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37
신필천하(神筆天下) 137화
진양 일행은 숲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연왕의 성격으로 볼 때 주윤문의 시신을 확실히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추적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일행이 한참을 가다 보니 허름한 절간이 나타났다.
마침 절간 마당에는 빨랫줄에 승려복이 널려 있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냈다.
주윤문은 그 절간 앞을 지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차피 지금 입은 옷차림으로 오래 버틸 수는 없소. 승려복을 입는 것이 어떻겠소?”
“좋은 생각이십니다.”
진양의 대답에 주윤문이 말을 덧붙였다.
“이참에 아예 승려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차피 속세를 떠나야 할 입장이 되었으니. 오늘 중으로 머리도 깎아야겠소.”
그 말에 번웅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으로 하신 말씀인지요?”
“허허, 그럼 내가 이 상황에서 농이라도 하겠소?”
“하지만 폐하…… 그렇게까지…….”
“어차피 난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 없소. 번웅도 나를 앞으로 그리 부르지 마시오. 호칭에 주의해야 할 것이오.”
“죄송합니다.”
“머리를 깎을 테니 앞으로는 그저 스님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려.”
번웅은 착잡한 표정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주윤문은 절간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빨랫줄에 널린 승복을 눈대중으로 가늠해 보았다. 조금 작을 것 같긴 하지만 충분히 입을 수 있을 법했다.
진양이 승복을 거둬들이는데, 마침 사찰 안에서 문이 삐걱 열리더니 노승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뉘시오?”
노승이 등을 들고 다가오다가 불에 그을린 일행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진양 일행은 저마다 긴장한 채 노승의 반응을 살폈다.
한데 노승은 승복을 쥔 주윤문을 가만히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전쟁 통에 피난을 가는 모양이구려. 옷이 없었소? 가져가시오.”
노승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주윤문이 승복을 꼭 거머쥐며 말했다.
“고맙소.”
노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돌아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참. 황제 폐하께서는 어찌 됐소? 연왕이 결국 황궁을 점령했소?”
그의 질문에 주윤문은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서러움이 올라왔다.
그때 진양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연왕이 황궁을 점령했고, 황제께서는 불에 타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아…… 그런, 그런 무서운 일이……!”
노승은 착잡한 표정으로 한탄을 하더니 다시 진양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주윤문을 다시 보았다.
이번만큼은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어두운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가만 보니 주윤문의 옷차림과 행동이 여느 사람과 사뭇 다르지 않은가?
노승은 다시 등불을 들고 진양 일행을 찬찬히 훑다가 떨리는 눈동자로 주윤문을 바라보았다.
“혹, 혹시…….”
주윤문이 씁쓸한 표정으로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노승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절했다.
“폐, 폐하!”
순간 번웅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찰나지간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노승의 목을 향해 내려쳤다.
쒜에엑!
그 순간 은빛의 바람 줄기가 날아들더니 ‘깡!’ 소리를 내며 번웅의 검을 쳐냈다.
바로 진양의 수호필이었다.
진양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폐하를 알아보았소. 죽여야 할 것이오.”
번웅은 싸늘하게 말하고는 다시 검을 휘둘러 갔다.
“멈추시오!”
진양이 다시 소리치며 수호필을 휘둘러 번웅의 검을 막았다.
이번에도 검날은 노승의 뒷목에 한 뼘 차이를 두고 튕겨 나갔다.
번웅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오?”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소!”
“만약 이자가 살게 되면 황제 폐하가 위태로울 수 있소!”
갑자기 벌어진 일에 노승은 혼백이 쑥 빠져나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진양과 번웅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진양이 다시 소리쳤다.
“그렇다고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인단 말이오?”
“그럼 어쩔 생각이오? 비키시오!”
번웅이 검을 다시 휘둘렀고, 진양은 다시 수호필로 막았다.
진양이 다급히 외쳤다.
“번 장군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시오?”
“무슨 말이오?”
“만약 여기 주지 스님이 하루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면? 그것을 연왕이 모르고 넘어갈 것 같소? 오히려 이건 흔적을 남기는 것이나 다름없소! 그렇게 되면 이 노승을 살려주는 것이나 죽이는 것이나 다를 게 없잖소?”
그때 주윤문이 버럭 소리쳤다.
“모두 그만들 두지 못하겠소?”
그의 서슬 퍼런 외침에 번웅과 진양이 동시에 무기를 거두고 물러났다.
번웅은 시선을 돌리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
“폐,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주윤문이 어느새 날카로운 돌부리를 쥐고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윤문이 번웅을 쏘아보며 말했다.
“번웅, 나는 앞으로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네. 만약 그 노승을 죽인다면, 나 역시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 것이네.”
“폐하!”
“내 말을 이해 못하겠는가!”
“……!”
“검을 거두게.”
“……알겠습니다.”
번웅이 검을 거두자, 진양도 수호필을 거두어들이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주윤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노승을 향해 걸어갔다.
“실례가 많았소.”
“폐, 폐하…….”
“이제 나는 황제가 아니니 그리 부르지 않아도 되오.”
“어찌…… 제가 어찌…….”
“혹 연왕의 군대가 이곳으로 와서 내 행적을 물어보거든…….”
“결코 보지 못했사옵니다! 이 노승은 오늘 밤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들이 위협을 가한다면…….”
“결코 보지 않았다 말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를 보았다고 하시오. 사실대로 말해도 좋소.”
노승은 물론 진양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주윤문을 바라보았다.
번웅이 성큼 나서서 물었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내가 도리를 지켜 숙부에게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그렇게 죽겠노라. 삶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은 이미 던져 버렸다.”
딱딱하게 말을 뱉는 주윤문은 불과 어제까지 보았던 유약한 심성의 그가 아니었다.
노승은 그런 주윤문을 보자 마음 깊이 감동을 받았다.
그가 다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말했다.
“노승은 결코 폐하를 보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모쪼록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이 승복은 내가 좀 빌리겠소.”
“그리하시옵소서.”
주윤문은 승복을 안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그가 네댓 걸음 걸어가다가 돌아보며 물었다.
“뭣들 하시오? 갑시다.”
그제야 진양 일행도 주윤문을 따라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번웅은 걸음을 떼기 전 노승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일렀다.
“만약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내가 땅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그대를 죽여 버릴 것이오. 반드시 그 말을 지키시기 바라오.”
노승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번웅은 한참 동안 노승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길을 돌렸다.
진양 일행은 산길을 따라 걷다가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있는 절벽 위에서 멈췄다. 마침 그 절벽 곁에는 제법 크고 넓은 동굴이 있었는데, 그곳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어 일행 모두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주윤문은 동굴 안에서 승려복을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와 말했다.
“양 장문, 내 머리를 좀 깎아주시겠소?”
진양은 주윤문을 보며 착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녕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주윤문이 툴툴 웃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는데, 이깟 머리카락을 깎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소?”
진양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양은 단도를 이용해 주윤문의 머리를 깎아주기 시작했다.
끝없이 깊은 낭떠러지 위에서 주윤문의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려 흩어져 갔다.
진양은 점점 짧아지는 주윤문의 머리카락을 보며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 주위를 둘러서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가슴이 아파 저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주윤문 역시 긴 머리카락이 잘려 나갈 때마다 그만큼의 마음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잠시 후 주윤문의 머리에는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남지 않았다. 거기에 승복까지 차려입고 있으니 누가 봐도 젊은 승려의 모습이었다.
주윤문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머리카락이 없으니 여름밤도 쌀쌀하게 느껴지는구려.”
그 말 한마디에 진양은 지금껏 꾹 눌러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폐하!”
진양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폐하!”
번웅과 사상이괴, 그리고 가신풍이 모두 무릎 꿇고 절을 올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주윤문 역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환한 미소로 채워져 있었다.
“이제 나는 그대들의 황제가 아니다. 앞으로 나를 그리 부르지 말라. 이건 내 마지막 명령이니라.”
그 목소리에 일행은 더욱 흐느껴 울었다.
산을 내려온 주윤문은 걸음을 멈추고 진양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제 나는 번웅과 함께 길을 떠나겠소. 양 장문, 참으로 고마웠소. 오랜만에 만나 이런 꼴을 보인 데다가 또 헤어져야 하니 아쉽기만 하구려.”
진양 역시 아쉬운 마음은 태산 같았지만, 차마 붙들 수가 없었다.
만약 황제가 자신과 계속 함께 있게 되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대별산으로 모실 수도 없었다.
연왕이 가장 먼저 의심하며 찾아볼 곳이 바로 대별산이기 때문이다.
“번웅을 통해 종종 소식을 전하도록 하리다.”
진양은 눈물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허허, 또 그런 말을.”
진양과 사상이괴, 그리고 가신풍은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진양은 번웅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폐하를 잘 보필해 주시오.”
“염려 마십시오. 여러모로 감사했소.”
“마땅한 도리를 했을 뿐이오. 혹시 신필문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연락 주시오.”
“물론이오.”
두 사람은 서로 포권을 취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는 헤어져야만 했다.
번웅과 주윤문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진양 일행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길로 배웅했다.
5. 의문의 죽음
남경에 입성한 연왕 주체는 제일 먼저 사라진 황제를 찾는 데 주력했다. 이미 태감들이 건문제와 후비들은 모두 분신자살을 했다고 증언했지만,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까맣게 타 버린 시체만 가지고는 황제가 죽었다는 것을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그는 천의교 등 사람들을 다수 파견해서 혹시 주윤문이 도주하지는 않았는지 확실히 알아보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즈음 황제의 측근 장군이 진양에게도 찾아왔다. 그는 병사들 몇몇의 진술을 토대로 연왕이 입성하던 날, 진양이 황궁에 잠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이를 추궁하려 함이었다.
이때쯤 진양은 무림맹을 설립하고, 맹의 총단인 구화산(九華山)에 거처하고 있었다.
한데 장군이 마당으로 들어서자마 구슬피 우는 곡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들어가 보니 하얀 상복을 차려입은 진양이 대청 앞에서 목 놓아 울고 있는 것이었다. 장군이 어찌 그리 구슬피 우느냐 물으니, 진양은 황제의 죽음을 막지 못했으니 한때 은혜를 입은 자로서 자괴감에 빠져 그러노라 대답했다.
상황이 이리되니 장군은 진양에게 더 따져 묻기도 애매해졌다.
하지만 끝내 그날의 일을 물어보니 진양은 황궁에 잠입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이미 자신이 도착했을 때는 황제가 분신자살을 한 후였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