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45
신필천하(神筆天下) 145화
운태산의 총공격으로 무림맹은 결국 위교이왕을 물리치고 천의교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철혈문의 구계악과 종남파의 봉상탁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가신풍은 중상을 입고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깊은 낭떠러지였기에 가신풍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하니 진양은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만약 내가 그곳에 남았더라면 가 대주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 장로와 봉 장로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빠졌으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과연 내가 맹주로서의 자격이 있기나 한단 말인가?’
진양은 막중한 책임감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결국 실의에 빠진 진양은 주위를 모두 물리치고 방 안에 혼자 남았다.
유설 역시 진양의 그런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지라 조용히 물러나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다음 날 진양은 무이오도와 죽반승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운태산 주변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 반드시 가신풍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일렀다.
“그의 시신이라도 좋으니 반드시 찾아내야 하오. 그 전에는 본 문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무이오도와 죽반승은 그 길로 곧장 운태산으로 향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진양은 무림맹에 가입된 전 문파에 서찰을 보냈다.
운태산 싸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림맹주의 자리에서 이제 물러나겠다는 내용이었다.
무림맹주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 각대 문파의 수장들은 차기 맹주로 추방산을 추대했다.
추방산은 천의교를 물리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누구도 그 의견에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특히 정파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맹주 취임식은 천의교를 완전히 무찌른 운태산 정상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이미 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진양은 무림맹이 어떻게 흘러가든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하루하루 가신풍에 대한 소식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매일 방에서 슬픔에 빠진 채 시만 적으며 시간을 보내자, 유설이 보다 못해 찾아왔다.
“이러실 게 아니라 바람을 쐴 겸 구화산에 다녀오시는 건 어때요?”
“무림맹 총단 말이오?”
“네.”
진양이 씁쓸히 웃으며 반문했다.
“지금쯤 그곳엔 사람도 없을 텐데 뭐하러 가오? 혈맹옥에 배신자 세 명만 갇혀 있을 뿐이오.”
유설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정말 곡 채주과 위 선배가 배신자라고 생각하시나요?”
“모르겠소. 하지만 곡 채주가 잡히고 나서부터 무림맹은 연승을 이어갔소. 뭐,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들의 처리도 무림맹에서 알아서 진행하겠지.”
“그래도 무림맹 총단으로 가서 짐은 챙겨와야죠? 그리고 전 아직 무림맹 총단이 어떤 모습인지 구경도 하지 못한걸요? 우리 함께 다녀와요.”
유설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자, 진양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설이 자신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이러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가봅시다.”
“잘 생각하셨어요.”
유설이 활짝 웃었다.
진양은 다음 날 구화산으로 향했다.
가져올 짐을 생각해서 그는 전학수와 진승, 그리고 사상이괴도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진양의 수제자인 진운생도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어느새 약관을 넘긴 진운생은 제법 준수한 청년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진운생은 요즘 부쩍 우울해진 진양을 위해 쉼없이 떠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진양 일행은 구화산의 무림맹 총단에 들어설 수 있었다.
진양의 예상대로 총단에는 최소한의 인원만이 남고, 모두 운태산으로 떠난 뒤였다.
진양은 본당의 대청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글씨를 보고 중얼거렸다.
天下泰平
“천하태평이라…….”
마침 대청 안에서 걸어 나오던 시종이 진양을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맹주님 오셨습니까?”
“잘 지냈는가?”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운태산으로 가시지 않고 어찌 이곳으로 오셨는지요?”
“그저 내 짐을 찾으러 왔네.”
“그렇군요. 맹주님의 물건들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고맙네.”
진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등 뒤에 있던 진운생이 벽에 걸린 글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사부님, 정말 대단한 글씨입니다. 저 글씨 역시 사부님이 직접 쓰신 건지요?”
“내가 쓴 것은 아니다. 운생아, 저 글씨가 어떻게 보이느냐?”
“사부님 외에 이처럼 훌륭한 글씨를 쓰는 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필획이 조화롭고 흘러가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과연 신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토록 글을 쓰고 보았으면서도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
“이 글씨는 무척 잘 쓴 것이지만, 뜻을 담는 것에는 실패했다. 실제로 글씨와 뜻이 일체하지 않으니, 이는 일상생활에서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아무리 악필이라고 할지라도 글자와 마음이 일치한다면 혼이 담긴 명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형상에만 치우쳐 기교에만 능할 것이 아니라, 붓을 들기 전의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시종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이상하군요. 이 글을 쓰신 분은 평생 정의를 위해서 싸워오셨고, 천하태평을 위해 노력하신 분인데요. 어째서 글자에 뜻이 담기지 않았다는 건지요?”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흐음. 이 글을 적은 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예, 바로 개방의 추 방주님이십니다.”
“……!”
순간 진양은 들고 있던 수호필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추방산이 얼마나 글씨를 수려하게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전에 개방을 방문했을 때, 추방산이 직접 글을 써서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 정도의 서예 실력이라면 글씨를 쓸 때 충분히 뜻을 담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천하태평’이라는 글씨에서는 그의 뜻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냉소적인 분위기마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범인이라면 이 미묘하고도 애매한 차이를 눈치채기 힘들겠지만, 오랫동안 서예만 연구하며 살아온 진양은 단박에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상하군. 추 방주라면 이런 글은 적지 않을 텐데…….’
진양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진양이 돌연 심각하게 굳어지니,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져 함부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추 방주께서 어찌 이런 껍데기뿐인 글을 적었단 말인가? 이건 둘 중 하나다. 실제로 저 글을 적은 자가 추 방주가 아니거나, 추 방주의 마음에 저러한 뜻이 없거나.’
생각을 마친 진양은 시종을 다시 다그쳐 물었다.
“틀림없는가? 이 글을 정말 추 방주께서 직접 적으셨단 말인가?”
“물론입지요.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걸요.”
시종의 목소리를 들은 진양은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곁에 선 유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왜 그러세요?”
“잠시만…… 생각을 좀 해보아야겠소.”
진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갑자기 정화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당시 무림맹에 간자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진양은 혈사채주인 곡전풍과 위사령, 조전을 잡아들였다.
한데 정말 그들이 배신자가 분명한가?
그들을 배신자로 내몰았던 사람이 누구였나?
바로 추방산이었다.
진양은 점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작년 남경의 분타에서 추방산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당시 추방산은 두 개의 단어를 붓으로 적었다.
바로 ‘투지’와 ‘신뢰’였다.
그런데 ‘투지’라는 글자에서는 그 뜻이 명백하게 전달되었으나, ‘신뢰’라는 글자에서는 그 뜻이 무척 희미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남창에서 맹지덕 장로가 사당에서 죽었을 때도 추방산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그뿐 아니라, 다음 날 갈지첨이 죽었을 때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는 추방산이었다.
갈지첨의 시신은 금방 죽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때 추방산이 뭐라고 했던가?
척금송에게 장법을 맞아서 시신이 빠르게 부패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그 말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더구나 갈지첨의 결정적 사인은 바로 검상이었다. 그 전날 죽었던 맹지덕 장로가 검법에 뛰어난 자라고 했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양은 벌떡 일어나서 시종을 향해 물었다.
“총단에 남아 있는 무인 중에 청성파 사람이 있는가?”
“예, 정백당(淨白堂)에 가시면 청성파 무인 두 분이 계십니다.”
진양은 곧장 정백당으로 달려갔다.
“부맥장이요?”
머리에 청색 두건을 두른 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에 서 있는 동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옆에 선 무인 역시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에 진양이 재차 다그쳤다.
“잘 생각해 보시오. 분명히 부맥장이라고 했소. 척 장로가 개발한 장법으로, 몸에 맞으면 신체가 빠르게 썩어가는 장법이라고 했소.”
두 무인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맹주님. 저희는 금시초문이군요. 하지만 척 장로님이 홀로 개발했다면 저희도 모를 수 있겠지요.”
두건 쓴 사내가 말하자, 옆에 선 무인이 그마저도 부정했다.
“아닐세. 척 장로님은 새로운 무공을 연마하시면 늘 말씀을 하시는 성품일세. 그분이 그런 무시무시한 장법을 연마하고도 가만 계실 리가 있겠는가?”
“하긴 그도 그렇군. 어쨌거나 저희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진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진양은 다시 본당의 대청으로 돌아와 의자에 주저앉았다.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의 말에 유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내가 큰 실수를 한 게 아닌지 두렵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말씀을 해주셔야 알지요.”
유설이 답답한 마음에 대답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조금 전에 나갔던 시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맹주님! 신필문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진양이 벌떡 일어나며 반문했다.
“신필문에서? 그게 무슨 말이오?”
“그분이 지금 맹주님을 급히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시종의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누군가 대청 안으로 불쑥 뛰어들어 왔다.
“문주님! 여기 계셨군요!”
진양이 깜짝 놀라며 바라보니 그는 다름 아닌 무이오도 중 이도귀였다.
“아니, 여긴 어쩐 일이오? 가 당주를 찾아오라고 한 것은 어찌 됐소?”
“가 당주를 찾았습니다! 대별산으로 돌아가던 길에 문주님께서 총단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보다 큰일이 났습니다. 문주님!”
“무슨 말씀이시오?”
“가 당주가 말하길, 개방의 추 방주가…….”
“추 방주가?”
“천의교 교주라고…….”
“뭣이?”
진양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너무 놀라서 입을 척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시종은 아예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모든 사실을 가 당주로부터 들었습니다.”
“가 당주는 지금 어디에 있소?”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제가 먼저 달려와 문주님께 보고드리는 것입니다.”
“당장 나를 안내하시오!”
“예, 문주님!”
이도귀가 앞장서자, 진양은 그를 따라 나는 듯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