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44
신필천하(神筆天下) 144화
그제야 진양은 자신이 글을 쓰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웅 역시 진양의 글에 심취해 있느라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사상이괴의 서요평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무래도 사상이괴가 문 앞을 막은 채 시간을 끌고 있는 듯했다.
방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자는 틀림없이 황궁에서 보낸 장군일 것이다.
만약 무인이라면 서요평의 성격상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지만, 황궁의 장군인만큼 쉽사리 살수를 쓰지 못하는 것이리라.
“흥! 썩 비키지 않으면 황제의 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겠다! 물러나라!”
다음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장군복 차림의 사내가 불쑥 들어왔다.
이어서 사상이괴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뒤를 따라 들어왔다.
장군은 방 안에 누워 있는 주윤문과 진양, 그리고 번웅을 번갈아보더니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이오, 양 장문.”
진양은 잠시 그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 소리쳤다.
“정여립?”
“허허, 이제 알아보시는구려.”
그러더니 정여립은 시선을 돌려 주윤문을 향해 말했다.
“이런 누추한 곳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전하, 저희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이때쯤 연왕은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고친 상태였다. 또한 건문년을 없애고 홍무를 사용함으로써 주윤문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정여립은 주윤문을 가리켜 ‘폐하’라는 호칭 대신 ‘전하’라고 부른 것이다.
진양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어차피 방 밖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은 아직 아무도 보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수를 써도 늦지 않을 것이다.’
속셈을 마친 진양은 얼른 사상이괴를 향해 말했다.
“방문을 닫으십시오!”
“알겠네!”
사상이괴가 문을 얼른 닫아 버리고는 방 밖으로 나가서 버티고 섰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정여립이 진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짓이오? 역모라도 꾀할 생각인가?”
“닥쳐라. 너는 금룡표국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신하 된 자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역적을 도왔으니 죽어 마땅하다!”
“뭣이? 양진양, 그대가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모양인데…….”
쒜에엑!
순간 진양의 수호필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퍽!
“커억!”
말을 내뱉던 정여립은 그 자리에서 목이 꿰뚫려 즉사하고 말았다.
배신으로 얼룩졌던 인생이 이처럼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리고 진양의 손속이 이처럼 잔인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주윤문은 물론 번웅도 너무 놀라서 입을 척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진양은 재빨리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객점 뒤쪽으로는 아직까지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번 장군!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이곳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번웅은 잠깐 망설였지만, 곧 진양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 창틀을 밟고 몸을 날렸다.
“폐하,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십시오.”
진양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불을 끌어올려 주윤문의 몸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그런 뒤 진양은 얼른 웃통을 훌훌 벗어 던지고는 정여립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정여립은 수호필에 목이 꿰뚫린 채 벽에 걸려 있었다.
진양이 수호필을 뽑아내자 피분수가 터지면서 정여립이 바닥에 털썩 고꾸라졌다.
그때 다시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몹시 우렁찬 목소리였다.
아마도 또 다른 장군이 올라온 듯했다. 그는 분명 정여립보다 더 높은 직위의 장군이리라.
진양은 그 목소리만 듣고도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화 장군이 이번 군대를 지휘하는구나.’
당시 정화는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대군을 이끌고 해외 원정을 준비하는 등 장군직 임무까지 소화하고 있던 터였다.
진양은 혹시 사상이괴가 실수를 저지를까 봐 얼른 소리쳤다.
“손님을 들여보내셔도 좋습니다.”
진양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리더니 장군 한 명이 실내로 들어섰다.
진양의 예상대로 그는 정화였다.
정화는 제일 먼저 진양을 보았고, 그다음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호필을 보았다. 이어서 벽 앞에 쓰러진 정여립의 시체를 본 뒤, 마지막으로 침상을 바라보았다.
정화는 정여립의 시체를 보고도 별로 노하지 않은 듯 눈살만 슬쩍 찌푸리고는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양 맹주?”
“그가 무례를 저질러 죽였습니다.”
“그 행동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었다면 저 또한 그런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테지요.”
진양은 말을 하면서 침상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웃통을 벗은 자신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정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림맹의 맹주가 천의교를 총공격하기 전에 고작 계집질을 하기 위해 이 먼 길을 오셨단 말이오?”
“보시다시피.”
진양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태도가 예전에 보았던 예의 바른 진양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그만큼 자연스럽게도 보여서 정화는 팔뚝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진양이 말을 덧붙였다.
“장군님의 말씀대로 저는 무림맹의 맹주입니다. 한데 정여립은 그런 저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조차 없이 다짜고짜 방 안으로 쳐들어왔지요. 만약 그가 조금만 무림맹을 무겁게 생각해 주고 예를 갖추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겁니다.”
진양은 은연중에 자신의 지위를 강조했다.
그만큼 무림맹주의 위치는 황궁에서도 함부로 손대기에 껄끄러운 존재였다.
정화는 진양의 말을 들으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침상 앞에 다다르려고 하는데, 마침 그 곁의 탁자에 놓인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종이에는 시가 적혀 있었는데, 바로 고적이 지은 송중(宋中)이라는 시를 응용한 것이었다.
한데 그 필체가 몹시 수려하고 우아하며 애잔한 슬픔마저 묻어 있으니 정화는 가슴이 시큰거리고, 갑자기 기분도 울적해졌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도 잊은 채 한참이나 탁자에 놓인 시를 바라보았다.
마치 글자 하나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라 자신의 가슴을 먹먹하게 적시는 듯했다.
정화는 시간도 잊은 채 돌처럼 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양 장문께서 적은 것이오?”
“그렇습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역시 훌륭한 필체구려.”
“감사합니다.”
그러고도 정화는 여전히 움직일 줄을 몰랐다.
화자의 심상에 빠진 채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그는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발길은 침상으로 향하지 않고 문으로 향했다.
“실례했소이다.”
정화의 말에 진양은 내심 안도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정화는 문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양 장문, 나라면…… 좀 더 큰 이불을 사용했겠소. 비구니와 정을 나눈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말이오. 이 충고의 대가는 언젠가 반드시 요구하리다.”
정화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객점을 가득 채웠던 병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양은 그제야 탁자에 털썩 앉으며 침상을 바라보았다.
침상에는 덮인 이불 사이로 손바닥만큼 삐져나온 승려복이 내비치고 있었다.
다음 날 주윤문은 번웅과 함께 길을 떠났다.
주윤문을 추격해 온 군대는 황궁으로 발길을 돌렸기에 더 이상의 위험은 없었다.
진양은 두 사람을 배웅해 준 뒤 곧바로 대별산으로 향했다. 어차피 운태산의 싸움은 지금쯤 정리가 됐을 터였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무림맹이 천의교를 일망타진했을 것이라 믿었다.
때문에 진양은 이왕 호광 지역까지 온 것, 무림맹으로 돌아가기 전에 신필문을 들러볼 생각이었다.
진양과 사상이괴가 대별산을 이틀 거리 정도에 앞두고 객점에 들렀을 때였다.
마침 무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창가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운태산의 싸움이 화두인 듯했다.
“이제 천의교도 뿌리가 뽑혔으니, 무림맹은 곧 없어지겠지?”
텁석부리사내의 말에 대머리 사내가 반박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아직도 천의교의 잔당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네. 그리고 천의교 신도들을 모두 처리한 것도 아니고, 분타에 그대로 두고 흡수시킨 것이 아닌가? 만약 그들이 집단적으로 반발이라도 하면 큰일 나는 거지.”
“그래 봐야 제깟 놈들이 어쩌겠나? 이미 머리를 잃었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나? 내 생각에 무림맹은 천의교 신도들이 완전히 복속될 때까지는 지속돼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러자 뺨에 칼자국이 난 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내 생각도 같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천의교 신도들이 훗날을 도모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당분간은 무림맹이 지속되면서 그들을 다스려야 할 것일세.”
그러자 텁석부리사내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그도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만약 그렇게 되면 무림맹주가 바뀔 가능성이 클 게야.”
칼자국이 난 사내의 말에 텁석부리사내가 물었다.
“그건 또 왜 그런가?”
“자네도 들었잖은가? 이번 운태산에서의 총공격에서 양 맹주님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아, 그랬지. 하긴 이번 공격에 맹주님도 계셨더라면 무림맹의 피해가 덜했을 테지.”
“아무래도 이번에는 개방의 추 방주가 세운 공이 크니, 그가 차기 무림맹주가 되지 않을까 싶군.”
“그럴지도 모르겠군.”
무인들의 마지막 말에 서요평이 발끈해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진양이 얼른 그의 팔을 잡고 말렸다.
사실 진양도 천의교를 정리하고 나면 더 이상 맹주의 자리에 앉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진양은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이 싫어 얼른 식사만 하고 객점을 나섰다.
진양 일행은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다음 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신필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양은 그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8. 간계(奸計)
“방, 방금 뭐라고 했소?”
진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설은 눈시울을 적시며 고개를 떨어뜨렸고, 그녀 주위의 모든 무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진양이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아닐 것이오. 절대…… 잘못 안 것일 거요. 그렇지요? 아직 확실한 정보가 아니지요?”
진양의 거듭된 질문에 유설은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양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
“그럴 수가…… 그럴 수는 없소! 가 대주가 죽다니!”
진양은 비틀비틀 물러나다가 태사의에 털썩 주저앉았다.
들뜬 마음으로 신필문에 도착했건만,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에서는 끔찍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