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35
신필천하(神筆天下) 135화
진양은 경신법을 써서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병사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얼마쯤 나아가자 나무 사이로 멀찌감치 서 있는 가신풍이 눈에 들어왔다.
진양은 반가운 마음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가신풍은 한 사람을 대면하고 있었는데, 바로 곽연이었다.
가신풍이 곽연과 정면 승부를 벌인다면 절대 곽연을 이길 수 없었다.
때문에 가신풍은 계속 눈길을 이리저리 던지며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달아났지만, 사방에 포진하고 있는 병사들 때문에 가신풍은 번번이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발이 묶였던 것이다.
이제 가신풍도 체력이 다 되었는지 호흡이 거칠었다.
반면 곽연은 아직도 느긋한 여유가 있었다.
진양은 곽연의 등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좌우를 살폈다.
왼쪽에 두 명의 병사가 창을 쥐고 있었고, 오른쪽에 한 명의 병사가 검을 쥐고 있었다.
가신풍의 신법이 아무리 재빠르다고 하더라도 곽연을 뚫고 달아나기는 힘들기 때문에 다른 방향에 비하여 비교적 적은 수의 병사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양이 그 뒤로 접근해 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진양은 호흡을 죽인 채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지금 섣불리 움직인다면 곽연이 분명 눈치챌 수 있었다.
기회는 단 한 번.
곽연과 가신풍이 서로 검을 섞을 때다.
두 사람이 격돌하는 순간, 진양이 병사 세 명을 순식간에 잠재울 수만 있다면 가신풍을 도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물론 곽연의 일격에 가신풍이 급소를 맞거나 죽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모든 계산은 허물어진다.
모쪼록 가신풍이 곽연의 공격을 견뎌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곽연과 가신풍은 한동안 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진양은 두 사람의 대화에는 일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곽연의 뒷모습을 보며 언제 움직일지 예의주시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곽연의 전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진양이 잽싸게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거의 동시에 곽연 역시 가신풍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 들어갔다.
움직임은 진양이 먼저였지만, 범인이 본다면 동시에 움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양은 곽연의 호흡과 근육의 움직임, 기운 등으로 그가 움직일 것을 미리 예측한 것이다.
곽연이 가신풍에게 거의 다다랐을 때쯤, 진양은 병사 한 명 뒤로 은밀하고도 빠르게 다가갔다.
이른바 귀신처럼 소리 없이 움직인다 하여 귀영보법(鬼影步法)이라 불리는 경신법이었다.
진양이 그의 등 혈도를 찍자 병사가 움찔 떨며 그대로 굳었다. 바로 곁에 있던 병사가 진양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하나 그가 겨우 몸만 뒤틀었을 때, 진양의 수호필이 빠르게 나아가 그의 목 아래 혈도와 가슴과 배의 혈도를 차례로 두드려 나갔다.
아혈과 마혈이 짚인 그 병사 역시 짤막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두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는 마침 곽연과 가신풍이 서로 검을 섞으며 터져 나온 마찰음에 묻히고 말았다.
털썩!
털썩!
까앙!
가신풍을 상대하느라 모든 신경을 쏟아붓고 있는 곽연은 자신 뒤를 받치고 있던 병사 둘이 소리 없이 쓰러진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진양이 우려하고 있던 오른쪽에 서 있던 병사가 진양을 발견했다.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막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려는데,
쒜에엑!
진양이 던진 창날이 곧장 날아가 병사의 목을 꿰뚫고 나무기둥에 박혔다. 이번에도 그 소리는 곽연과 가신풍의 마찰음에 묻혔다.
까앙! 깡!
콰직!
그야말로 순식간에 병사 세 명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진양은 가급적 살생을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병사를 처리할 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 번째 병사가 쓰러졌으니 이제는 퇴로가 확보된 셈이었다.
진양은 곧장 곽연에게 달려가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가 당주! 내가 왔소!”
그 소리에 매몰차게 공격을 이어가던 곽연이 흠칫 떨며 몸을 돌렸다.
순간 진양이 수호필을 무겁게 내려쳤다.
쩌엉!
곽연과 진양 사이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사방으로 후끈한 기운이 훅 불어나갔다.
“문주님!”
가신풍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진양은 그대로 공력을 끌어올려 곽연의 검을 밀어 쳤다. 곽연이 뒤로 수 장을 주룩 밀려 나가자, 진양이 얼른 소리쳤다.
“달리시오! 가 당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신풍이 진양 뒤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진양 역시 더는 곽연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달렸다.
“이익! 양진야앙!”
곽연이 이마에 시퍼런 핏대를 세우며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진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곧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곽연이 바람처럼 달려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경공술이 누구보다 뛰어난 가신풍은 이미 숲을 거의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그가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나무를 밟고 올라서서는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곽연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패앵!
쒜에엑!
“이익!”
곽연이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고는 다시 뒤쫓아 갔다.
가신풍과 진양은 이내 숲 밖으로 나와 언덕을 달리기 시작했다.
진이 무너진 병사들이 뒤늦게 두 사람을 쫓아 숲에서 뛰쳐나왔다. 병사들이 대열을 지어 두 사람을 뒤쫓는데, 마침 언덕 위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거지 떼가 나타났다.
거지들은 저마다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고, 구걸하거나 앓는 소리를 내며 병사들의 혼을 빼놓았다.
거지들 사이로 걸어나온 자가 진양과 가신풍을 맞이했다.
“고생하셨소.”
그는 바로 개방의 방주인 추방산이었다.
진양이 양손을 맞잡으며 사례했다.
“마중을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양 장문이 위기에 처한 것을 빤히 알고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그러더니 추방산은 진양을 지나쳐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여기 양 장문은 우리 개방의 손님이오! 우리 개방에는 십만 방도가 있소! 우리 손님을 위협하는 것은 곧 개방을 위협하는 것과 같소! 자! 어쩌시겠소?”
곽연은 진양을 노려보다가 다시 시선을 추방산에게 돌렸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윽고 곽연이 체념한 듯 돌아섰다.
“진영으로 돌아갑시다.”
그의 말에 병사들을 이끌고 온 장군이 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병사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자, 진양은 다시 한번 개방의 위세에 감탄했다.
‘개방이 이 정도로 위명이 높을 줄은 몰랐구나. 방주의 한마디 말에 저 많은 병사들이 발길을 돌릴 줄이야. 그게 아니라면 혹 연왕은 개방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진양으로서는 가신풍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양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개방의 남경 분타로 돌아갔다.
4. 황제는 머리를 깎고
사흘 후 급보가 날아왔다.
연왕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가신풍이 남경의 개방 분타로 급히 달려왔다.
“문주님! 일이 터졌습니다!”
진양을 비롯한 유설과 사상이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요평이 물었다.
“연왕이 황궁을 쳤는가?”
“예, 수성장(守城將) 이경륭(李景隆)이 성문을 열고 곧바로 투항했습니다!”
“뭐야!”
쾅!
서요평이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가 씨근대며 소리쳤다.
“어찌 황제의 신하 된 자가 제대로 싸움도 하지 않고 역적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단 말인가?”
진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겠습니다. 당장 가봐야겠습니다.”
“나도 가겠네!”
“저도 가겠어요!”
하지만 진양은 유설을 남게 했다.
“누이는 남아서 흑 당주를 보살펴 주시오.”
“하지만…….”
“당주만 여기에 두고 모두 갈 수는 없지 않겠소?”
“……알겠어요.”
유설이 수긍하자, 진양은 곧바로 사상이괴와 가신풍을 데리고 황궁으로 떠났다.
황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연왕이 끌고 온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 있었고,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저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연왕을 맞이했다.
연왕의 병사들은 황궁 곳곳을 들쑤시며 황제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진양 일행은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곧장 황제가 있을 법한 거처로 찾아갔다. 이미 오래전에 그는 현 황제와 친분을 쌓으면서 황궁 내에서 그가 갈 만한 장소를 대충 짐작하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침 그가 다다랐을 때, 궁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진양이 얼른 달려들어 가니 시퍼런 빛줄기가 날아들며 진양의 목을 노렸다.
“헛!”
진양이 몸을 뒤틀며 피하자, 강맹한 힘이 실렸던 검은 그대로 문짝을 그으며 두 동강 내버렸다.
검을 휘두른 상대는 진양이 민첩하게 피해내자 내심 놀란 듯 몸을 움찔 떨며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곧 진양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반색하는 표정이 됐다.
“당, 당신은……!”
진양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에게 검을 휘두른 자는 다름 아닌 황제의 오래된 호위무사 번웅이었다.
진양이 얼른 번웅을 향해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따라오십시오!”
번웅이 얼른 몸을 돌리고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미 연기는 복도를 가득 메워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궁 밖에는 병사들이 모인 것인지, 태감들이 모인 것인지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번웅이 방문 앞에 다다라 문을 벌컥 열자,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정좌하고 앉아 있는 주윤문이 보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소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진양은 그의 얼굴에서 과거의 추억을 고스란히 되새길 수 있었다.
진양이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렸다.
“폐하! 불충한 양 아무개가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진양의 목소리에 주윤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는 진양을 보고는 잠시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는지 눈을 몇 번 끔뻑였다. 그리고 그 곁에 묵묵히 선 번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번웅,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이오? 아니면 연기에 취해 환각을 보는 것이오?”
번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양 장문이 찾아왔습니다. 폐하께서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그분이 직접 오셨습니다.”
“아……!”
그제야 주윤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환하게 웃었다.
“양 장문…… 정말 그대가 그때의 양진양이란 말이오?”
“폐하! 틀림없이 제가 양진양이옵니다! 그동안 폐하를 찾아뵙지 못한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진양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윤문도 어느새 양 뺨에 눈물 줄기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가 흐느끼며 엎드려 있는 진양을 덥석 안았다.
“어찌 이곳에 그대가 있단 말이오? 어찌 그대가 지금 내 앞에 있단 말이오? 그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보시오.”
“폐하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폐하, 어서 마음을 추스르시고 이곳을 떠나십시오. 연왕은 폐하를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잠시 떠났다가 훗날을 도모하심이 옳습니다!”
하지만 주윤문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소. 훗날을 도모하는 것 자체가 싫다오. 양 장문, 내가 죽기 전에 그대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신이 내게 베푼 마지막 선물이 아닌가 싶소. 고맙소. 나를 위해 이 먼 곳까지 와줘서 정말 고맙소. 하나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의지가 없소.”
“폐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이곳까지 달려온 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사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다면, 그 삶도 살아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훗날을 도모하지 않으시겠다면, 다른 인생을 한 번 살아보시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