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
신필천하(神筆天下) 2화
양진양과 친한 아이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고, 여동추와 친한 아이들은 냉랭하게 비웃음을 터뜨렸다.
본래 친구는 끼리끼리 논다고 하지 않던가.
양진양과 친한 아이들은 대체로 무예에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양진양을 부축해 주는 아이들도 그저 울분을 삼킬 뿐 선뜻 여동추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양진양은 여러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넘어져 다치기까지 하자 울분이 치밀어 올라 눈물마저 핑 돌았다.
하지만 결코 여동추에게 우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때 근엄한 목소리가 대청 입구에서 들려왔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게냐?”
깜짝 놀란 아이들이 얼른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난장판의 중심에 서 있던 여동추는 상대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아이들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앞서 노인과 차를 마시던 청의중년인이었다. 그가 바로 학립관의 관주인 성조영(成照英)이었다.
성조영은 여동추와 양진양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동추야, 또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진양이 잘난 척을 해서…….”
여동추가 말끝을 흐렸다.
성조영은 소년 여동추가 호승심이 강하고 편협한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여동추를 꾸짖었다.
“시끄럽다. 네 자리로 돌아가거라.”
“예…….”
여동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성조영은 책상 옆으로 치워놓은 이백의 시가 적힌 화선지와 이제 막 논어의 글귀를 적은 화선지를 각각 챙기고는 양진양을 보았다.
“진양아, 나를 따라오너라.”
“예, 관주님.”
아이들은 관주가 진양만 데려가는 것을 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란을 피운 진양을 크게 혼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양진양은 성조영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관주님이 왜 나만 따로 부르시는 걸까? 혹시 여동추와 싸운 것 때문에 혼을 내려고 그러시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서러움이 복받치자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머니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이미 삼 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순식간에 그리움은 눈물로 변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성조영은 복도를 따라 걷다가 등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자 몸을 돌려 세우고 물었다.
“진양아, 왜 우는 것이냐? 동추에게 맞은 데가 아픈 것이냐?”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어린 양진양은 더욱 감정에 북받쳐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성조영은 당황하면서도 얼른 진양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무슨 일이 있었더냐?”
“절 혼내려고 데려가시는 거죠?”
“널 혼내다니?”
성조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양진양이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전 잘못한 것 없어요. 동추가…… 동추가 제 화선지에 먹물을 뿌려서…… 그래서 지겸이 나서서…….”
어린 양진양이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흐느끼며 말하자, 성조영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양진양이 왜 우는지 그 이유만큼은 이제 알 수 있었다.
그가 양진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진양아, 나는 너를 혼내려고 데려가는 것이 아니다.”
“정말…… 요?”
“정말이지.”
“그럼…… 절 왜 데려가시는 거예요?”
“네 재주를 보고 싶다는 분이 계시다. 널 그분께 소개시키려고 그런다. 그러니 이제 울지 마렴.”
그제야 양진양이 진정을 하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뺨에 묻은 먹물이 번지면서 얼굴은 더욱 시커멓게 더러워지고 말았다. 성조영은 그저 웃어 보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양진양은 성조영을 따라 복도 끝에 위치한 지객실로 들어갔다. 실내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작달막한 체구에 회색빛 도포를 입은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에 앉아 있는 그는 이마에 주름 두 가닥이 깊게 파여 있었고, 양쪽 입꼬리가 아래로 처져서 어딘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노인은 양진양을 흘깃 보더니 성조영에게 물었다.
“이 아이인가?”
“그렇습니다. 진양아, 인사 올려라. 이분은 천상련의 천보각주이시다.”
양진양은 천상련이 뭔지 천보각주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관주가 시키니 그저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릴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양진양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진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뜩이나 왜소한 몸집에 먹물까지 뒤집어써서 꼬질꼬질한 몰골이니 영 신뢰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대뜸 굵은 붓 한 자루를 내밀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들어라.”
“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붓을 들란 말이다.”
“예.”
양진양은 그렇잖아도 노인의 괴팍한 인상에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다짜고짜 호통을 치니 겁에 질려 얼른 붓을 잡았다.
노인이 탁자 위에 놓인 화선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글씨를 써보아라.”
“무슨 글을 쓸까요?”
“해서로 영(永) 자를 써보아라.”
양진양은 이제야 노인이 자신을 시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永)’ 자는 모두 여덟 개의 기본 필획, 즉 점, 가로, 꺾임, 세로, 갈고리, 제, 삐침, 파임을 모두 보여주는 글자다. 때문에 처음 서예를 배울 때는 이 글자로 연습을 많이 한다.
노인은 양진양이 ‘영’ 자를 쓰는 것을 보고 그 서예 실력을 가늠해 보려는 것이었다.
양진양은 이미 벼루에 먹이 갈아져 있는 것을 보고 붓을 들어 찍었다.
그리고 막 글씨를 쓰려고 할 때였다.
노인이 미간을 잔뜩 좁히더니 느닷없이 콧방귀를 뀌며 성조영을 냉랭하게 돌아보았다.
“자네, 집필법(執筆法:붓을 쥐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를 데려온 건가?”
하지만 성조영이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선 두고 보시지요.”
노인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다시 양진양을 바라보았다.
양진양은 엄지와 검지로 붓을 잡고 나머지 손가락을 붓대 안으로 말아 넣었는데, 이는 단구법(單鉤法)이라는 집필법이었다. 단구법은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큰 붓을 잡을 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한데 양진양이 들고 있는 붓은 여느 붓에 비해서도 큰 편이었다. 그럼에도 단구법으로 쥐고 있으니 제대로 된 글씨가 나올 리 없다. 이럴 때는 당연히 세 손가락으로 붓대를 잡는 쌍구법(雙鉤法)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성조영이 워낙 담담한 태도로 대꾸하니 노인도 우선은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양진양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성조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내어 글을 적었다.
먼저 점획을 찍고 가로획을 그은 다음 꺾은 획에 이어 세로획으로…….
큰 붓으로 해서체를 쓰는 만큼 필획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부었다.
이윽고 글자를 완성한 양진양이 붓을 내려놓고 노인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한데 노인이 두 눈을 부릅뜬 채 화선지의 글씨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양진양은 자신이 글씨를 너무 못 써서 그런 줄로 알고 잔뜩 목을 움츠렸다.
반면 노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양진양의 글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만 한 붓으로 이 정도 크기의 글씨를 적으려면 당연 쌍구법으로 쥐어야 할 것인데. 물론 집필법이 잘못된 만큼 필력(筆力)이 완전하진 못하다. 하나 이렇듯 골기(骨氣)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으니 이 아이의 서예 실력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뿐만 아니라 필획 하나하나가 단정하면서도 유려하게 흐르고 있어 글자에서 그 뜻마저 우러나오는 듯했다.
사실 노인으로서는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필체가 단정하고 장시간 글을 적어도 골기가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니겠나?
막상 비상한 재주를 가진 아이를 눈앞에 두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부족한 집필법이야 얼마든지 가르치면 될 터였다.
그때 성조영이 걸어와서 화선지 두 장을 내밀었다.
“이것도 이 아이가 적은 겁니다.”
노인이 펼쳐 보니 이백의 시와 논어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글씨는 초서에 가까운 행서체였다.
이백의 시는 필치가 자유롭고 부드러우며 마치 시냇물이 굽어 흐르듯 유려했다.
반면 논어의 글귀는 굳센 의지가 느껴지듯 필획 하나하나에 힘이 넘쳤다.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는 작자의 심상을 공감하는 것뿐만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수려한 필체로 글자에 뜻을 담아내니 보는 자가 절로 깨달아지는 바가 있겠구나. 그렇다면 이 아이야말로 내가 찾던 아이가 아닌가?’
그는 양진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가장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을 적어보아라.”
양진양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하고 싶은 것을 글로 적으라니 무슨 의도일까?
하지만 진양은 곧 깊은 생각을 거두고 주저없이 글자 하나를 적었다.
효(孝).
노인은 그 한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효’를 적었느냐?”
“‘효’ 자는 늙은[老] 부모를 아들[子]이 업고 있는 모습이잖아요. 만약 부모님이 계셨다면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업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절대 할 수 없어요.”
양진양이 울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노인과 성조영은 저마다 마음이 아려왔다. 양진양의 목소리도 서글프게 들렸지만, 무엇보다도 화선지에 적힌 ‘효’라는 글자에서 그 뜻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진양이 적은 글자를 보면 정말 노모를 업은 아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어린아이가 글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어원까지 알고 적절히 응용했으니 여간 기특한 일이 아니었다.
노인이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글자에 뜻을 담았느냐?”
양진양은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곧 대답했다.
“저한테 글을 가르쳐 주신 분은 아버지예요. 아버진 항상 글자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 그 속에 숨은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셨어요. 전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 쉬운 것들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아버진 글자를 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글자에 담긴 철학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했어요. 전 아직 철학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언젠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클클, 제법 영특한 녀석이로군. 네 아버지는 누구냐?”
“양, 문(文) 자, 정(正) 자입니다.”
진양의 대꾸에 성조영이 나서서 말을 보탰다.
“직례(直隷:현재의 안휘와 강소) 일대에서 서예가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다만 몇 년 전에 역모 사건에 휘말렸지요.”
“아버진 나쁜 일 하지 않았어요!”
양진양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노인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굳이 진양이 소리치지 않았어도 그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호유용 사건 이래로 황제는 무고한 사람을 수없이 죽여대고 있었다. 제법 이름난 권문세가라면 언제 어느 때 일족이 멸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양진양은 아마도 그 부모가 남몰래 빼돌려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이리라.
한참 동안 생각을 거듭하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 아이로 결정하겠네.”
노인의 목소리가 모처럼 밝아졌지만, 성조영의 표정은 오히려 착잡하게 굳었다.
영문을 모르는 양진양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