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8
신필천하(神筆天下) 18화
‘말이 좀 성질이 사납긴 하지만 그렇게 힘이 세다는 건 모르겠는데? 왜 이 말을 못 끌고 온 걸까?’
자신이 무의식중에 내공을 운기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는 진양으로서는 그저 지금의 상황이 의아할 뿐이었다.
양진양이 말을 끌고 사찰 안으로 들어가자, 임패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나 순식간에 그 표정이 지워졌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다.
‘저 어린 녀석이 정말 끌고 왔군.’
임패각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퉁명스레 말했다.
“흥! 꼬마 녀석도 끌고 오는 것을 다 큰 장정이 쩔쩔매고 있었더냐?”
“죄, 죄송합니다.”
마취삼과 방두철이 연방 고개를 숙였다.
그때 갑자기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는 울부짖었다.
이히히힝-!
그러고는 마당으로 쌩하니 달려가 쓰러진 사람들 사이를 마구 누볐다.
양진양이 깜짝 놀라서 보니, 말이 바닥에 흥건한 피를 핥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앗! 그건 안 돼!”
진양이 소리치며 달려가는데, 임패각이 불쑥 말했다.
“놔둬라. 간만에 포식 좀 하라고 해.”
“포, 포식이라니요? 저건 피잖아요! 말이 지금 피를 핥아 먹고 있어요, 어르신!”
“이 녀석아! 나도 눈이 달려 있다! 누가 그걸 모르냐?”
“그, 그런데 왜…….”
그때 멍하니 서 있던 마취삼에게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가 손가락으로 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그럼 저게 설마…… 흡혈마(吸血馬)!”
그 소리에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흡혈마라니요?”
“둔도백마를 말한다면 당연히 연상되는 게 있지. 피를 먹고사는 흡혈마.”
“피를 먹고산다고요? 말이?”
마취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어째서 그렇게 강한 힘을 지녔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흡혈마는 하루에 천 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명마 중의 명마다. 흡혈마는 전대 명교 교주가 둔도백마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둔도백마를 떠올리면 자연 흡혈마가 연상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하긴 영물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그 준마가 저렇게 비루먹은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이렇게 되자 진양도 더 이상은 나서지 못했다.
강호에는 다양한 영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나마 본 적이 있었다. 피를 핥아 먹는 모습이 영 적응되지 않았지만, 그게 본모습이라니 어쩌겠나.
임패각이 마취삼과 방두철을 불렀다.
“오늘 너희 두 놈은 나를 보자마자 잘못을 빌었으니 특별히 내 손을 쓰지 않았다. 앞으로는 마음을 고처먹고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해라.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반드시 네놈들을 다시 찾아내서 목숨을 끊어줄 게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마취삼과 방두철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알았으면 썩 물러가라.”
“감,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요!”
두 사람은 연방 허리를 숙여 절을 하며 물러갔다. 그러고는 해사방의 문을 나서자마자 조금 전 풀려났던 사람들처럼 쏜살같이 사라졌다.
양진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정도로 정말 괜찮을까요?”
“흥! 제까짓 것들이 또 잘못을 저지른다면 목숨을 내놓은 게지. 그때는 이 둔도가 가만두지 않을게야.”
임패각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는 조금 전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네면서 파혼대법(破魂大法)을 사용했다. 파혼대법은 임패각이 창안한 술법 중 하나로, 상대방의 뇌리에 살기를 각인시키는 방법이다. 일종의 섭혼술(攝魂術)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 아닌, 생각의 제약만을 걸어두는 것이기에 보다 간단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마취삼과 방두철은 악행을 저지르려고 할 때마다 조금 전 임패각이 각인시켰던 살기를 떠올리곤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한참이 지나자 실컷 피를 핥아 먹은 말이 임패각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임패각은 흡혈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컷 먹었냐?”
푸르릉.
“옳지. 그럼 가자꾸나. 네가 이 녀석을 끌도록 해라.”
“예, 어르신.”
임패각이 말 등에 올라타자 진양이 고삐를 잡고 끌기 시작했다.
7. 십지독녀(十指毒女)
양진양과 임패각은 해사방의 근거지를 벗어난 후로 줄곧 숲길을 따라 걸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숲에서 노숙을 했다.
다음 날 일찍 양진양은 임패각이 가라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보니 진양은 목적지가 궁금해졌다.
“저기, 어르신.”
“뭐냐?”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요?”
“알아서 뭐하려고? 알면 더 빨리 갈 방법이라도 있다더냐?”
“그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요.”
“시끄럽다. 시종 주제에 궁금한 게 뭐가 그리 많아? 그냥 가라는 대로 가면 되는 것이지.”
시종일관 퉁명스러운 대꾸에 양진양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성정이 불같은 임패각을 상대로 기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눈앞에 제법 널찍한 관도가 나타났다. 계속 불편한 숲길을 걷던 진양으로서는 넓게 다듬어진 길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때 임패각이 돌연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숲 한쪽으로 들어갔다.
“어? 어르신?”
하지만 임패각은 대답 대신 양 무릎을 짚고 격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웨에엑!”
양진양이 깜짝 놀라서 보니 임패각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진양이 얼른 달려가려는데, 임패각이 손을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오지 마!”
“하, 하지만 어르신……!”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죽고 싶은 게냐?”
임패각이 다시 호통을 치자, 진양도 더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진양이 한참을 서성이고 있는데, 임패각이 가까스로 토악질을 멈추고는 길가로 나왔다.
진양이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마저도 거부했다.
“내 곁에서 떨어져 있거라.”
“제가 도와드릴게요.”
“시끄럽다. 살고 싶으면 떨어져 있어라.”
“……예.”
진양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혹시 어르신이 독에 당하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보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신 걸지도 모른다. 흡혈마도 피를 보고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잖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진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독공에 당하셨나요?”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구나.”
“그럼 얼른 해사방으로 돌아가요.”
진양은 그가 해사방에서 독공을 당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해사방에 가면 해독약도 구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임패각이 코웃음을 쳤다.
“흥! 해사방 따위가 천하의 십지독공(十指毒功)의 해독약을 가지고 있겠느냐?”
진양은 십지독공이 뭔지 몰랐다.
다만 임패각의 말로 미루어 천하의 맹독임을 추측할 뿐이었다.
진양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조용히 죽을 자리나 찾아봐야지.”
“안 돼요. 십지독공을 사용한 사람에게 가서 해독약을 구해봐요.”
“웃긴 소리! 해독약을 줄 것 같았으면 날 공격했겠느냐? 죽을 자리를 더 빨리 찾아가라는 소리와 똑같다!”
“그래도 이대로는…….”
“거, 시끄럽구나! 나는 이제 운기를 해야겠으니 말이나 잘 끌고 가거라!”
임패각이 사납게 호통을 치니 진양도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진양이 말을 이끄는 동안, 임패각은 말 등에 앉은 채로 눈을 지그시 감고 운기에 집중했다.
두 사람이 관도에 들어서고 나서 조금 더 나아가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임패각이 눈을 떴다.
“흠. 객점에 들러 배 좀 채우도록 하지.”
두 사람은 마을 어귀에 있는 객점으로 들어갔다.
이층에 자리를 잡은 임패각은 점소이에게 근처에 빈 사당이나 관제묘가 없는지 물었다. 점소이는 동쪽으로 오 리 정도 가면 낡은 사당이 한 채 있다고 알려주었다.
임패각이 음식을 주문하고 나자,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르신, 지금 우리는 사당에 가는 건가요?”
“거길 뭣하러 가느냐?”
“그런데 왜 점소이에게 사당이나 관제묘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셨어요?”
“혹시 뜻하지 않게 네놈과 떨어지게 되면 만날 곳을 정해야 할 일이 아니냐?”
진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의구심이 들었다.
어차피 앞으로 줄곧 함께 움직일 것인데 떨어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임패각은 즉석에서 음식 값을 지불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진양은 앉은 자리에서 바로 음식 값을 주는 것이 생소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마음 놓고 먹을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로 포만감을 느낀 진양은 마냥 행복했다.
그때 임패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잠시 볼일을 보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양진양은 그가 일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의심 없이 기다렸다. 이미 음식 값을 모두 계산한 후였으니 불안할 것도 없었다.
한데 자리를 비운 지 한 식경이 다 지나도록 임패각은 나타나지 않았다.
진양은 슬슬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혹시 또 독이 발작한 걸까?’
한 번 걱정되기 시작하자 불안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다.
그때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진양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한데 이층으로 올라온 사람은 처음 보는 여인 두 명이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진양을 힐끗 보더니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진양은 상대가 임패각이 아니라 내심 실망하면서도 한동안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여인의 외모가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 만큼 아름다웠다.
여인 중 한 명은 성숙미를 물씬 풍겼고, 다른 한 명은 진양의 또래 정도로 앳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성숙한 여인은 손에 하얀 쥘부채를 들고 있었고, 소녀는 허리춤에 긴 장검을 차고 있었다.
특히 여인의 어깨에는 다양한 색깔의 깃털을 가진 새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한데 보통 팔색조(八色鳥)는 몸이 작고 통통한 데 반해 이 새는 몸이 얇실하고 붉은 꼬리 깃털이 한 자 정도로 유난히 길었다.
‘참 예쁜 새다.’
진양은 감탄하면서도 내심 허탈한 마음에 털썩 자리에 앉았다.
다시 한 식경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임패각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진양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데, 구석에서 차를 마시던 그 아름다운 소녀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소녀가 날카로운 어투로 물었다.
“이봐, 여기 함께 있던 사람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