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9
신필천하(神筆天下) 19화
소녀는 빈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임패각이 있던 자리에는 아직도 빈 밥그릇과 수저가 놓여 있었다.
진양은 소녀의 아리따운 외모에 내심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느닷없는 차가운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자신도 예를 갖추지 않고 되물었다.
“그걸 왜 물어보는데?”
“묻는 말에 대답만 해!”
“싫어. 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
소녀는 진양이 뜻밖에도 당차게 나오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세상물정에 어두운 진양이지만, 소녀가 무림의 인물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던지라 진양은 딱히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소녀가 시선을 돌려 구석진 자리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말하는 게 좋을걸.”
“흥! 하나도 무섭지 않아!”
“뭐야? 이 바보 같은 게!”
소녀가 검을 휘두르더니 탁자 모서리를 단칼에 베어냈다. 진양은 탁자 모서리가 순식간에 잘려 나가는 것을 보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소녀도 진양의 안색을 살피고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 어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같이 있던 사람이 꼽추 영감이 맞지? 그 노인 지금 어딨어?”
진양은 소녀가 임패각을 알고 있자 내심 놀랐다.
“어르신을 알고 있어?”
“당연히 알지.”
“어르신을 왜 찾는 건데?”
“우리 사부님이 그분의 목숨을 원하시니까! 자, 이제 알았으면 순순히 대꾸해!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내가 가져갈 거야!”
소녀가 다시 윽박지르자 진양은 어쩐 일인지 더욱 오기가 치솟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르쳐 줄 수 없지. 어르신은 좋은 분이니까.”
“아무래도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소녀가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며 진양의 어깨를 베어왔다.
순간 진양이 화들짝 놀라서 얼른 물러났다.
하지만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다 보니 의자째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진양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검이 의자 밑동을 싹둑 베어 버렸다.
“칫!”
소녀가 혀를 차더니 다시 검을 내리찍었다. 역시 이번에도 진양의 어깨를 노린 공격이었다.
처음부터 소녀는 진양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다만 팔 하나쯤 베어내면 바른 소리를 하겠다 싶어 검을 휘두른 것이다.
한데 진양이 이번에도 옆으로 데구루루 구르더니 검날을 기가 막히게 피해내는 것이 아닌가.
소녀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보아하니 무공을 배우지도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자신의 검을 요리조리 잘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도 진양의 몸속에는 자양진기가 발동하고 있었으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공이 상승하면 자연히 움직임이 민첩하고 빨라지게 마련이다.
진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니까 어서 말해!”
“싫어!”
“그럼 혼나야지!”
소녀가 다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이번만큼은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진양은 엉겁결에 탁자에 있는 나무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깡!
나무젓가락과 검이 부딪쳤는데 청명한 금속성이 울렸다. 순간 소녀는 가벼운 내상을 입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소녀의 두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너, 무공을 익혔구나?”
“무슨 소리야? 난 무공을 익히지 않았어!”
“거짓말쟁이!”
소녀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진양은 얼른 목을 움츠리며 검을 피했다.
진양으로서도 나무젓가락으로 검을 막아냈다는 것이 내심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공을 익힌 적이 없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나무젓가락이 신기할 정도로 단단하다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않나.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에 뭔가 변화가 생긴 걸까?’
하지만 진양에게 차분히 생각해볼 시간은 일절 주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매섭게 진양을 몰아붙였다. 이윽고 구석진 곳으로 밀어 넣은 다음 소녀가 일장을 내뻗었다.
마땅히 피할 곳이 없어진 진양이 왼손을 뻗어 마주쳐 갔다. 그 순간 어김없이 진양의 몸에서 자양진기가 격발했다.
퍼엉!
폭음이 터지면서 소녀가 뒤로 주룩 밀려갔다.
“이러고도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소녀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이자 진양도 코웃음으로 응대했다.
“네가 약하고 둔한 걸 가지고 왜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뭐야?”
소녀는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지금껏 자신에게 약하고 둔하다는 말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주위에서는 어린 나이에 매서운 무공을 익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데 약하고 둔하다니!
그것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아이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한편 진양은 수차례 소녀의 공격을 피해내고 반격까지 성공하자 은근히 자신감이 붙었다.
‘이 아이가 무공을 익혔다지만 별로 강하진 않구나. 어쩌면 내가 이 아이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한 진양이 얼른 달려가 양손을 뻗었다. 소녀를 밀어서 넘어뜨릴 생각이었다.
그 순간 소녀가 보법을 밟으며 진양의 손길을 가볍게 피해냈다. 진양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서 소녀는 다시 검을 내려쳤다. 찰나지간 진양이 몸을 휙 돌리며 나무젓가락을 후렸다.
까앙!
또 한 번 금속성이 울리면서 소녀가 주춤 물러났다. 진양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먹을 곧게 내찔렀다.
바로 질풍권이었다.
소녀가 얼른 왼손을 휘둘러 장으로 맞섰다.
터엉!
내기가 충돌하면서 소녀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하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내가 무공을 익힌 진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빠르게 주먹을 내찔렀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어느새 다가온 여인이 진양의 손목을 낚아채며 휙 뿌리쳤다.
매우 유연하면서도 은근한 손길이었기에 진양의 호체신공이 발동될 여유조차 없었다. 진양이 주춤주춤 물러나자 여인은 귀신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접은 부채를 목 끝에 겨누었다.
“장난은 그만 치거라.”
옥구슬이 은쟁반 위를 구르는 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쥘부채 끝에는 짙은 살기가 맺혀 있어 진양은 다리를 오들오들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알겠어요.”
여인은 부채를 거두고 활짝 펼치더니 천천히 부채질을 했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리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녀 같은 모습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양…… 진양이에요.”
“나는 매지향(梅指向)이라고 한다. 이 아이는 내 제자 소담화(蘇潭化)라고 하지. 우리는 둔도백마를 찾고 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진양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우물거렸다.
매지향의 목소리는 무척 나긋나긋했지만, 어딘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는 듯했다.
매지향이 지그시 바라보는 가운데 진양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도…… 몰라요.”
매지향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얼음처럼 차갑고도 투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몰라요.”
“십지독녀(十指毒女)라고 부르지.”
순간 진양의 눈빛이 흔들렸다.
임패각이 뭐라고 했던가, 자신이 십지독공에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무공에 무지한 진양이었지만, 십지독공이 십지독녀의 무공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여자가 어르신을 다치게 한 것이구나!’
그러자 반발심이 솟은 진양이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안다고 해도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
매지향이 고운 이마를 슬쩍 찌푸렸다.
“어째서 그를 감싸는 거지?”
“제가 그분을 모시기로 했으니까요. 그런 이상 도의를 저 버릴 수는 없죠. 하지만 모르는 건 정말이에요.”
매지향은 진양의 말을 듣고 둔도백마가 제자로 거두기로 했다는 뜻인 줄로 오해했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네가 속은 것이다.”
“속았다뇨?”
“둔도백마는 일평생 제자를 두지 않기로 맹세한 자야. 그런 자가 널 거두었다고? 어림없는 소리지. 네가 너무 매달려서 제자로 거두겠다고 속인 거겠지.”
“그게 아니……!”
발끈해서 대답하던 진양은 퍼뜩 스치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사정을 시시콜콜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이 오해를 잘 이용하면 살아날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매지향이 진양의 안색을 살피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자, 우리는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둔도백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면 얘기만 해.”
“그분이 저를 속일 리가 없어요.”
“그가 자리를 떠난 지 벌써 반 시진이 넘었지? 그런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널 버려두고 간 거야.”
양진양은 이제 슬슬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코를 훌쩍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매지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겪은 서러웠던 일을 떠올리자 감정은 금방 우러나왔다.
“정말…… 그분이 저를 속인 걸까요?”
“아직도 내 말을 못 믿겠느냐? 그자는 평생 아무도 제자로 두지 않는다고 한 사람이야. 너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더냐?”
“……했어요.”
“그것 보렴. 자, 이제 말해줄 수 있겠지? 널 속인 자를 위해서 네가 목숨을 버릴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 그자가 어디로 간다고 했느냐?”
“장소는 저도 몰라요. 그냥 서쪽으로 갈 거라고 했어요.”
양진양이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대꾸하자, 매지향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듯했다. 그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돌렸다.
“참 아까 보니 네 재주가 비상하던데 존사가 누구시냐?”
“전 사부님이 없어요.”
매지향은 진양이 사문을 밝히기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하곤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우연히 만난 진양이 어느 사문의 제자이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소담화를 돌아보았다.
“가자, 화아.”
“네, 사부님.”
소담화는 걸음을 떼기 전에 진양의 얼굴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진양도 그 눈길을 느끼고는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외면했다.
소담화는 더욱 화가 났지만, 괜히 이 거지 같은 소년과 옥신각신거리다가 사부님께 혼날까 봐 이내 걸음을 옮겼다.
진양은 두 사람이 객점을 나가서 서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이층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일각 정도를 더 기다린 진양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께서는 만약 우리가 떨어져 있게 되면 만날 장소로 사당을 지목하셨어. 그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마 어르신은 저 두 사람이 올 것을 알고 미리 피하신 걸 거야.’
객점을 나온 진양은 재빨리 동쪽으로 달렸다.
마을을 벗어나서 동쪽 언덕을 올라서자 저 아래에 낡은 사당 하나가 보였다.
진양은 다 쓰러져 가는 사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묵은 먼지만 자욱할 뿐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양이 사당 안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르신! 임 어르신!”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