리고 그 역시 막힘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바로 노인이 썼던 동심에 이어지는 구절이었다.
早霞隨類影 아침노을은 비슷한 그림자 따르고
寒水各依痕 찬 물은 각자 남은 흔적에 붙어 있다.
노인이 찬탄했다.
“호오! 좋군! 참 좋아!”
그러더니 노인이 다시 글을 적었다.
夕陽連雨是 석양에 비 뿌리는 이때에
空翠落庭陰 빈 산 푸른 기운 뜰에 내려 어두워지네.
진양은 시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 적은 것은 맹호연(孟浩然)이 지은 의공선방(義公禪房)이라는 시였다.
진양은 이번에도 노인의 필체에 내심 감탄하면서 그 뒤의 구절을 수호필을 휙휙 내저으며 이어갔다.
看取蓮花浮 물 위에 뜬 연꽃을 바라보다 따 보니
方知不染心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마음 알겠네.
진양은 이렇듯 시의 구절을 주고받으니 절로 호협한 마음이 일어났다.
게다가 서로 마주 본 채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쓰고 수호필을 휘두르니, 마치 무공을 겨루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진양이 곧장 받아 적으니 노인은 더욱 유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참 좋구나! 자네의 글씨는 빈도의 마음을 움직이네그려!”
그러면서 노인은 이제 다시 글을 적었다.
휙휙! 휙! 휙!
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니, 진양은 다시 한번 노인의 내공이 몹시 순후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百?千聲隨意移
山花紅紫樹高低
백 번을 지저귀는 많은 새소리 마음대로 옮겨
산의 꽃은 붉고 나무들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진양은 이번에도 시를 알아보았다.
노인이 이번에 적은 것은 바로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화미조(畵眉鳥)라는 시였다.
진양은 흥에 겨워 더욱 내공을 실으며 수호필을 휘둘렀다. 공력이 더욱 담기게 되자 그의 필체에서 마치 새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절제와 자유로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무리(武理)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始知鎖向金籠聽
不及林間自在啼
이제야 알겠노라. 갇힌 화려한 새장 안의 새소리
숲속의 자유로운 지저귐에 미치지 못함을.
“허허허! 좋아!”
노인은 연신 파안대소하며 신명나게 나뭇가지를 휘둘러 갔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날이 저물 때까지 시의 구절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처음에는 정해진 시를 인용해서 쓰다가 나중에는 서로 자작한 시를 쓰기도 했다.
해가 저물 무렵에는 이 두 사람의 글씨 쓰는 속도가 더욱 빨라져 범인이라면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 모두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장삼 자락은 내기의 영향을 받아 크게 부풀어 있었다.
이제는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시에 구절을 쏟아내고 있었다.
진양이 수호필을 휘두르며 획을 긋고 삐치면, 노인이 물러서며 호흡을 조절했다가 다시금 쇄도해 들어오듯 필획을 그어갔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면 마치 서로 무공을 겨루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달빛과 별빛 아래에서도 서로 글을 겨루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수호필과 나뭇가지는 단 한 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한데, 어느 순간 진양의 수호필이 ‘추(秋)’ 자를 적으며 휘둘러 갈 때, 노인의 나뭇가지와 부딪치게 생겼다. 그 찰나의 순간 진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단났구나! 지금 공력을 한껏 싣고 있는데 나뭇가지와 부딪친다면 어르신께서 틀림없이 내상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는 사이에 이미 두 사람의 필기구는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한데 수호필이 나뭇가지와 닿는 순간, 나뭇가지는 가로 획을 긋다가 자연스럽게 삐침 획을 그으며 내력을 받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글씨가 바뀌었으나, 글의 내용에는 전혀 지장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글이 어울렸던 것이다.
동시에 노인의 나뭇가지는 부드럽게 위로 들리더니 진양의 수호필을 가볍게 밀어냈다. 이는 마치 세차게 굽이쳐 흐르던 물줄기가 갑자기 너른 강물이나 바닷물을 만나 흔적도 없이 녹아드는 현상과 비슷했다.
진양은 너무나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글을 쓰던 것도 잊고 진양이 노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