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4
신필천하(神筆天下) 14화
하지만 곽연은 다음 순간 자신의 손바닥이 몹시 화끈거리고 퉁퉁 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전신을 찌르르 울려대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손바닥을 후려치는 순간, 진양의 체내에 녹아 있던 자양진기가 무의식적으로 호신강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 바람에 진양에게 쏟아부어지던 공력은 오히려 곽연에게 고스란히 반탄되어 돌아간 셈이었다.
물론 진양은 자신의 몸에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따귀를 한 대 얻어맞았는데, 신기하게도 전혀 아프지 않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따귀를 맞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몹시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화가 난 진양은 이제 물불 가릴 것이 없었다. 그저 양손으로 곽연의 팔을 움켜쥐고 벼랑 끝으로 뛰어내릴 생각밖에 없었다.
진양의 힘에 놀란 곽연은 다시 한쪽 팔을 번쩍 들어서 정수리를 내려쳤다. 무공을 모르는 진양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손을 보면서도 그저 목을 움츠릴 뿐 다른 방어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곽연의 손바닥이 진양의 정수리에 닿는 순간, 또다시 진양의 전신에 흩어져 있던 자양진기가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곽연은 손바닥에 실었던 공력을 또 한 번 고스란히 되받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인 충격으로 기혈이 뒤틀린 곽연이 주춤 다리를 구부렸다.
진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곽연의 팔을 꽉 붙든 채 괴성을 지르며 벼랑 밖으로 몸을 던졌다.
“으아아아!”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앗!”
진양을 둘러싸고 있던 천보각의 수하들이 깜짝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그들로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얼른 벼랑 끝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절벽 아래로 떨어진 두 사람은 검은 물살에 묻혀 모습을 감춘 후였다.
그들은 그저 곽연이 자만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곽연이 양진양의 정수리를 내려칠 때 공력을 싣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잠시 방심한 사이에 진양이 곽연의 팔을 끌어당겨 뛰어내린 것이리라.
그들은 한참이나 시커먼 물살을 굽어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6. 뜻밖의 인연
짹짹, 짹짹짹.
진양은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가려진 잎 사이로 아침 해의 금빛 비늘이 눈부시게 떨어져 내렸다.
‘나…… 죽은 건가?’
진양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절벽 위에서 온 힘을 다해 곽연의 팔을 끌어당기며 계곡으로 뛰어내린 것까지 기억이 났다. 심장마저 얼려 버릴 듯 차가운 물속에 잠기고 나서부터는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양은 이렇게 죽은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침 햇살이 빛나고 산새가 쉼없이 지저귀니 분명히 극락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여기서 부모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뒤미처 치밀어 오르는 구토 증세에 진양은 벌떡 일어나서 엎드렸다.
“우웨엑! 쿨럭쿨럭!”
구역질을 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진양은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급류에 휩쓸렸는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진양은 자신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몸을 보호하는 호체신공이 자연스럽게 발출됐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구역질을 한 진양은 털썩 드러누워 나뭇잎 사이로 드러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극락세계에서 부모님을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돌연 현실에 부딪치니 서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문득 자신을 살게 놔둔 천지신명마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다시 죽을 용기는 없었다. 또 죽는다고 한들 정말로 극락세계에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양진양은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 떨어진 곳에 물이 흐르고 있었고, 주위는 온통 초목이 우거져 있었다. 아마 계곡 물에 떠밀려 오다가 하류에 다다르자 이곳까지 걸어서 나온 모양이다.
결국 스스로 삶에 집착한 것이니 천지신명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책!”
진양은 순간 천보각 지하 보관실에서 챙겼던 ‘칠절매화검’이 생각나서 얼른 품 안을 뒤져 보았다. 다행히 품에는 두 권의 책이 단단히 여며져 있었다.
하지만 계곡물에 떠내려 왔으니 책 상태가 온전할지 알 수 없었다. 얼른 책을 펼쳐 보니 놀랍게도 자양진경은 글씨가 전혀 번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종이의 상태도 물에 빠지기 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한낱 삼류잡배가 쓴 무공서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처럼 신물(神物)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진양은 얼른 칠절매화검도 펼쳐 보았다.
하지만 칠절매화검은 종이도 많이 눅눅했고 글씨도 꽤 번져 있었다. 그래도 진양은 글씨에 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눈썰미가 뛰어난 아이였다.
눈에 힘을 주고 한 글자씩 가만히 들여다보니 영 못 알아볼 것 같지는 않았다.
‘빨리 지필묵을 사서 필사한다면 어느 정도 복원은 할 수 있겠다.’
생각을 정리한 진양은 두 권의 책을 다시 품에 여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물가로 걸어가서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낯선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물줄기를 따라서 내려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갔을까.
진양은 먼발치 물가에서 시커먼 수초 같은 것이 하늘거리는 것을 보았다. 좀 더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수초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였다.
깜짝 놀란 진양이 얼른 달려가서 사람을 끌어내려다가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움직이지 못했다. 물에 머리를 처박고 널브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곽연이었다.
그는 진양보다 더욱 오랫동안 떠내려 와서 물가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진양은 우선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살펴보았다. 사지가 축 늘어진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일단 진양은 곽연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고 뭍으로 끌어냈다.
곽연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물을 한가득 마셨는지 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불룩했다. 진양이 그의 목 언저리에 손을 댔다가 가슴에 귀를 대보았다.
‘살아 있구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진양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벼랑 위에서 실랑이를 벌일 때만 해도 어떻게든 죽이고 싶은 자였는데, 물에 빠져 축 늘어진 꼴을 보자니 한편으론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만약 곽연을 죽이려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도 없었다.
진양은 천천히 다가가 곽연의 목에 양손을 얹었다. 지금 목을 조른다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양은 결국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섰다.
“당신은 날 죽이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애써 살려주지도 않을 겁니다. 하늘이 기회를 주신다면 당신도 살 수 있겠지요.”
말을 마친 진양은 곽연의 품을 뒤져 보았다.
은자 석 냥이 나왔다.
진양은 은자를 챙기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곡을 따라 내려간 양진양은 평여현(平輿縣)에 다다랐다.
진양은 먼저 칠절매화검을 필사하기 위해 저잣거리로 갔다.
그런데 가게에 들러 문방사우를 샀더니 은자 석 냥을 모두 써 버리고 남은 돈이 없었다. 사실 은자 석 냥은 꽤나 큰돈이었지만, 세상물정에 어두운 진양은 가게 주인이 돈을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산 것이다.
빈털터리가 된 진양은 번화가 밖에 있는 관제묘(關帝廟)로 가서 칠절매화검을 필사했다. 군데군데 글씨가 번져서 알아보기 힘든 것도 꽤 많았지만, 상당 부분 복원시킬 수가 있었다.
필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그제야 진양은 자신이 문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에 비춰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사본을 품에 챙겨 넣고 일어나니 몹시 허기가 졌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데다 장시간 집중해서 글을 썼더니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은 듯했다.
진양은 문방사우를 챙겨 들고는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갔다. 당장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남은 도구들이라도 팔아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저잣거리는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어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아 버렸고, 객점이나 주루만이 등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있었다.
마침 객점 앞을 지나가던 진양은 식욕을 자극하는 고기 냄새에 침을 꼴깍 삼켰다. 배에서는 연신 꼬로록 소리가 울렸다.
결국 진양은 다짜고짜 객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소이는 추루한 옷차림의 진양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지못한 듯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진양은 몹시 굶주려 있던 상황이라 우선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시켰다. 점소이는 이상하게 바라보면서도 별말없이 주문한 음식들을 내왔다. 게눈 감추듯이 음식을 먹어치운 진양은 배가 부르기 시작하자 슬슬 뒷감당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배는 채웠지만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리저리 궁리하던 진양은 문방사우를 자리에 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닥!
“앗! 저놈이!”
그렇잖아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점소이는 진양이 문을 박차고 달아나자 ‘저놈 잡아라!’ 하고 소리치며 뒤따라 뛰었다.
진양은 야조(夜鳥)라도 된 것처럼 나는 듯이 달려갔다. 점소이가 고래고래 욕을 내지르며 따라왔지만, 그 소리마저 조금씩 멀어지더니 이내 귓가에 들리지도 않게 됐다.
진양은 다행히 점소이가 몹시 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진양의 착각이었다.
자양진경을 익히고 나서 진양은 내공이 매우 심후해졌다. 때문에 지금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진양이 제대로 된 경신법이라도 익혔더라면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었으리라.
진양은 생에 처음으로 밥 도둑질을 한지라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쿵쾅거렸다. 결국 제풀에 발이 엉키더니 이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다행히 점소이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휴우! 큰일 날 뻔했다.”
양진양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성난 고함 소리가 불쑥 들렸다.
“이놈! 감히 공짜로 음식을 먹고 도망을 가? 네놈이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진양이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체구가 건장한 대머리사내가 허리에 손을 얹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 곁에는 비쩍 마른 사내가 있었는데, 유난히 턱이 뾰족하고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서 몹시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두 사내를 본 진양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객점에서 여기까지 쫓아왔나 보구나! 이제 꼼짝없이 잡혔으니 어쩌면 좋담?’
진양이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자, 두 사내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