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41
신필천하(神筆天下) 141화
며칠 후 진양은 전학수의 연통을 받고 남경으로 갔다.
그는 남경 시내의 한 허름한 다루 이층으로 가서 차를 주문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흑립을 푹 눌러쓴 사내가 진양에게 다가왔다.
“양 맹주요?”
다짜고짜 불쑥 묻는 질문에 진양이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따라오시오.”
흑립의 사내는 몸을 돌리더니 무작정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양은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한참 이리저리 길을 헤집으며 걸어가던 흑립 사내는 남경 외각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들어섰다. 진양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갈 뿐이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흑립 사내는 어느 대청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 보시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고맙소.”
진양은 포권을 취해 보인 다음 대청으로 들어섰다.
대청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창가의 탁자에 한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체격이 우람하고 눈썹이 부리부리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진양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대청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바로 주체가 신임하는 환관인 정화였다.
진양은 평소 자신이 생각해 오던 환관과 너무나 상반된 모습에 잠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화 역시 진양의 표정을 읽었는지 껄껄 웃었다.
“놀라셨소? 계집 목소리를 내며 몸을 사리는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구려.”
이에 정신을 차린 진양이 얼른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이리 앉으십시오. 그렇잖아도 양 맹주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이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갑소.”
진양은 아무리 보아도 이 사람이 정말 환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행동이나 말투가 거세당한 환관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호방하고 대장부다웠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키가 크고 체격도 우람한 편이어서 환관이라기보다는 장군의 풍모가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편견에 치우쳐 살아왔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구나.’
진양은 자신의 안목과 생각을 나무라며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정화 역시 예를 갖춰 인사를 받은 후, 두 사람은 형식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시종이 차를 가져오면서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듣기로 양 맹주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황궁에서 천의교를 지원하고 있는 자금을 거두어주시길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정화는 진양이 이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생각 못했는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하나 그는 곧 부드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아니. 단지 부탁을 해서 들어줄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외다.”
진양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말을 이었다.
“천의교는 현재 황궁의 세력을 믿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설쳐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더욱 황궁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지요. 지금 황궁의 입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백성의 신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습니까?”
“옳은 지적이오. 참으로 맞는 말이오. 하지만 황궁이 천의교를 지원하는 것은 일종의 사업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소. 황궁이 천의교를 등지고 무림맹의 부탁을 듣게 된다면, 무림맹은 황궁에 어떤 것을 제공할 수 있겠소? 요는 바로 그 부분이오.”
진양 역시 이런 식의 답변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차분히 되물었다.
“어떤 것을 바라시는지요?”
“글쎄. 그럼 이것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맹주의 말대로 천의교는 사실 황궁에서도 부담스러울 만큼 그 만행이 심하오. 그럼에도 황궁은 여전히 그들을 지원하고 있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궁금하군요.”
“결국 천의교가 무림맹을 꺾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오. 이 전쟁에서 천의교가 승리할 것이라고 여긴단 말이오.”
진양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정화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처럼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화가 싸늘하게 웃었다.
“양 맹주, 그것까지 말해줄 수는 없소. 다만 황궁의 판단은 그렇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거요.”
“그렇다면 만약 무림맹이 천의교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면 자금 지원을 중단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도 한 가지 조건은 있겠지.”
“어떤 것입니까?”
“후에 황궁이 필요할 때 한 번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오. 이만하면 꽤나 공정한 거래가 아니겠소?”
“그렇군요.”
“양 맹주, 하나만 명심하시오.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무림맹을 천의교와 비슷한 위치를 만들어놓고 오시오. 지금 무림맹은 내가 볼 때 바람 앞의 등불이오.”
진양은 가만히 정화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명심하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양이 일어나서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렸다.
그때 정화의 목소리가 진양의 등을 두드렸다.
“혹시 크고 단단한 바위를 부수는 방법을 아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진양이 돌아보자 정화는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우선 바위에 작은 구멍을 내서 틈을 만드는 것이오. 그리고 그 틈에 물을 부어넣고 얼리는 것이지. 그럼 바위의 빈틈으로 스며든 물은 얼음이 되면서 부피가 팽창하게 되고, 단단한 바위는 끝내 부서지고 마는 것이오.”
진양은 잠시 서 있다가 걸음을 뗐다.
정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살펴가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
무림맹 총단으로 돌아온 진양은 머릿속이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진양은 대청에 서성이며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황궁도 현재의 천의교가 껄끄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림맹이 이번 싸움에서 패한다고 판단했다. 왜일까?’
진양은 문득 정화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바위를 부수는 방법이라…… 혹 무림맹에 물이 스며들 만한 빈틈이 있단 말인가? 그 빈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문득 진양은 얼마 전 남창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사당에서 만나기로 했던 맹지덕이 죽지 않았던가?
진양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해서 그는 가신풍을 불러 은밀히 맹지덕에 관한 일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얼마 후 가신풍은 맹지덕을 따르던 개방의 제자들이 항산(恒山)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진양은 그들을 만나면 맹지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총단을 나섰다.
쉬지 않고 항산까지 달려간 진양은 산언저리의 허름한 객점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한데 그날 자정이 지날 때쯤이었다.
진양은 객점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무리들의 발걸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진양이 창가로 다가가서 보니 복면을 뒤집어쓴 한 무리의 무인들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진양은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얼른 창틀을 밟고 몸을 날렸다.
한참 그들의 뒤를 밟으며 따라가는데, 그중 기척을 느낀 한 사람이 뒤를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우리 뒤를 따라오는 자는 누군가?”
진양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포권했다.
“양진양이라고 하오. 그대들은 뉘신지?”
진양을 확인한 무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저마다 품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그들 손에 들린 것은 콩알만 한 환이었는데, 그것을 바닥을 던지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돌발적인 행동에 진양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양은 그들 중 한 명을 아무나 골라잡고 뒤쫓았다.
연기가 걷히고 나자 어둠 속으로 빠르게 내달리는 무인이 보였다.
진양이 공력을 끌어올리고 바짝 추격하자, 점차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결국 도망치던 무인이 검을 뽑아 들며 진양에게 곧바로 달려들었다.
“죽어라!”
진양이 얼른 몸을 뒤틀어 피하며 수호필로 상대의 혈을 점해갔다.
상대 역시 얼른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진양에게 무공이 밀리고 있었다.
그는 싸우던 도중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자, 검을 진양에게 내던졌다.
까앙!
진양이 날아드는 검날을 쳐내자, 무인은 품에서 둥근 환을 꺼내 입에 물었다.
다음 순간 무인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더니 ‘퍽!’ 소리와 함께 전신이 산산 조각나며 터져 나갔다.
결국 진양은 아무도 사로잡지 못한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항산으로 들어가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겠다.’
진양은 이번 일이 항산의 거지들과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 항산의 골짜기로 들어갔다.
가신풍이 말해준 곳을 겨우 찾아갔는데, 골짜기 입구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개방 분들은 여기 계시오?”
진양이 소리쳐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진양이 안으로 깊이 들어가자, 골짜기 곳곳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아직 피가 완전히 굳지 않은 시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늦어 버리고 말았구나.’
결국 진양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무림맹 총단으로 돌아온 진양은 후원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만 늘어나고 있었다.
‘복면인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들은 내가 개방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시기가 절묘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그곳에 가리라는 것을 어찌 알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진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림맹에 간자가 있을 리가…….’
하지만 자꾸만 그쪽으로 기우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인기척이 들려 몸을 돌리니, 마침 추방산이 걸어왔다.
그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맹주께 드릴 말씀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추방산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지요.”
진양은 추방산을 데리고 대청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추방산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진양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부에 간자가 있는 것 같소.”
진양이 눈을 크게 뜨고는 추방산을 바라보았다.
그렇잖아도 오늘 하루 동안 그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추방산마저 그 이야기를 꺼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양이 다그쳐 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요?”
“우리 개방은 지금 무림맹의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맹주께서도 잘 아실 거요.”
“물론입니다.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한데 우리 개방이 주축이 된 무림맹의 움직임이 낱낱이 흘러가는 듯하오. 천의교는 이쪽에서 치는 순간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막아내고 있소.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무림맹은 더 많은 피해를 입고 있소. 개방은 무림맹의 기습조가 작전을 행하기 전에 최대한 철저히 조사하오. 한데도 실전이 벌어지면 천의교가 완전히 태세를 바꾸고 대응하니, 이는 틀림없이 내부에 간자가 있다는 뜻이지 않겠소?”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