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36
신필천하(神筆天下) 136화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번웅도 진양을 거들었다.
“폐하, 양 장문은 폐하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의 뜻을 헛되게 하지 마시옵소서.”
주윤문은 고개를 들고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하지만 번웅의 말대로 진양의 수고로움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양이 이야기한 것처럼 황제의 인생이 아닌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무엇보다 자신이 여기서 망설이고 있으면 진양마저 더욱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주윤문이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알겠소. 내 지금은 삶을 포기하지 않으리다. 하지만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소?”
“궁내에 비밀통로가 있는지요?”
“비밀통로가 있긴 하지만 여기서 북서쪽으로 좀 더 가야 하오. 아마도 그 궁에도 지금 불이 났을 거요.”
“그럼 우선 그곳으로 가지요!”
그때 복도에서 기다리던 사상이괴와 가신풍이 방 안으로 달려왔다.
“서둘러야겠네!”
서요평의 외침에 이어 가신풍이 말했다.
“지금 병사들이 이곳으로 들어올 기세입니다!”
진양이 고개를 돌려 번웅에게 물었다.
“혹시 나가는 길이 또 있습니까?”
번웅이 앞장서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그들은 불기둥이 쓰러지는 복도를 빠르게 달려 궁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이 막 밖으로 나서자 마침 뒷문을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이 진양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앗! 여기 있다!”
병사들은 차마 황제를 향해 창검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위협적인 눈빛으로 포위만 했다.
그 순간 번웅이 눈을 번뜩이며 몸을 날렸다.
퍼억!
서걱!
“커억!”
번웅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다른 병사들이 번웅의 뒤를 공격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가신풍과 사상이괴가 몸을 날려 그들을 공격했다.
“어딜!”
“네놈들이 감히 폐하께 창검을 겨누다니! 이 오랑캐만도 못한 놈들!”
가신풍과 서요평의 합세에 병사들은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져 갔다.
진양은 얼른 주윤문을 호위하며 달려갔다.
“어서 가시지요!”
진양과 주윤문이 무사히 포위망을 빠져나가자, 번웅과 사상이괴, 가신풍도 몸을 빼내고 뒤쫓아 왔다.
진양 일행이 도착한 곳은 주윤문의 말대로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궁전이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비밀통로로 탈출할 수가 있는데…….”
주윤문이 가리킨 곳은 궁의 입구였다. 그곳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했다.
“제가 폐하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진양이 무릎을 꿇고 이야기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주윤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진양이 먼저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가자, 다른 일행도 그 뒤를 따라갔다. 뒤쫓아 오던 병사들은 이글거리는 화마를 이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서기에 바빴다.
마침 병사들을 인솔하는 장군이 사방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근방을 샅샅이 뒤져서 빠져나갈 길을 모두 봉쇄하라!”
“옛!”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지끈!
불길에 휘감긴 기둥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조심!”
서요평이 손바닥에 공력을 실어 진양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쳤다. 진양이 앞으로 서너 걸음 떠밀려 걷자 마침 그 빈자리에 불기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콰당! 탕!
다른 사람들은 경공술을 이용해 불기둥을 가볍게 넘어왔다.
진양은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방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살갗이 따가웠다.
그나마 이들이 이만큼 버틸 수 있는 것은 공력을 이용해서 차가운 기운을 체내에 주천시키기 때문이었다.
가장 버티기 힘겨운 사람은 무공이 제일 약한 주윤문과 양의 기운이 유독 강한 서운지였다.
때문에 진양은 주윤문에게 끊임없이 차가운 음의 기운을 흘려보냈고, 서운지와 서요평은 손을 꼭 잡은 채 걷고 있었다.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시오.”
주윤문이 힘겹게 말했다.
사방이 불길과 연기였기에 아무리 진양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주윤문의 안색이 평안할 수는 없었다.
진양은 재빨리 수호필을 꺼내 쥐고 바닥을 내려찍었다.
콰장!
그러자 실내 바닥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그 아래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진양 일행은 재빨리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지하 깊숙이 들어간 진양 일행은 비밀 통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는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만약 누군가 이 비밀통로를 발견하게 되더라도 길을 제대로 모른다면 바깥으로 빠져나가긴 힘들 듯했다.
하지만 주윤문은 길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여기서 오른쪽. 그리고 다음에는 왼쪽.”
진양은 줄곧 주윤문이 지시하는 대로 달려갔다.
어느 정도 달려가자 주윤문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제 나를 내려주시오. 걸을 수 있을 것 같소.”
“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길을 가는데, 어느 갈림길에서 갑자기 병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앗! 여, 여기 놈이 있다!”
병사의 외침에 다른 통로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다른 궁에서 비밀통로를 발견하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진양은 재빨리 수호필을 휘둘러 병사의 목을 그어 버렸다.
“크억!”
병사가 목을 쥔 채 피분수를 뿜으며 쓰러졌다.
“달려야겠습니다!”
진양 일행이 달리기 시작하자, 병사들이 뒤에서 고함을 내지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좁은 지하 통로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병사가 한꺼번에 고함을 내지르니 그 울림이 몹시 컸다.
주윤문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한참 달리던 진양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이를 본 가신풍이 물었다.
“문주님, 왜 그러십니까?”
“폐하를 모시고 먼저 가시오!”
“하면 문주님은…….”
“곧 뒤따라가겠소. 가는 길마다 칼자국을 내서 표시를 해두시오. 내가 찾아갈 수 있도록.”
가신풍은 진양에게 함께 가자고 하려다가, 곧 진양이 뭔가를 시도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진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주윤문을 비롯한 다른 무인들은 진양을 남겨두고 모두 비상통로를 따라 떠났다.
조금 있자 병사들이 진양 앞에 다다랐다.
그들은 진양이 갑자기 통로를 막아선 채 떡 하니 버티고 있자, 주눅이 들어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병사 하나가 칼을 들어 진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놈! 황제 폐하는 어디에 계시는가?”
진양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네놈들에게 투항하는 대신 죽음을 택하셨다!”
“뭐, 뭣이? 그, 그럼 네놈들이 결국 폐하를 죽게 했구나!”
병사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마도 진양의 말을 믿는 모양이었다.
진양이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흥! 황제 폐하를 위협한 네놈들이 할 소린가?”
“뭣이? 누가 위협한단 말이냐? 우리는 황제 폐하를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다!”
“닥쳐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진양이 노기에 찬 목소리로 외치자, 지하통로가 통째로 떨리는 듯했다.
병사들이 기가 죽어 차마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진양은 천천히 공력을 끌어올리며 수호필을 치켜들었다.
병사들이 다시 한번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찰나,
“하앗!”
진양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수호필을 열십자로 그었다.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꾸르르릉. 꾸르릉.
지하통로가 잔잔하게 떨리더니 갑자기 진양과 병사들 사이의 벽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닥과 천장에도 금이 생기더니 이내 ‘우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지진처럼 진동이 일어났다.
“우아아앗! 물러서라!”
병사들이 뒤로 우르르 물러나자, 마침 신호라도 된 듯 천장과 양쪽 벽에서 모래와 자갈 따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꽈당탕!
천장이 무너지고 벽이 무너지자, 좁은 지하통로는 금방 꽉 막히고 말았다.
진양과 병사들이 있는 곳이 정확히 양분된 것이다.
진양은 다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진양은 그 후로도 나타나는 갈림길마다 같은 방법으로 지하 통로를 무너뜨렸다.
진양이 통로를 따라 나온 곳은 남서쪽에 위치한 야산의 어느 언덕 위였다.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던 진양은 마침 나무에 새겨진 칼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가신풍이 새긴 것이리라.
진양은 칼자국이 난 방향을 따라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표시된 길을 따라가다 보니 머지않아 어느 절벽 위에 서 있는 황제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오, 양 장문! 무사하셨구려.”
주윤문은 진양을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진양의 손을 꼭 잡았다.
진양은 주윤문의 손을 맞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주윤문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헝클어지고, 얼굴과 몸은 불에 그을리고 흙먼지가 묻어 몹시 지저분했다. 누가 지금의 주윤문을 보고 황제라 알아보겠는가?
진양은 착잡한 마음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주윤문은 몸을 돌려 절벽으로 다가가 남경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황궁은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아오르고 있었고, 궁내에는 병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남경의 거리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황궁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통곡을 하며 울었고, 어떤 이는 병사들에게 강제로 끌려가기도 했다.
비록 밤이지만 황궁은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저잣거리는 환하게 켜놓은 등 때문에 그 모습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진양은 남경 시내를 보다 보니 마음이 더욱 쓰렸다.
따지고 보자면 이보다 더 통쾌한 복수도 없지 않을까?
원수의 손자가 원수의 아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쫓기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원수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인데, 진양은 통쾌하기보다는 씁쓸함만 더할 뿐이었다.
남경 시내를 하릴없이 내려다보던 주윤문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렇게 보니…… 사람들이 참 개미처럼 작아 보이는구려.”
모두의 시선이 주윤문에게로 향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허탈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찌 들으면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가볍고 미련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또 어떤 면에서는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주윤문이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기 보시오. 저렇게 작은 인간이 모여 개미처럼 군단을 이루고 있소. 마치 내가 엄지로 꾹꾹 누르면 개미처럼 죽어 버릴 것 같지 않소? 저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어찌 욕망만큼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일까? 여기서 이렇게 보니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작아 보이는데, 그들 개개인에게는 너무나 큰 인생들이겠지요?”
주윤문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저 별이 본다면 우리 인간은 더욱 작디작게 느껴질 것이오. 참 우습지 않소? 저 아래에 있는 개미처럼 작은 인간이 아주 작은 일 하나에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다가 서로 원망하고 죽이기까지 하니…… 여기서 봐도 참 하찮게 느껴지는데…… 하늘이 보면 얼마나 더 하찮겠소? 나는 그동안 참 작은 것들에 집착하며 살아온 것 같소.”
모두들 주윤문의 이야기에 느껴지는 바가 있어 선뜻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침묵했다.
잠시 후 진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이곳에서 오래 계실 수는 없습니다. 곧 그들이 이곳도 찾아낼 것이니, 우선 몸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소.”
주윤문은 아무래도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자꾸만 남경 시내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