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43
신필천하(神筆天下) 143화
“천의교의 잠재적인 위험이 어느 정도 끝났다 싶을 때까진 그래야 할 듯합니다.”
“한데…… 그럼 정파에서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듣고만 있던 봉상탁이 불쑥 나섰다.
“당연히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소. 나 역시 맹주의 능력을 높이 사는 바이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맹주의 자리에 계신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오. 무림맹주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임시 직책이었으니, 이 전쟁이 끝나면 무림맹주를 다시 선출해야 할 것이오.”
그러자 구계악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결국 정파에서 무림맹주의 자리를 차지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말이구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소? 단지 순리가 그렇다는 것이오!”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자, 추방산이 껄껄 웃으며 말렸다.
“두 사람 모두 진정하시오. 나야 맹주님이 계속 그 자리를 지켜도 좋다고 생각하오만.”
하지만 이번에는 진양이 손사래를 쳤다.
“사실 저도 이 전쟁이 끝나면 물러날 생각이었습니다. 신필문 하나만 다스리는 것도 저에겐 힘든 일이군요.”
“허허, 그건 지금 논의할 문제는 아닌 듯싶소. 우선은 눈앞의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가신풍이 달려와 진양에게 귓속말을 알렸다.
“맹주님, 신필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신필문에서?’
진양이 눈빛으로 되묻자, 가신풍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건문제께서 쫓기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런……!”
진양이 저도 모르게 불쑥 소리쳤다.
그러자 주위의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진양을 바라보았다.
추방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소?”
“아, 아닙니다.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진양은 양해를 구하고는 가신풍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주윤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를수록 좋았다. 때문에 진양은 대충 얼버무리고 넘긴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다다른 진양이 얼른 가신풍을 붙들고 물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황궁에서 그분이 있는 곳을 알고 추격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 쫓기고 계시는 중인데 머잖아 꼬리를 밟힐 것 같다고 합니다.”
“해서 조치는?”
“우선 사상이괴가 건문제가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만…….”
진양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상이괴라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세심히 신경 써야 할 부분에서는 서투른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추방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추방산은 진양을 보자마자 물었다.
“문에 좋지 않은 사정이라도 있소?”
“그것이…….”
“혹시 일이 생겼거든 여기는 걱정 마시고 가보시오. 이곳은 나와 봉 장로, 그리고 구 장로가 있으니 별문제 없을 거요.”
진양은 추방산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구계악도 추방산을 거들고 나섰다.
“부맹주님의 말씀대로 하십시오. 이곳은 저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승전 소식을 들을 준비만 해두십시오. 허허.”
결국 진양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추방산의 말에 진양이 마음을 굳히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염치불고하고 이곳을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허허, 걱정 마시오.”
추방산의 친근한 미소를 보며 진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신풍을 돌아보았다.
“여기 계신 분들의 말씀을 잘 따라서 좋은 소식 들려주길 바라오.”
“걱정 마십시오, 맹주님.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불초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별말씀을! 급한 일인 것 같으니 얼른 가보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진양은 그날 밤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 주윤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호광(湖廣) 지역의 형산(衡山).
만물이 소생하는 초봄의 형산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형산의 숲길을 가로지르는 진양은 주변 경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이럇!”
진양이 흡혈마의 배를 걷어차자 말은 더욱 빠르게 질주했다.
오랜 기간 무인들의 전쟁으로 흡혈마 역시 무인의 피를 배부르게 먹었기에 지칠 줄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진양은 멀찍이 내려다보이는 관제묘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마음먹었다.
“워어! 워!”
진양은 흡혈마를 급히 멈춰 세우고는 말에서 내렸다.
직례 일대에서부터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달려왔더니 몸이 몹시 무거웠다.
관제묘 문 앞으로 걸어간 진양은 문짝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느 순간 진양의 눈이 반짝 빛났다.
‘표식이 있군.’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표식이 문에 새겨져 있었다.
이는 사상이괴와 진양을 연결해 주는 표식이었다.
진양은 호광 지역으로 들어선 이후부터는 줄곧 이 표식을 따라 건문제가 있는 곳을 추격해 온 것이다. 표식에는 앞으로 가야 할 방향과 다음 표식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암호로 새겨져 있었다.
‘흠. 어차피 폐하께서 계신 곳을 찾아다니려면 낮보단 밤이 편할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
생각을 정리한 진양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콰장!
문짝을 가르며 날카로운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헛!”
진양이 얼른 몸을 뒤로 젖히며 검날을 피했다.
다음 순간, 관제묘 안에서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뒈져 버려라!”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날을 보며 진양은 얼른 몸을 옆으로 굴렸다. 뒤미처 그는 허리춤에서 수호필을 꺼내 들고 상대의 목을 향해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필봉이 목에 닿기 직전, 진양은 가까스로 공력을 거둬들이고 훌쩍 물러났다.
“사상이협이 아니십니까?”
진양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응?”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돌린 사람은 바로 사상이괴의 서요평이었다.
그는 하마터면 잘려 나갈 뻔했던 뒷목을 매만지며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빨리 왔구나.”
“하마터면 표식을 보고 먼저 갈 뻔했습니다.”
“표식을 새겨놓고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기에 관제묘 안에 숨어 있었다.”
“그랬군요!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관제묘 안에 계신다.”
말을 마친 서요평이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진양이 관제묘 안으로 들어가자, 숨을 죽이고 있던 서운지와 번웅, 그리고 주윤문이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진양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맞이했다.
“오오! 양 장문이 아니오?”
“폐하, 그간 안녕하셨사옵니까?”
진양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하자, 얼른 주윤문이 일으켰다. 그가 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쿨럭, 쿨럭. 이러지 마시오. 어찌 하늘 아래 두 황제가 있을 수 있겠소? 편히 대하시오. 제발 부탁이오.”
“죄송합니다.”
주윤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쿨럭. 이리 다시 보게 되니 반가움을 감출 길이 없소이다.”
진양은 수척해진 주윤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눈 밑이 검고 기침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니 병색이 있는 듯했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하하하! 오히려 마음 편히 중원을 유랑하며 즐겁게 지냈소. 최근 숙부가 내 존재를 눈치채고 군대를 보냈다고 하여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오.”
그때 번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자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걱정입니다. 이대로 노숙을 계속하긴 힘들 것 같소.”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노숙을 계속 이어가다가는 주윤문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될 듯했다.
그렇다고 호광 지역의 무림맹 분타로 데려갈 수도 없었다.
무림맹주가 총공격을 내팽개치고 웬 젊은 승려를 데리고 들어오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지 않겠는가?
“우선 객점에 가서 방을 잡아야겠습니다.”
“괜찮을까요?”
번웅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진양이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지요. 피로가 겹친 데다 무리한 여행으로 많이 지치신 것 같습니다. 우선은 휴식이 필요합니다.”
“알겠소. 양 장문의 뜻에 따르겠소.”
“가시지요.”
진양은 주윤문 일행을 이끌고 앞장섰다.
그는 말을 타고 가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당장 주윤문을 지키는 것도 그러했지만, 운태산의 싸움은 어찌 됐을지 걱정도 됐다.
진양이 운태산으로부터 쉬지 않고 달려왔기에 싸움의 결과를 들으려면 적어도 사나흘은 지나야 할 것이었다.
진양 일행은 마을로 내려가 비교적 한적한 객점으로 들어갔다.
만약을 대비해 진양은 주윤문과 일행이 아닌 것처럼 위장했다.
주윤문은 승려 복장답게 허름한 방을 잡았고, 진양은 가장 좋은 방을 구했다. 그런 뒤 진양은 주윤문을 자신의 방에서 묵도록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윤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이제는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열이 많이 오른 상태였다.
진양은 우선 주윤문을 침상에 눕히고 맥을 짚어보았다.
그는 과거에 천상련과 황궁에서 의학 서적을 자주 접했기에 어느 정도 관련 지식이 있었다.
진양은 번웅에게 약방문을 지어준 후, 그가 사온 약재를 이용해 약을 달여 주윤문에게 먹였다.
그렇게 바쁜 시간이 지난 뒤 주윤문은 차츰 안정을 찾더니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주윤문 곁에서 간호하던 진양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주윤문은 그런 진양을 보며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오, 양 장문.”
“아닙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도움은 되지 못하고, 늘 짐만 되는구려.”
“이미 저는 폐하께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그만큼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말래도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로군.”
주윤문이 툴툴거리며 하는 말에 진양은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주윤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진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그대의 글씨가 보고 싶어졌소. 내게 보여줄 수 있겠소?”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주윤문이 부드럽게 웃으며 진양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른 번웅이 얼른 밖으로 나가 지필묵을 챙겨 돌아왔다.
진양은 탁자에 종이를 펼쳐놓은 다음 서진으로 고정시키고는 물었다.
“어떤 글을 적을까요?”
“문득 시 하나가 떠오르는구려. 내가 그 시를 응용해서 조금 고쳐 불러볼 테니, 양 장문께서 한 번 받아 적어보시겠소?”
“알겠습니다.”
진양이 공손히 대답하자, 주윤문이 청아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구슬픈 듯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진양의 수려한 필체로 화해 하얀 종이에 내려앉았다.
明皇昔全盛(명황석전성)
賓客復多才(빈객부다재)
悠悠只一年(유유일천 년)
陳跡唯高臺(진적유고대)
寂寞向春草(적막향추초)
悲風千里來(비풍천리래)
명황이 옛날 왕성하였을 적에
손님도 많았고 인재도 많았다네.
아득하구나, 단 일 년의 세월이.
남은 자취란 오직 높은 누대뿐이로다.
쓸쓸하여라, 봄의 풀잎이여
슬픈 바람이 천리 먼 곳에서 불어오는구나.
진양은 시를 받아 적으면서 새삼 주윤문의 처지가 딱하게 여겨져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하얀 종이에 수 놓이듯 새겨진 글씨는 그런 그의 마음과 주윤문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어 번웅이 그 글씨를 보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하나 필체 속에 진득한 슬픔이 묻어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지극하여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도 느끼고 있었다.
진양은 눈물을 흘리며 주윤문에게 말했다.
“폐하, 모두 적었사옵니다.”
“그렇소? 한 번 봅시다.”
주윤문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탁자에 놓인 종이를 바라보았다. 검은 먹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그 모습에서 그는 다시 한번 감탄과 함께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꼈다.
주윤문이 슬픔인지 감동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며 연신 찬탄했다.
“참으로 아름답소. 참으로 훌륭하오. 내 지금껏 많은 인재들을 보았지만, 서예에 있어서만큼은 양 장문보다 뛰어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소. 방 학사도 그대의 서예 솜씨를 우러러볼 것이오.”
진양은 방 학사가 방효유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다.
진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그때였다.
“썩 비키지 못하겠소?”
문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