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47
신필천하(神筆天下) 147화
운태산을 오르던 진양은 갑자기 들린 뇌성에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무인들 모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소리는……!”
위사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별과 달이 빛나는 맑은 하늘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칠 리는 없지 않은가.
“정상에서 들린 소리인 듯합니다.”
“벌써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
진양의 말에 위사령이 칼을 콱 움켜쥐며 소리쳤다.
진양이 말에서 뛰어내려 빠르게 달렸다.
“서둘러야겠습니다!”
그의 뒤로 무인들이 저마다 말에서 뛰어내려 경공을 펼쳐 달리기 시작했다.
정상이 보일 때쯤 진양은 밤하늘을 부옇게 채우고 있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이 쳐 죽일 놈들! 폭약을 설치했던 모양이오!”
위사령의 말에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모여 있는 다수를 가장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게 가장 좋았겠지요. 인명피해가 별로 없어야 할 터인데…….”
진양은 말을 하면서도 별로 기대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산 아래에서도 그 울림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
그런 폭발이라면 보나마나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쯤이면 개방으로 위장하고 있던 천의교 신도들이 본색을 드러냈을 것이고, 죽은 척하던 위교이왕과 곽연까지 나타났을 것이다.
진양은 부지런히 걸음을 놀려 정상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돌을 깎아 만든 계단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편액이 보였다.
‘정의맹’이라고 적힌 그 편액은 두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가 입구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성난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진양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시체가 널려 있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몸과 팔다리가 분리되어 따로따로 나뒹굴고 있었다.
진양은 마침내 정의당 앞에 다다랐다.
마당은 그야말로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밟아가며 싸우는 무리들이 있었다.
바로 천상련의 풍천익과 소림의 혜방 선사, 그리고 무당의 호연각이었다. 그 외에도 몇몇 무인들이 더 있었지만 대부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나마 내공이 높은 자들이 그 폭발 속에서도 호체신공을 발휘해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피부가 타고 벗겨져 멀쩡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그들과 맞서 싸우는 천의교 신도들과 추방산을 비롯한 위교이왕과 곽연만이 사지육신 멀쩡해 보였다.
“추방산!”
진양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단번에 날아갔다.
진양이 수호필을 수직으로 내려치자 마치 벼락이 치듯 강맹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꽈르르릉!
“크웃!”
추방산이 비명을 터뜨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진양의 등장에 천의교 신도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반면 풍천익을 비롯한 무림맹의 무인들은 더욱 사기가 치솟았다.
“양아, 왔구나!”
풍천익은 반갑고 기쁜 마음에 전 맹주에 대한 예의도 잊은 채 어릴 적 그를 대하듯 불렀다.
진양이 수호필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예,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클클. 그래도 온 게 어디냐? 아주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한편 추방산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고는 소리쳤다.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인가?”
“비록 늦었지만 당신이 꾸민 음모는 모두 알았소! 더 이상 당신의 계략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오.”
“흥! 이미 늦었다! 이놈부터 쳐라!”
추방산이 발악하듯 소리치자, 곽연과 위교이왕이 한꺼번에 진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곡전풍이 불쑥 나타나더니 곽연의 복부에 장력을 날렸다.
깜짝 놀란 곽연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피했다.
또한 위사령과 조전은 마천강에게 검과 도를 휘두르며 쇄도했고, 유설과 무이오도, 죽반승 등은 범릉에게 달려들어 저마다 무기를 휘둘렀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추방산은 직접 타구봉을 들고 진양에게 쇄도해 들어왔다.
그가 양손에 공력을 잔뜩 실은 채 타구봉을 내려치자, 조금 전 진양이 내려친 수호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위력이 발생했다.
꽈장!
진양이 물러선 빈자리가 움푹 파이면서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올랐다.
범인이라면 그 파편만 맞고도 충분히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추방산은 진양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재차 쇄도해 들어갔다.
연이은 기습에 진양은 계속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추방산의 무공은 개방의 타구봉법과 천의교의 무공이 뒤섞여 굉장히 기기묘묘했는데, 지켜보는 자들은 눈알이 핑글핑글 돌 만큼 어지러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추방산이 거친 기합을 토해내며 타구봉을 내질렀다.
“하압!”
쒜에엑!
퍼억!
“컥!”
진양은 울컥 피를 토하며 뒤로 휘청 날아갔다.
내질러진 타구봉이 정확히 진양의 가슴을 격타한 것이다.
이어서 추방산이 각법을 연환식으로 펼치자, 진양은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멀찍이 날아간 진양은 정의당 문짝을 부수며 안마당까지 굴러갔다.
콰당탕!
진양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수호필의 붓털을 축축하게 적셨다.
진양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추방산이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양 장문, 그새 내게 받은 은혜를 잊었소?”
“은혜라니…… 무슨 소리를…….”
“허, 이래서 사람은 좋은 일을 해도 헛일이라니까. 예전 나는 그대의 수하인 흑표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소? 연왕으로부터 쫓길 때 숨겨준 사실을 벌써 잊은 거요?”
그 순간 진양은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 당시 개방에 머물 때, 개방의 제자들과 추방산이 밤중에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그때 진양이 다가가서 물으니, 가신풍이 위기에 처해 있어 도와줄 궁리를 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아찔한 순간이 아닌가.
진양이 추방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가 당주가 위기에 빠졌던 날, 당신들은 그를 죽일 생각이었군!”
“클클클. 원래는 그랬지. 하지만 양 장문께서 우리 밀담을 엿듣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지 뭐요.”
“이제 알겠군, 그날 밤 나와 가 당주가 숲에서 쫓길 때 당신이 나타나자마자 연왕의 병사들이 왜 회군을 했던 것인지. 개방의 위신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천의교 교주였기 때문이었어.”
짝짝짝.
추방산이 박수를 치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려. 어찌 됐든 나는 그대를 도운 것이니 은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잘도 그런 말을…….”
추방산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나는 그 당시 양 장문에게 어째서 원한을 품어도 모자랄 상대에게 은혜를 갚을 생각만 하냐고 물었잖소? 그때 양 장문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지. 원한은 잊고 은혜만 기억하였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노라고. 그래서 나는 그랬지. 그 마음을 잊지 말라고 말이오. 양 장문, 내게 원한이 있더라도 그건 잊어버리고 내게 받은 은혜만을 생각하시오.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가 강호를 장악하게 되더라도 신필문만큼은 일절 건드리지 않겠소. 그동안 쌓인 정을 봐서라도 말이오.”
그의 말에 진양은 분노로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반면 추방산은 진양이 그처럼 분에 차오르는 모습을 즐기는 듯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진양의 눈빛이 극히 차분해졌다.
뿐만 아니라 콱 말아 쥔 채 들어 올렸던 수호필을 아래로 척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추방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호오,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거요?”
진양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 약속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음? 무슨 약속을 말이오?”
“신필문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 말이오.”
순간 추방산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만약 그대가 여기서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 주기만 한다면, 절대 신필문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이오.”
진양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추방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서려 있었다.
그제야 추방산은 진양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진양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믿을 수가 없소.”
“어째서?”
“과거 당신이 적은 ‘신뢰’라는 글자에는 진심이 묻어 있지 않았으니까. 글은 진심이 묻어나야 진정한 명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오. 내가 그 글자들을 어찌 써야 하는지 가르쳐 드리겠소!”
순간 진양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추방산은 본능적으로 물러나며 타구봉을 들었다.
순식간에 허공으로 도약한 진양은 수호필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추방산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진양이 수호필을 휘두를 때마다 붓털에 묻어 있던 시뻘건 핏물이 사방으로 튀며 획을 그었다.
따당! 꽝!
추방산이 타구봉을 들어 방어했지만, 진양의 힘이 어찌나 강맹한지 튕겨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오히려 추방산이 연신 뒤로 물러나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투(鬪)!”
진양이 고함을 내질렀다.
마침 추방산의 뒤로 놓인 벽과 바닥에는 붉은 핏칠이 커다랗게 새겨졌는데, 바로 ‘투(鬪)’라는 글자였다.
추방산은 진양의 힘을 이기지 못해 정의당 문을 부수며 뒤로 물러났다.
진양은 그대로 그를 쫓아 앞마당까지 나와 여전히 수호필을 휘둘렀다.
“지(志)!”
진양이 다시 외쳤다.
역시 이번에도 바닥에 튀어나간 핏물이 커다랗게 ‘지(志)’ 자를 새겨놓고 있었다.
추방산은 갑자기 진양에게서 이만한 힘이 어디서 솟아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진양은 글을 쓸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필력을 자신한다는 것을.
진양은 무공을 사용하기 이전에 허공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과거에 장삼봉을 만났을 때, 그가 허공에 시를 새길 때와 같은 방식의 무공이었다.
이 순간 진양의 필력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쳇!”
추방산이 몸을 훌쩍 날려 건물 지붕 위로 올라섰다.
마침 정의당 앞마당에서는 여전히 천의교 신도들과 무인들의 싸움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다만 폭발에 휩쓸렸던 혜방 선사와 호연각, 풍천익 등은 한쪽에 물러나 다친 몸을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추방산은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그를 쫓아 올라온 진양이 다시 쇄도해 들어오며 소리쳤다.
“잘 보시오! ‘신뢰’라는 글자는 이렇게 쓰는 것이오!”
쒜에엑!
진양이 수호필을 큼직하게 휘둘러 왔다.
동작은 컸으나 그 움직임은 몹시 빨라 추방산은 막을 생각도 못 한 채 얼른 뒤로 굴렀다.
“신(信)!”
사악! 스윽!
“뢰(賴)!”
어느새 추방산의 옷은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진양이 뿜어내고 있는 뜨끈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에 옷자락이 잘려 나가고 만 것이다.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어지자, 추방산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진양은 끈질기게 그를 쫓으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천하태평’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