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27
신필천하(神筆天下) 127화
“지금은 때를 기다려야 하오. 섣불리 황궁을 돕고 나섰다간 연왕이 황제가 된 후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당할 수 있소. 무인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봉 장로님의 말씀대로 천군만마를 이길 수는 없소.”
이에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당장 나서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대신 우리는 미리 대비책을 세워놓고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연왕은 무림까지 장악할 생각은 없을 겁니다. 지금 자신이 황제가 되는 일에 천의교를 이용하는 것이겠지요. 그 대가로 천의교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천의교를 치면 연왕의 적이 되지만, 연왕이 목적을 이룬 이후에 천의교를 치는 것은 크게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럼 가만히 기다리자는 것입니까?”
위사령의 말에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우리는 그때의 전쟁을 대비해야지요. 그때 일어날 무림 전쟁이 진짜 우리의 전쟁입니다.”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혜방 선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림맹을 만들어야겠소.”
모두의 시선이 혜방 선사에게 돌아갔다.
사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방비책이란 무림맹을 설립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누가 무림맹주가 된단 말인가?
무림맹주의 자리를 두고 서로 눈치를 보며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진양 역시 자신이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면 괜한 오해를 받을까 봐 말을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여태껏 술병만 들고 마시던 노인이 불쑥 말했다.
“그럼 맹주를 추대해야겠군.”
그는 바로 개방의 방주인 취룡개(醉龍?) 추방산(秋尨山)이었다.
“끄음!”
정도 문파의 무인들 사이에서 불편한 침음이 흘렀다.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맹이 만들어진 적이 있던가?
몽골족에 대항할 때 정사를 막론하고 무인들이 힘을 합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맹을 세운 적은 없었다.
당연 무림맹의 자리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때 풍천익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무림맹을 다스리기에는 혜방 선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오.”
좌중이 일순 술렁였다.
사파의 우두머리라고도 볼 수 있는 풍천익이 자진해서 혜방 선사를 추천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혜방 선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생각은 다릅니다. 사실 우리 소림사는 여러 해전에 정도의 무인들을 초빙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연왕이 무인들을 끌어모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책을 세우려고 했던 거지요. 하지만 결국 우리 소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오늘날 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소림은 깊이 자숙하고 있습니다.”
진양은 과거에 십지독녀를 쫓아 복양현에 이르렀을 때, 소림사를 찾아가는 많은 무인들을 객점에서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소림사를 찾아가던 태산삼협이 음귀곡주와 소소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때 소림은 이미 북평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방비하려고 했구나. 과연 소림이다.’
진양이 내심 찬탄하는 동안 혜방 선사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이번 회의를 주관하고, 지난번 천상련에서도 정사대전을 막아냈던 신필대협 양 장문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양 장문이 무림맹을 맡아주길 바랍니다.”
그러자 다시 좌중이 술렁였다.
정파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혜방 선사의 결단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때 호연각이 쐐기를 박았다.
“나도 찬성이오. 장삼봉 조사께서 인정하신 분이라면 우리 무당은 무조건 믿을 수 있소.”
“킬킬. 그럼 우리 개방도 연왕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양 장문께 넘기도록 하지.”
마지막으로 추방산마저 거들었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파의 태산북두가 인정을 했으니 누가 나서서 감히 반박을 하겠는가? 거기에 개방까지 더했으니 다른 자들은 감히 반대할 용기가 없었다.
진양도 애써 사양하지 않았다.
“여러분의 뜻이 그렇다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때 척금송이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양 장문께서는 맹주가 임시 직책이라는 것을 아셔야 하오.”
“물론입니다. 천의교가 강호를 위협하는 일이 없어지면 무림맹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일에 무림맹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진양은 시종 고분고분 대답했다.
결국 무인들 모두 진양을 무림맹주로 인정하고 나서 그들은 혈서를 썼다.
무림맹의 발동 조건은 연왕이 황제가 되는 순간부터로 정했다. 그리고 천의교가 사라지면 무림맹 역시 효력을 잃는 것으로 약속했다.
그렇게 정파와 사파가 합심한 무림맹이 탄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연왕의 병사들이 남경을 완전히 포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진양은 이제 자신이 나서서 황제를 살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황제를 구하러 가야겠소.”
그날 진양은 흑표 등과 함께 곧장 남경으로 향했다.
1. 연왕을 만나다
때는 바야흐로 6월이라 길가에는 여름 꽃이 만발하였고, 날씨는 따뜻했다.
진양 일행은 곧장 말을 타고 남경으로 달려갔는데, 그때쯤 도성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성내를 한 번 훑어본 진양은 외각 지역으로 나와 북동쪽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주점에 들어섰다.
때가 때인지라 주점 안에는 사람들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유일한 손님이 진양 일행이었는데, 모두 여섯 명으로 유설과 흑표, 사상이괴와 가신풍이었다.
점소이에게 주문을 시킨 진양이 최근 사정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점소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푸념을 널어놓았다.
“말도 마십쇼. 요즘 내전 때문에 장사도 안 되고 죽을 맛입니다. 황궁에서는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징병을 하기도 하고…….”
그때 서요평이 눈썹을 성큼 치뜨면서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징병되지 않았나?”
“저 같은 절름발이를 누가 쓰겠습니까요? 짐만 될 뿐이지요.”
그제야 서요평이 점소이를 가만 보니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진양이 말했다.
“어쨌든 계속 말해주시오.”
“아, 지금 도성에 소문이 아주 흉흉합니다요. 아마도 연왕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수문장들이 모두 항복할 거란 이야기도 암암리에 돌고 있습지요. 병사들이 많으면 뭘 한답니까? 막말로 병사 숫자는 연왕보다 훨씬 많지만, 지휘할 장수가 없는걸요.”
그러더니 점소이는 주위에 손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양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솔직히 제가 볼 땐 황궁이 곧 점령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연왕은 황제를 죽일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서요평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흥! 닥쳐라! 우리가 있는 이상 황제는 죽지 않는다!”
그 말에 점소이의 안색이 돌연 새파랗게 질렸다.
진양 일행이 황궁에 관계된 사람이리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눈물로 사죄했다.
“아이고, 나리!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저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점소이입니다요. 부디 아량을 베푸시고 살려만 주십시오!”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일으켰다.
“일어나시오. 우리는 황궁 사람들이 아니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어느 쪽으로든 말이오.”
“알겠습니다요,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날아간 목숨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가 연신 머리를 숙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자, 서요평이 혀를 찼다.
“쳇! 배짱도 없는 녀석.”
그때 가신풍이 근심 서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문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없나 봅니다. 이대로라면 황궁이 위험하겠군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전쟁을 막을 방도는 없으니, 황제의 목숨만이라도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니까요.”
진양이 대꾸하자 서요평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떵떵거렸다.
“흥! 그럴 것이 아니라 당장 연왕의 진영으로 달려가서 내가 그의 모가지를 따면 될 일 아니겠느냐? 연왕만 죽이면 되는데 뭐가 그리 복잡하단 말이냐?”
이에 유설이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말했다.
“어르신은 목소리를 좀 낮추세요.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누가 들으면 어때? 감히 내게 대항할 자가 있단 말이냐? 양 장문, 자네 말만 하게. 내가 연왕의 모가지를 따주기를 바라나? 그렇다면 내가 목을 따지!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대신 자네도 날 위해 뭔가를 해줘야 할 것일세.”
“하하하. 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흥! 자네도 배짱이 없구만! 연왕 따위를 무서워해서야……!”
그때였다.
갑자기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군복을 입은 장수가 고함을 지르며 들어왔다.
“어떤 놈이 감히 왕야를 모욕하느냐?”
뒤미처 주점 안으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우르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점소이는 음식을 들고 나오다 말고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양이 돌아보니 대략 스무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하나같이 창검을 들고 흉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연이은 승전 때문인지 사기가 충만해 보였다.
가장 앞서 들어왔던 장군이 실내를 휘이 둘러보더니 진양 일행을 향해 눈길을 두었다.
“네놈들이 감히 왕야를 모욕했는가?”
서요평이 발끈해서 나서려는데, 진양이 얼른 그의 손을 잡아 말리며 일어났다.
진양이 두 손을 맞잡아 흔들며 대답했다.
“높으신 장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감히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상대는 진양이 매우 공손한 태도로 나오자 격양되어 있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게다가 자신을 추켜세우니 한편으로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장군은 턱을 치켜들고 진양 일행을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들이 무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좀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밖에 있을 때, 분명 누군가 왕야를 모욕하는 소리를 들었소. 그런데 이곳엔 여러분밖에 없지 않소?”
진양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꾸할 말을 찾는데, 서요평이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뚫린 내 주둥이로 내가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드는 것이 뭐 그리 잘못이란 말이냐?”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군의 눈초리도 이내 매섭게 변했다.
진양이 얼른 나섰다.
“여기 어르신은 성품이 호방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으실 뿐입니다. 실제로 왕야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으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지요.”
하지만 장군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게 됐소. 당신들 모두 압송해야겠소.”
“흥! 어디 할 수 있다면 해보아라! 그 전에 네놈들 모가지가 땅바닥에 떨어질 줄 알아라!”
서요평이 검을 뽑아 들고 서슬 퍼런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의 전신에서 사이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자, 실내에 포진하고 있던 병사들이 저마다 긴장한 채 창검을 거머쥐었다.
반면 진양은 오히려 이 기회에 연왕을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연왕은 무인을 아끼고 중용한다고 하지 않던가?
일개 장수야 왕을 모욕한 발언에 임무를 다할 뿐이라지만, 연왕을 직접 만난다면 오히려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 말이 쉽게 통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진양이 서요평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