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26
신필천하(神筆天下) 126화
어느 날 전학수가 아침 일찍 진양이 머무는 묵룡당(墨龍堂)을 찾아왔다. 이때쯤 전학수는 신필문에서 비도술을 가르치는 사범이었다.
“전 사범님께서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진양이 시종을 불러 그에게 차를 대접하며 물었다.
전학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필문의 기반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으니 이제 문주님의 사정도 살펴보실 만하지 않습니까?”
“제 사정이라니요?”
“혼례를 올리시는 것이 어떤지요?”
그제야 진양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고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앞으로 할 일이 많을 텐데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자 전학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문주님은 너무 이기적이십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유 낭자의 입장도 생각하셔야지요.”
“흐음.”
진양은 유설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자신만 바라보고 믿으며 지금까지 묵묵히 따라와 준 여인이 아닌가?
문득 전학수의 말대로 계속 그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사범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한번 상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문주님. 경사는 겹칠수록 좋은 것이지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전학수는 그 외에 서예에 관해 모르는 부분을 몇 가지 더 물어보고는 돌아갔다.
신필문의 모든 무인은 사범과 당주, 각주를 막론하고 진양에게 서예를 배우는 것이 의무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진양은 유설을 만나 후원을 거닐었다.
진양은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은 잔디밭을 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낭자, 그동안 나를 위해 애 많이 쓰셨소.”
“갑자기 왜 그러세요?”
유설이 귀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진양은 그녀의 미소를 보자 더욱 확신이 드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누이를 위해 내가 준비한 것이 있소.”
진양의 말에 유설은 몸을 흠칫 떨었다.
누이라는 말은 보통 남매이거나 자기 아내를 부드럽게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진양이 뒤로 물러서더니 수호필을 꺼내 쥐고는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호필이 달빛을 쪼개며 아름다운 곡선을 이어갔다.
유설은 곧 진양이 허공에 글씨를 새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혼을 하는 내용으로 지은 한 편의 시였다.
그 필체의 우아함과 진양의 정교한 보법은 쏟아져 내리는 달빛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유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남자의 움직임이 이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진양의 지금의 움직임은 서예를 하는 것인지, 춤을 추는 것인지, 무공 수련을 하는 것인지 모호했다. 전부 아닌 것도 같고, 전부 맞는 것도 같았다.
허공에 글씨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했던 허공의 글씨를 찾아내 주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한 획을 그으며 수호필을 거둔 진양의 턱 끝에서 땀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졌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유설이 여전히 멍하니 서 있으니, 진양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미안하오. 내가 말을 잘한다면 좋으련만…….”
유설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한마디라도 불쑥 꺼냈다간 금방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 같아서 차마 말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이윽고 그녀가 첫마디를 내뱉었다.
“감동…… 했어요.”
“그랬다니…… 다행이오.”
“이렇게 온몸으로 청혼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이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청혼은 지금밖에 없을 거예요.”
진양이 미소 지었다.
“누이가 날 사랑하니 그렇겠지.”
유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고마워요.”
“미안하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조촐하게 혼례를 치르려고 했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던가?
어느새 소문이 퍼져 강호의 유명한 인사들이 모두 신필문으로 모여들었다.
원래 성대한 혼례식은 생각지도 않은 진양이었기에, 장내에 장만된 음식은 별것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급한 대로 국수를 말아주었지만, 누구하나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혼례식 도중 화살 한 대가 느닷없이 날아들었다.
진양이 얼른 손을 저어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는데, 호체신공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왼손이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로 강맹한 것이었다.
이어서 어디선가 쩌렁쩌렁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코 너희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서 나온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웬 놈이냐?”
신필문의 무인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찾았지만, 누군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진양과 유설은 그가 곽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쯤이라면 천상무운신공을 더욱 깊이 익혔으니, 신필문의 무인을 따돌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리라.
잠깐의 소란이 일고 나서 혼례식은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 아래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은 부지런히 흘러갔다.
오 년 후.
장삼봉의 예언대로 병에 걸린 황제가 붕어했다. 그 뒤를 황태손 주윤문이 잇고, 연호를 건문(建文)이라 칭했다.
그는 어렸을 때 사귀었던 진양을 내내 그리워했다. 거기에 영향을 받아 연호마저도 ‘글을 세운다(建文)’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진양은 장삼봉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황궁의 소식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
간언을 일삼는 신하들을 척결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 것이다.
연왕과 황궁의 전쟁은 사 년이나 이어졌다.
이때 천의교는 연왕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의 양상은 연왕의 승세로 기울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강호에는 큰 혼란이 닥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연왕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 천의교는 황궁을 등에 업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양은 장삼봉의 예언으로 이러한 것들을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무림 각지에 영웅첩을 발송해서 회의를 주관했다.
곧 대별산으로 무림 각지에서 뛰어난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각대 문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찾아왔는데, 명이 건국된 이래 이처럼 큰 모임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진양은 대청에 모인 사람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각대 문파의 장문인이나 장로들이 모여 있으니, 대청 내에 풍기는 기운은 가히 심상치 않았다. 주로 정파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온화하고 여유가 있는 반면, 사파의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숨이 막힐 듯 팽팽하고 날카로웠다.
진양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오늘 여러분을 이렇게 모신 것은 모두 아시다시피 천의교에 관해 상의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자 혜방 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일렀다.
“그렇지 않아도 신필대협 양 장문의 명성을 듣고 한 번쯤 뵙고 싶었소.”
“감사합니다, 선사님.”
그때 혜방 선사 곁에 앉아 있던 무당파의 장문인 대청 진인(大靑眞人) 호연각(胡連珏)이 진양을 보며 물었다. 그는 이마에 굵은 주름이 세 가닥 잡혀 있었는데, 얼핏 보면 나이가 장삼봉과 비슷하게 보일 정도였다.
“소문에 양 장문께서는 예전에 우리 조사님을 뵈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진양이 곧바로 대답하자 호연각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셨소?”
“비록 몇 년 전이지만 그때 뵀을 땐 아주 정정하셨습니다. 그분께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실로 무당파가 오늘날 어째서 그토록 위명을 떨치는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호연각은 진양이 장삼봉을 찬탄하고 무당파의 위신까지 세워주자 기분이 좋아 껄껄 웃었다.
“과찬이오. 허허. 그분이 잘 지내고 계셨다니 다행이구려.”
진양은 그들 외에도 화산파의 석군평, 종남파의 봉상탁, 천상련의 풍천익, 혈사채의 곡전풍 등과 짤막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뒤 신필문이 입수한 정보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연왕과 황궁의 전쟁이 곧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며, 연왕이 승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천의교가 그 연왕을 돕고 있다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만약 연왕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 천의교는 황궁을 등에 업고 무림을 장악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진양의 말에 청성파에서 온 척금송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역사적으로 황궁이 무림의 일에 개입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까지 되겠소?”
그러자 풍천익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궁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을 뿐, 늘 간접적으로 무림의 일에 개입을 해왔소. 현재 황궁을 지키는 무인들이 익히는 무공이 무엇이오? 바로 무당파에서 전수해 주는 것이 아니오?”
실제로 무당파의 제자 중에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황제가 도사들을 초빙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무당파의 무공 일부가 조금씩 변모해서 아예 황궁의 무예로 자리 잡게 됐다.
풍천익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 호연각을 바라보게 되었고, 호연각은 그저 겸연쩍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자 척금송이 다시 불만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굳이 벌써 걱정할 필요가 있겠소? 황궁이 그리 쉽게 무너질 곳은 아니지 않소? 만약 연왕이 패한다면 천의교는 절로 무너질 것이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양 장문이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기만 하오.”
척금송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계기로 신필문이 오히려 무림인들을 수복시킬 계획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파인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진양이 이해하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황궁이 승전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의교는 자연히 설 자리를 잃을 것이고 곧 자멸하겠지요. 하지만 지금 전쟁의 양상을 보면 연왕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현재 황제를 지켜줄 개국공신들은 모두 호람의 옥으로 죽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황제를 지켜줄 측근이 없습니다.”
진양은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에 주윤문과 대화를 나누었던 가시나무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이제는 정말로 황제가 가시를 잃은 나뭇가지만 쥐고 휘두르는 꼴이 아닌가?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진양이 곧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삼봉 진인을 만나뵀을 때, 그분께서는 황궁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이 한마디에 좌중은 조용해졌다.
이 시절의 장삼봉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나 다름없었다. 장삼봉은 무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중원의 모든 백성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는 신령과 같은 존재였다.
누가 감히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자 척금송도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는 팔짱을 꼈다.
“흠!”
그때 호연각이 나서서 물었다.
“그분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소?”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목숨마저 위험하다고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지금의 황제는 제게 이 수호필을 하사하셨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장 진인께서 제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때 혈사채에서 온 위사령이 불쑥 나서서 소리쳤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을 수 없지! 뿌리를 내리기 전에 씨앗을 도려내는 것이 낫지 않겠소이까? 당장에라도 천의교를 칩시다! 우리가 황궁을 도우면 될 것이 아니겠소이까?”
이번에는 봉상탁이 반박했다.
“흥! 전쟁이 애들 싸움인 줄 아느냐? 무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하더라도 쏟아지는 화살과 창검을 전부 피할 수 있는 초인은 아니지! 그들은 병법을 익혔고, 그것은 엄연한 전쟁이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불구덩이에 몸 던지는 나방 신세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그러자 석군평이 나서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