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48
신필천하(神筆天下) 148화
“이익! 당하고만 있을까 보냐!”
벽을 등지고 선 추방산이 공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기운이 마주 소용돌이치자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후끈한 기운이 사방으로 불어나가자, 싸움을 벌이고 있던 자들이 저마다 고개를 돌리고 두 사람을 구경했다.
“천하태평은 이렇게 쓰는 것이오!”
진양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수호필을 휘둘렀다.
“어디 와보아라!”
추방산도 마주 소리치며 타구봉을 휘둘러 갔다.
두 사람의 무기가 서로 맞부딪칠 때마다 천둥벼락이 치는 소리가 울렸다.
꽝! 꽈자장! 꽈르르릉!
사방으로 불어나가는 강맹한 기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제대로 눈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더구나 잿더미가 풀풀 날려대니 더욱 싸우는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얼마나 천둥소리가 울렸을까?
어느 순간 천둥이 치지 않았다.
번쩍이는 벼락도 보이지 않았다.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벽을 바라보고 있는 진양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입은 옷 역시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 떨어지고, 군데군데 보이는 살갗은 칼에 베인 듯 찢어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먼지가 조금 더 걷히자 이번에는 벽 앞에 선 추방산이 보였다.
추방산은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는데, 그의 뒤로 보이는 벽에는 핏물로 새겨진 글씨가 보였다.
天下泰平
‘천하태평’이라는 글자 앞에 서 있던 추방산이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연…… 명필이로군.”
말을 마친 추방산은 마치 살갗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더니 분수처럼 피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본 마천강과 범릉이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왔다.
“교주님!”
마천강은 자신의 앞을 막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가차없이 베어 버렸다.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던 범릉도 지금만큼은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건 사투에서 이성을 잃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두 사람이 이성을 잃자, 진양 일행과 무림맹의 무인들에게는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일말의 동정도 베풀지 않고 마천강과 범릉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죽어랏!”
쒜엑! 쒜에엑!
사방에서 무기가 튀어나오자, 추방산에게 달려가려고만 하던 두 사람은 금방 상처를 입고 말았다.
“커억!”
온몸이 난자당한 마천강과 범릉은 이제 막무가내로 무기를 휘두르며 추방산에게 향했다. 그 둘의 몸부림이 자못 처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미 패색이 짙어진 천의교 신도들은 저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산 아래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결국 진양 일행에게 둘러싸인 위교이왕은 전신을 난자당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참한지 눈뜨고 봐주기가 힘들 정도였다.
결국 위교이왕은 오열하며 그렇게 죽어갔다.
그때 죽반승이 멀찍한 곳에서 소리쳤다.
“엇! 도망간다! 저기! 같이 죽지 않는다! 너도 와서 죽어야 한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곽연이 지붕을 타고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쫓아가겠소! 양 장문은 다친 자들을 돌봐주시오!”
혈사채주 곡전풍이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위사령과 조전이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진양은 만약을 대비해서 무이오도와 죽반승에게 혈사채 무인들을 따라가서 돕도록 지시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 가장 먼저 유설이 진양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소. 그보다 누이는 어떻소?”
“저도 괜찮아요.”
유설이 빙그레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때 풍천익과 혜방 선사, 그리고 호연각이 진양에게 다가왔다.
세 사람은 폭발에 휩쓸린 데다 바로 격한 싸움을 벌였기 때문인지 몹시 지친 듯했다.
풍천익이 벽에 새겨진 붉은 글씨를 보고 힘겹게 웃었다.
“내 평생 이처럼 훌륭한 글씨는 본 적이 없구나.”
“풍 련주님께 배운 것이지요.”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풍천익은 한차례 기침을 하고는 마주 웃었다.
호연각도 다가와 진양을 칭찬했다.
“너무 늦지 않게 와주어서 참으로 다행이었소. 하마터면 우리 모두 큰일 날 뻔했소.”
“아닙니다. 제가 불초하여 이런 위기가 생긴 것입니다. 후에 여러 영웅 앞에서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오. 추방산이 천의교 교주였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몰랐지 않았소. 그가 십 년이 넘도록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것이니, 그 사악한 계략이 그저 놀라울 뿐이오. 양 장문의 탓이 아니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폭음이 들렸을 때는 정말이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풍천익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만약 혜방 선사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선사께서 공력을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펼쳤기에 우리 모두 살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연로하신데 몸이 상하시진 않았을지 모르겠구나.”
“그랬군요. 혜방 선사께서 공력이 심후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진양은 새삼 혜방 선사의 순후한 내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혜방 선사는 쓰러진 추방산과 위교이왕에게 일일이 다가가 차분히 염불을 외고 있었다.
“아미타불…….”
진양은 그런 그를 경외감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풍천익이 물었다.
“한데 추방산이 천의교 교주라는 것을 어찌 알았느냐?”
“사실 처음에는 그가 남긴 글씨를 보고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지요. 그리고 갈지첨의 죽음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던 차에 가 당주를 만났습니다.”
“가 당주라면……?”
“무림맹에서 질풍대를 이끌던 가 대주를 말씀드린 겁니다.”
“아……! 그가 살아 있었더냐?”
“전신의 뼈마디가 부러져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만, 목숨은 잃지 않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로고.”
진양은 가신풍에게 들은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해주었다.
진양의 이야기를 들으며 풍천익과 호연각은 연신 울분을 금치 못해 씨근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장탄식을 내뱉곤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호연각이 추방산의 시신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랬구려. 참으로 교활한 자였군.”
“하나 그 의지만큼은 대단하구려. 십 년여 전부터 이 모든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 왔으니…….”
풍천익이 감탄조로 말을 하자, 호연각이 영 못마땅한 듯 대꾸했다.
“감탄할 일이 아닙니다, 풍 련주. 사파의 무인들도 오늘날 천의교의 패망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어찌 그렇소? 사파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소?”
역시 정과 사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천의교가 사라진 지 겨우 얼마나 되었다고 호연각과 풍천익의 사이에는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그때 마침 유설이 다가왔다.
“선사님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제야 진양을 비롯한 세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혜방 선사를 바라보았다.
혜방 선사는 마소장왕 범릉 앞에 멈춰 서 있었는데, 조금 전 염불을 외는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첨엔 여전히 염불을 외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했으나, 네 사람이 꾸준히 지켜보는 중에도 혜방 선사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진양이 그에게 다가갔다.
“선사님.”
“…….”
“선사님?”
혜방 선사는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돌처럼 굳어 있었다.
진양이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 보니, 혜방 선사는 염주를 쥔 채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든 진양은 얼른 그의 팔을 잡고 불렀다.
“선사님!”
하지만 역시나 혜방 선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진양이 깜짝 놀라며 그를 부축했다.
그제야 지켜보던 사람들도 우르르 달려왔다.
호연각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무슨 일이오?”
“모르겠습니다. 선사께서…… 선사께서…….”
진양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목소리마저 떨려왔다.
그가 얼른 목에 손을 대고 맥을 짚다가, 다시 손목의 맥을 짚었다.
진양이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호연각과 풍천익 등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열반에…… 드신 것 같습니다.”
“그런……!”
호연각이 순간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혜, 혜방 선사께서…… 혜방 선사께서……! 아아! 강호에 큰 별이 졌구나!”
그의 탄식에 무림맹의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혜방 선사를 보더니 끝내 오열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그날 밤이 새도록 운태산 정상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다음 날 오후부터 운태산 정상으로 각대 문파의 무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무림맹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급히 지원 인력을 파견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처절했던 싸움은 모두 끝난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부상자들을 돌보고 죽은 자들을 위해 장례를 치르기에 바빴다.
특히 혜방 선사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천하 각지에서 수많은 강호인들이 운태산을 찾아왔다.
진양 일행은 한동안 운태산을 떠날 수가 없었다.
워낙 많은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이 있었기에 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진양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부상자들을 직접 치료하고, 복구 작업에도 참여하니 사람들마다 그를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나중에는 신필문의 무인들과 제자들이 대거 운태산으로 찾아와 진양을 돕기까지 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여태껏 신필문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던 소담화도 있었다.
대략의 정리가 끝난 후에야 진양은 신필문의 무인들과 제자들을 이끌고 운태산을 떠날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 운태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산 아랫자락까지 내려와 진양 일행을 배웅해 주었다.
진양 일행은 운태산을 내려와 가까운 객점에 들렀다.
오랜만에 진양과 함께 나들이를 나오게 된 신필문의 무인들과 제자들은 저마다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수제자인 진운생 역시 아이처럼 신나서 소리쳤다.
“사부님! 천하에서 사부님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합니다.”
하나 진양은 짐짓 엄한 투로 그를 나무랐다.
“네 나이면 이제 적지 않은데 여전히 아이처럼 말하는구나. 자고로 겸즉유덕(謙卽有德)이라고 했다. 사람은 겸손해야 덕이 있는 법이거늘, 어찌 그리 입을 가벼이 놀리느냐?”
“불초 제자, 생각이 짧았습니다.”
운생이 얼른 태도를 고치며 대답했다.
진양은 그런 그를 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라도 뉘우쳤다면 됐다.”
진양이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데, 마침 곽연을 뒤쫓아 갔던 무이오도 일행이 돌아왔다.
“어서 오시오. 곽연은 어찌 됐소?”
“죄송합니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무이오도 등이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진양은 어느 정도 짐작한 듯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곽연은 고도의 상승무공을 익히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추격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무이오도는 함께 추격하러 갔던 곡전풍 일행은 먼저 혈사채로 귀환했다고 전했다.
“조전 부장이 가벼운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들은 먼저 혈사채로 귀환했습니다. 곡 채주님께서 차후에 문주님께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구려. 아무튼 고생 많으셨소. 앉아서 요기라도 좀 하시오.”
진양은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그렇게 신필문 무인들은 객점에서 왁자한 분위기 속에 식사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