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3
신필천하(神筆天下) 13화
“진양이 녀석 어디 갔느냐?”
분명 곽연의 목소리였다.
진양은 갑자기 곽연이 새된 목소리로 자신을 찾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곽연의 목소리가 몹시 날카로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좋은 일로 찾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보통 때라면 자진해서 나섰겠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진양도 선뜻 나서기가 싫었다. 그래서 계단에 몸을 바짝 웅크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마침 일층에서 곽연을 맞아 이야기하는 공소부가 보였다. 그 순간 양진양과 공소부의 눈길이 정확히 마주쳤다.
하지만 곽연은 공소부를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등 뒤에 있는 진양을 눈치채지 못했다. 공소부는 짐짓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눈길을 돌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조금 전까지 방에 있었는데…….”
“정말이냐? 행여 거짓말이라도 했다간 네놈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곽연이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몰래 지켜보던 진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검까지 뽑아 들고 저 난리를 친단 말인가.
공소부 역시 겁에 잔뜩 질려 있었지만, 끝까지 진양과의 의를 지키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전 몰라요. 정말이에요.”
“흥! 그 녀석이 벌써 눈치를 채고 달아난 모양이군! 모두 흩어져서 녀석을 찾아라! 조금 전까지 방에 있었다고 하니 아직 련 내를 벗어나진 못했을 것이다! 어서!”
곽연이 소리쳐 명하자 여러 사람의 우렁찬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진양이 있는 곳에서는 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목소리만 듣고 사람 수를 짐작할 뿐이었다.
진양은 얼른 지하로 내려가서 책장 구석진 자리로 걸어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부각주님은 날 죽이려는 말투였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지? 그리고 각주님은 왜 나한테 이상한 심부름을 시킨 걸까?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순간 진양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혹시?’
진양은 손가락으로 먼지가 자욱한 바닥에 글자를 적어갔다.
‘어쩌면 각주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신 걸지도 몰라.’
진양은 한참 동안 바닥에 글씨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내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이거구나. 창 자루로 조를 베어오라는 건 바로 이 글자를 나타내는 것이었어.”
바닥에 새겨진 글씨는 한 글자였다.
살(殺).
창 자루는 ‘수(?)’ 자로 쓸 수 있다. 그리고 조는 ‘출(朮)’ 자로 쓸 수 있을 것이고, 베어오라 했으니 ‘예(乂)’ 자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모두 합하면 바로 죽일 ‘살(殺)’이 된다.
즉, 풍천익은 심부름을 시키는 척하면서 진양에게 곽연이 죽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흘린 것이다.
한 줄기 희망이 생긴 진양은 재빨리 풍천익의 서신을 펼쳐 보았다.
지하에 있는 창 자루로 조를 베어오너라.
그게 싫으면 발끝마다 침을 뱉고 보아라.
“첫 구절은 죽일 ‘살(殺)’을 뜻하는 것인데, 두 번째 구절은 뭘 뜻하는 것일까? 정말로 발끝마다 침을 뱉으란 말은 아닐 거야.”
진양은 다시 바닥에 이런저런 글씨를 적어보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빨리 글씨를 추리해 낼 수 있었다.
“발끝마다라고 했으니 우선 ‘족(足)’이라고 쓰고 ‘각(各)’ 자를 쓸 수 있겠다. 그럼 이 두 글자를 합하면 로(路)가 된다. 그리고 침이라면…… 아!”
진양이 다시 또 한 글자를 바닥에 적었다.
이렇게 되자 먼지 바닥에는 두 글자가 나란히 적혔다.
활로(活路).
“이거였어! 침은 입안에 있는 물이니까 혀를 뜻하는 ‘설(舌)’ 자에 물 수변(?)을 붙이면 바로 살 ‘활(活)’ 자가 되지. 그리고 마지막은 보라고 했으니 ‘견(見)’ 자가 되겠다!”
어느새 바닥에는 세 글자가 나란히 적혔다.
활로견(活路見).
즉, ‘살길을 보라’는 뜻이다.
앞의 풀이와 이어서 보자면, 한마디로 죽기 싫으면 살길을 보라는 말로 해석된다.
비록 상황이 급박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마치 수수께끼가 풀리듯하나하나 실마리를 찾아내자 진양은 은근한 즐거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때 양진양의 머릿속에 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바로 언젠가 지하에서 필사할 책들을 꺼내던 중에 ‘활로(活路)’라는 책을 본 기억이 난 것이다. 각종 진법에 대한 풀이를 적은 책으로, 진에 갇혔을 때 사문(死門)을 피하고 생문(生門)을 찾아내는 방법이 적힌 것이었다.
‘혹시 살길을 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책을 찾아보라는 뜻이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양은 얼른 책장을 뒤져 ‘활로’라는 책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지난번 보았던 위치에는 그 책이 꽂혀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 옮겨놓은 모양이었다.
진양은 마음이 급해졌다.
곽연이 수하들을 이끌고 장내를 수색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곳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가장 먼저 지하부터 수색할 것이다.
한참 동안 책장 사이를 누비며 책을 찾던 진양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찾았다!’
진양은 얼른 책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책에는 어떤 특이점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날 방법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양은 다시 책이 꽂혀 있던 자리를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그러자 과연 책장 바닥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파여 있었다.
‘기관이 장치되어 있구나!’
그제야 진양은 풍천익의 배려에 깊이 감동했다.
풍천익은 대단히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진양을 섣불리 돕다가 실패할 것을 감안해서 이렇게 에둘러서 도와준 것이다.
그때, 진양의 눈길이 닿은 곳에 낯익은 제목의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劒).
진양은 사 년 전에 만났던 화산파의 제자인 선남선녀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사문의 비전절기를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지만, 풍천익이 방관만 하자 순순히 풀어주었다. 게다가 혈사채 무인인 위사령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할 때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천상련은 지난 사 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주었더니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이때쯤 진양은 천상련이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천상련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무공서를 자신이 익히거나 암기하고 있을까 봐 그럴 것이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전부 암기라도 해버릴걸!’
괜히 분한 마음이 일어났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늦은 일.
진양은 괘씸한 생각이 들자 칠절매화검이라도 훔쳐 가서 그 화산파의 선남선녀 제자들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칠절매화검을 품에 챙긴 진양은 책장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힘껏 눌렀다.
그러자 순간 곁에 있던 벽이 ‘구구궁!’ 소리를 내더니 옆으로 천천히 열리는 것이 아닌가.
진양은 내심 기뻐하면서 얼른 벽 안으로 걸어갔다. 안쪽은 몹시 어두웠지만 손에 들고 있는 야명주 때문에 발 디딜 길은 찾을 수 있었다.
얼마 동안 어두운 길을 따라 달렸을까.
진양은 문득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등골이 오싹했다. 인기척은 점점 가까워진다 싶더니 이내 사람의 목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시 곽연의 목소리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진양은 얼른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달려가자 나뭇가지가 뒤엉켜 있는 출구가 눈에 보였다.
진양은 맨손으로 가지를 마구 쳐내고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걸쳐 하늘이 붉게 물들고 땅거미가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조금 달리자니 역시나 곽연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등 뒤에서 들리는 듯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곽연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느긋해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더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진양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진양은 곽연이 왜 느긋하게 추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양이 달려간 끝자락에는 천 리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까마득한 아래로는 시커먼 물살이 무섭게 휘몰아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진양이 망연자실해 서 있는데, 곽연이 등 뒤로 다가와 껄껄 웃었다. 그의 뒤로는 수하 십여 명이 도열해 있었다.
“용케도 기관 장치를 알고 있었구나. 하긴 사 년 동안 지하 보관실을 제 방처럼 들락거렸으니 당연할지도.”
그는 풍천익이 양진양을 도왔다는 사실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진양은 서글프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눈시울이 불거졌다.
“곽 부각주님은 제게 많은 도움을 받으셨으면서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흥! 네깟 녀석이 뭘 알겠느냐? 원래 강호의 일이 다 그런 것이다. 천상련의 무공서를 필사한다면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짐작했어야지.”
“정말 절 죽일 생각입니까?”
“그러지 않을 거면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다.”
곽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왔다.
진양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다가 벼랑 끝까지 내몰려 더 이상 물러갈 곳이 없게 되었다. 진양이 고개를 돌려 굽어 보니 시커먼 물살이 한 마리의 용처럼 사납게 꿈틀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누구라도 저 물살에 휩쓸렸다간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도처에 죽음만이 가득한 상황.
이리되자 진양은 오히려 오기가 생겨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의협도 모르는 이 곽씨 놈아! 다 큰 어른이 돼서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하다니! 하늘을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놈이……!”
“이 금수만도 못한 놈아! 길 가는 똥개도 너보단 나을 거다!”
곽연은 수하들도 함께 있는 와중에 돌연 아이한테 욕을 얻어먹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내 입으로 맞는 말을 떠드는데 무슨 문제냐! 천하의 짐승만도 못한 놈아!”
“이익!”
곽연이 성큼 다가가서 진양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 순간 진양이 얼른 그의 팔목을 휘어 감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곽연과 함께 계곡으로 뛰어들어 동귀어진을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곽연은 진양의 의도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기본적인 무공 초식 하나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가 어찌 자신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곽연은 내심 코웃음을 치며 진양의 뺨을 올려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양의 손에 잡힌 팔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진양이 움켜잡고 있는 팔목이 부러질 듯이 아파왔다.
‘이, 이 녀석이 어떻게?’
곽연은 내심 당황했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얼른 다른 손을 휘둘러 뺨을 때렸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뺨을 후려치는 듯이 보였지만 그의 손바닥에는 상당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때문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었다.
철썩!
시원한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