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34
신필천하(神筆天下) 134화
“마땅히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저 가볍게 식사만 했던 자리인지라…….”
“그렇구려. 천의교라는 조직은 참으로 베일을 벗기기가 어렵군.”
“한 가지 의문점은 있습니다.”
“무엇이오?”
“이날 이때까지 천의교에 대해서 조사하고 직접 부딪쳐도 보았지만, 아직 한 번도 천의교주에 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위교사왕의 입을 통해 천의교주가 대단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 외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요. 혹 개방에서는 이에 관한 정보가 있는지요?”
추방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에 대해 나도 조사하고 있었소. 한데 최근 우리 개방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뜻밖의 결과가 도출되고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실제로 천의교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진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의교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니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까?”
추방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
“하면?”
“처음부터 천의교주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라오.”
“처음부터 교주가 없었다고요? 그럼 저들이 말하는 천의교주는 누구라는 말씀인지요?”
“그러니까 그 교주라는 자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거요.”
“아……!”
“우리 개방도 백방으로 조사하고 알아보았지만, 그 교주의 실체는 단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소이다. 개방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소속과 신분이 분명한 자를 두고 이처럼 오랫동안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지 못한 적은 없었소.”
“그럼 천의교는 위교사왕이 만든 조직이고, 교주라는 자는 위교사왕이 꾸며낸 우상과 같은 것이군요.”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현재 개방의 정보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소.”
“신뢰도가 얼마나 됩니까?”
“칠 할 이상이오.”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에서 칠 할 이상의 신뢰도를 가진 정보는 거의 사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 하오문은 헛소문이든 진실이든 상관없이 온갖 정보를 긁어모은다.
하지만 개방은 일 할의 의심이라도 보이면 끝까지 진위 여부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진양이 입을 열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앞으로의 일은 좀 더 수월해질 수 있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어쩌면 보이지 않는 자 때문에 강호인들이 더욱 위축되어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것 같소서 우리 개방은 무림맹이 설립되면 이 사실부터 먼저 알릴까 생각 중이오.”
“천의교주가 없다는 사실 말씀입니까?”
“그렇소.”
“하지만 그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랬다가 후에 천의교주의 존재가 밝혀지기라도 하면 무림맹은 큰 혼란에 휩싸일 것입니다. 개방의 정보라면 강호인들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기도 하니까요. 하니 천의교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열어두어야겠지요.”
그러자 추방산은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혹시 양 장문은 우리 개방의 정보를 신뢰하기 힘들다는 뜻이오?”
짐짓 불쾌함이 드러나는 그의 말투에 진양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요.”
추방산은 진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양 장문, 한데 연왕에게 적어주었던 글귀는 무엇이오? 내게도 견식할 기회를 주시겠소? 나 역시 양 장문의 글씨를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오.”
“미천한 솜씨지만 보여 드리지요.”
“허허, 고맙소.”
추방산은 사람을 시켜 문방사우를 챙겨오도록 했다.
진양은 곧 붓을 들고 연왕의 막사에서 적었던 ‘충신’이라는 글자를 썼다.
글씨를 본 추방산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훌륭하군, 훌륭해. 글자에 뜻이 담기고 혼백이 담겨 있소. 그 절절함이 넘쳐흐르는구려.”
“지나친 칭찬이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허허. 사실을 말한 것뿐이오. 사실 노부도 심심풀이 삼아 글을 쓰곤 하는데 한 번 봐주시겠소?”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허허, 별말씀을.”
그러더니 추방산은 붓을 들어 종이에 글자를 적어갔다.
일필휘지로 적어가는 추방산의 붓에는 힘이 넘쳐 났고, 정교함이 묻어 있었다.
그가 적은 글자는 모두 네 글자였다.
鬪志
信賴
붓을 놓은 추방산이 진양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양 장문이 연왕에게 필요한 것을 적어주었다면, 나는 우리 무림맹에 필요한 것을 적어보았소. 어떻소?”
진양은 이 글자들을 보고 내심 감탄에 젖어 한동안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가 한참 만에야 진심 어린 감탄을 담아 대답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처럼 글자에 뜻을 담아낼 수 있는 경지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투지’와 ‘신뢰’라…… 과연 무림맹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양은 다시 한번 글자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 ‘투지(鬪志)’라는 글자에서는 강렬한 필획과 그 모양새에서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물씬 풍겨 나왔고, ‘신뢰(信賴)’라는 글자에서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허허. 신필대협 양 장문께 그런 극찬을 들으니 노부가 부끄럽소.”
“별말씀을요. 오히려 그 별호는 추 방주님께 어울릴 것 같군요.”
“허허허. 과찬이오. 혹 내 글씨에서 미흡한 점은 없었소?”
“나무랄 데가 없는 글씨입니다.”
진양이 다시 한번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굳이 흠을 잡자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투지’라는 글씨에서는 그 강맹한 힘이 너무 넘쳤고, 반면 ‘신뢰’라는 글씨는 다소 유약해 보이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대개의 사람이라면 결코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미세한 차이였다. 그래서 진양은 굳이 그러한 것들을 입에 담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 단어 모두 뜻과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기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추방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런. 몹시 피곤하실 텐데 노부가 염치없게 오랫동안 붙들었구려. 이제 그만 가서 쉬도록 하시오.”
“하하. 저 역시 추 방주님께 깊은 가르침을 받아 흥겨운 자리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다음 날 새벽 진양은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깨어났다. 그가 탁자에 차려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바깥에서 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 소리는 진양이 머무는 방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대청 앞에서 들리는 소리였지만, 고의적으로 목소리를 죽여 수군거리는 것이다 보니 진양은 못내 신경이 쓰인 것이다.
진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대청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대청 앞에는 추방산을 비롯한 몇 명의 개방 제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진양을 알아보았다.
“양 장문께서 새벽 시간에 어찌 주무시지 않고 나오셨습니까?”
그의 표정이 다소 놀란 듯했다.
진양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목이 말라 깨어났다가 멀리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나와보았습니다.”
진양의 대답에 거지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이었다.
소리를 한껏 죽이고 수군거렸는데도 그 멀리에서 소리를 들었다니, 진양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진양이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기셨습니까? 모두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진양의 말에 거지들이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추방산을 힐끔 쳐다보았다.
추방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진양에게 다가갔다.
“사실 양 장문께는 말하고 싶지 않았소. 분명 걱정하실 것 같아…….”
진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 가 당주가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아니오. 아직 그런 정도는 아니오. 다만 그가 위험에 처한 것은 사실이오.”
“그곳이 어딥니까?”
진양이 당장에라도 달려갈 듯이 말했다.
추방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들으시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지금 가 당주는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숲속에 있소. 한데 병사들이 포위진을 펼쳐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하오. 아직 사로잡히지는 않았지만…….”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진양이 다그치자 추방산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해봐야 양 장문이 걱정만 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랬소. 우리 개방이 직접 가서 가 대협을 구해올 생각이었다오.”
“우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양이 말을 던지고는 곧장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추방산이 손을 뻗어 진양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거긴 지금 몹시 위험하오. 양 장문이 가서 혹여 잘못되면 큰일이 아니겠소. 양 장문은 앞으로 무림맹을 이끌어야 할지도 모르오. 하니 몸가짐을 조심히 하셔야 하오.”
하지만 진양은 추방산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맹주의 자리가 몸을 사려야 하는 자리라면, 굳이 제가 맡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더니 진양은 번개처럼 달려나갔다.
밤바람이 스쳤다.
진양은 바람결에 따라 나뭇가지 위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광활한 숲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언덕 위.
그곳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의 맨 끝가지에 진양이 두 발을 모아 꼿꼿하게 선 채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그가 살피는 숲의 방향도 달라졌다.
어느 순간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저기군!’
찰나, 진양의 몸이 쏜살처럼 날아갔다.
허공을 밟으며 한참을 날아간 진양이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질풍처럼 질주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뒤늦게 풀잎들이 몸을 눕혔다.
마침 숲 바깥쪽에서 포진해 있던 병사 몇 명이 진양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얼른 창검을 앞세웠다.
“헛! 누구……!”
샤악! 캉!
“악!”
“커억!”
그들은 말도 끝맺기 전에 진양의 수호필에 혈도가 짚여 그대로 짚단처럼 넘어가 버렸다.
병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지자, 진양은 옆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동하는 동안 병사들 몇이 그를 확인하고는 화살을 쏘았다.
“또 다른 놈이 있……!”
쒜에엑!
“커억!”
화살을 쏜 병사들 역시 말을 맺기도 전에 자신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진양이 날아드는 화살을 낚아채고는 각기 다른 곳의 병사들에게 공력을 실어 쏘아 보낸 것이다.
그중 몇몇은 그대로 목이 꿰뚫려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진양은 되도록 살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나 가신풍이 적에게 사로잡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런 아량을 베풀 만큼 여유롭지가 못했던 것이다.
진양은 그야말로 한 줄기 바람처럼 숲속으로 스며들어 나무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빠르게 나아갔다.
그가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밀집한 병사들이 많아졌다.
진양은 때때로 병사들 뒤로 소리 없이 다가가 목을 비틀기도 했고, 혈을 짚어 잠재우기도 했다.
어느 한 명이라도 진양을 발견했다 싶으면 그가 소리치기도 전에 검이나 창을 집어 던져 목숨을 끊어 버렸다.
주위가 잠잠해지자 진양은 다시 커다란 나무 기둥을 밟고 다람쥐처럼 날아올랐다. 그가 나무 끝에서 허공으로 도약하며 주위를 살피자, 곧 나뭇가지가 많이 흔들리는 지역이 눈에 띄었다.
분명 많은 병사들이 가신풍을 포위하고 있는 곳이리라.
바닥에 착지한 진양은 심호흡을 한 후 주변을 날카롭게 훑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지금까지는 거침없이 파고들어 왔다면, 이제부턴 숨을 죽여 저승사자처럼 고요히 잠입해 적들을 하나씩 제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