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0
신필천하(神筆天下) 20화
이쯤 되자 진양은 어쩌면 정말 자신이 버림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에 눈시울이 불거졌다.
‘아, 정말 혼자만 떠나셨구나!’
진양은 밀려드는 허탈감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감정이 한번 복받치니 눈물이 절로 주르륵 흘렀다. 이윽고 진양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 시진을 넘게 흐느끼고 나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됐다. 진양은 다시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막상 또 일어나니 당장 어디로 걸음을 내디뎌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진양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사당을 나오는데, 마침 지붕 위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땅 꺼지겠구나! 웬 한숨을 그리 쉬느냐?”
“어르신!”
진양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임패각이 훌쩍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그가 휘파람을 불자 숲속에서 흡혈마가 타박타박 걸어 나왔다.
“흠. 용케도 신의를 지켰군.”
“어르신은 알고 계셨지요, 그들이 쫓아올 것이라는 걸요?”
“물론이지. 십지독녀는 오래전부터 내 꽁무니를 쫓아다녔으니까.”
“너무해요. 미리 말씀해 주셨더라면 저도 놀라지 않았을 텐데.”
“흥! 미리 말해주면 네놈의 인성을 내가 어찌 시험해 볼 수가 있겠느냐? 그래도 네놈이 혼자 나타났으니 내 너를 믿고 시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럼 왜 이제야 나타나신 거예요?”
“네놈이야 모르겠지만 그 악녀가 네놈을 반 시진 가까이 지켜보다가 돌아갔다. 곧장 서쪽으로 가더구나. 대체 뭐라고 말을 했던 게냐?”
진양은 내심 깜짝 놀랐다. 분명히 주위를 잘 살펴가며 혼자만 냉큼 달려왔는데 어느 틈에 미행을 당했단 말인가?
진양이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임패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등에 올랐다.
“잘했다. 하지만 그 악녀가 네 거짓말을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일 게다. 오늘 밤은 쉬지 않고 가도록 하자꾸나.”
“네.”
두 사람은 다시 동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직례 지역으로 들어간 임패각과 양진양은 부양현(阜陽縣)에 이르러서 말 한 필을 더 사들였다. 그러고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동남 쪽으로만 달려갔다.
강행군을 한 탓인지 임패각의 안색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이윽고 경정산(敬亭山)에 다다른 두 사람은 숲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데 경사가 점차 급해지고 길이 험난해지자 진양의 말이 제대로 따라오질 못했다.
결국 진양은 말을 숲에 풀어주고 두 사람은 흡혈마만 데리고 산길을 올랐다.
길도 없는 숲속을 가지를 쳐가며 나아가기도 하고, 절벽을 바로 옆에 두고 비좁은 샛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흡혈마는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따라왔다.
이윽고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어느 동굴이었다.
동굴은 깎아지른 절벽 중턱쯤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낭떠러지를 옆에 끼고 샛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동굴은 제법 널찍한 크기였다.
“어떠냐? 한때 강호를 유람하다가 발견한 곳이다. 이곳이라면 누가 오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가 있을 게야. 그 악녀가 우리를 바짝 쫓아오고 있으니 당분간 이곳에 머물도록 하자.”
말을 마친 임패각은 또 격하게 기침을 했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시뻘건 핏덩이가 입에서 나왔다. 그는 동굴 한쪽에 모래 구덩이를 판 다음 그곳에 피를 묻었다.
“내가 각혈을 하게 되면 이곳에 뱉을 테니 주의하거라.”
“예. 그런데 만약 그 악녀가 샛길을 막아 버리면 어떡해요? 여기서 몇날 며칠을 지내다간 굶어 죽고 말 거예요.”
“그것도 크게 염려할 것 없다. 샛길을 따라 봉우리로 올라가면 제법 너른 평지가 있다. 그곳에 사냥감은 충분하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동굴 입구를 지나는 길밖에 없으니 우리는 이곳으로 오르는 샛길만 잘 막으면 돼. 그리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면 물이 고여 있으니 먹고 씻을 일도 걱정 없는 게지.”
“정말 요새나 다름없네요.”
진양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날 저녁 임패각이 좌선을 한 채 운기하는 동안, 진양은 숲으로 나가서 사냥을 했다.
비록 제대로 된 무공은 익힌 적이 없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내가무공을 익힌 덕분에 진양은 어렵지 않게 토끼 두 마리를 사냥해 올 수 있었다.
단도로 토끼 가죽을 벗긴 후 불을 피우고 굽기 시작하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운기행공 중이던 임패각도 눈을 뜨고는 맛있게 구워진 토끼 고기를 보았다.
“제법이구나.”
두 사람은 배가 부르도록 토끼 구이를 먹어치운 다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강행군을 한 덕분에 두 사람은 오랫동안 숙면을 취했다.
동굴 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사람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없었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해서 먹었고, 몸이 더러워지면 동굴 안의 샘에서 씻었다.
진양은 임패각에게 몇 번이나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말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혼뜨검만 날 뿐이었다.
임패각은 날이 흐를수록 수척해져 갔다. 해독약을 구하지 못했으니 몸 전체에 독이 퍼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도 그가 둔도백마라고 불리는 무림 고수였으니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양은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아서 동굴 입구로 걸어 나왔다.
하늘에 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으니 절벽 아래로 산세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양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는 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바로 자양진경에 적힌 글귀들이었다. 천상련에서 지내는 동안 자양진경의 글을 매일 필사했기 때문에 진양은 모든 구절을 정확히 암기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바닥에 글을 써가다 보니 이내 재미가 붙었고, 진양은 잡념을 잊고 글쓰기에만 집중하게 됐다.
한편 동굴 안쪽에서 깊이 잠들어있던 임패각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는 잠에서 깼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동굴 입구를 바라보니 진양이 쪼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한데 진양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진양아,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임패각이 소리쳐 물었지만, 진양은 듣지 못한 듯 바닥에 낙서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거듭 소리쳐 부르던 임패각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진양에게 다가갔다. 그는 진양을 부르는 대신 가만히 그 곁에 가서 진양이 쓰는 글귀를 바라보았다.
순간 임패각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아이가 다른 재주는 없어도 글씨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는구나! 이것이 열여섯 살 소년의 필치란 말인가!’
진양은 나뭇가지를 쥐고 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한 줄의 글귀를 적고 나면 다시 그 위에 덮어쓰곤 했다. 그럼에도 그 필체의 흐름이 워낙 유려하면서도 분명하여 한눈에 글자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묵묵히 바라보던 임패각은 이제야 진양이 어떻게 내공을 쌓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서예 이론에 불과한 글귀지만, 진양은 분명 이 글을 적으면서 내공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가면서 진양은 그 글씨에 맞는 심상을 떠올리고, 또한 거기에 맞는 움직임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내공을 운기하고 있었다.
진양이 적는 글귀 중에는 우주의 진리를 아우르는 요체가 숨어 있으니, 정확한 필치로 글자를 적는 자만이 익힐 수 있는 경지이리라.
진양은 어찌나 깊이 빠져 있는지 임패각이 옆에서 반 시진 가까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임패각은 한참이 지나서야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누웠다.
‘저 아이의 재주가 저토록 비상하니 그대로 썩히는 것도 아깝구나. 게다가 심성이 착하고 신의를 지킬 줄 아는 것을 보면 훗날 악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제자를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무공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어쩌면 좋을까?’
임패각은 몸을 뒤척이며 생각하다가 곧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는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그러면 되겠구나.’
그는 다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임패각이 눈을 떴을 때, 진양은 동굴 입구에서 쓰러진 채 잠들어있었다. 아직까지도 손에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걸 보니 어젯밤 내내 글을 쓰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든 모양이다.
임패각은 진양의 손목을 잡고는 맥을 짚어보았다.
‘흐음, 이 아이가 익힌 내공은 참으로 독특하군. 평소에는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이니. 하지만 이것 또한 이 녀석이 내공을 활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은 내공을 익히는 법부터 알려주어야겠군.’
기본적으로 무공을 사용하려면 사지백해에 녹아들어있는 내기를 단전에 모을 줄 알아야 한다. 진양은 누구보다도 심후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단전에 모을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한 시진 정도 흐른 후 임패각은 진양을 깨웠다.
“그만 일어나거라! 언제까지 자빠져 잘 생각이냐?”
느닷없는 호통에 진양이 화들짝 놀라서 깼다.
“아, 어르신, 죄송합니다.”
“마을로 내려가서 문방사우를 사가지고 오너라.”
“예? 마을에 가서요? 갑자기 왜…….”
“이 녀석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말이 많구나! 하기 싫으면 썩 꺼져!”
“아니에요. 사 올게요.”
“자, 돈은 여기 있다. 빨리 다녀오너라.”
진양이 굽실 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마침 직례 지역은 문방사우의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진양은 서둘러서 필요한 것들을 사왔지만, 워낙 산세가 험하다 보니 다시 동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사 왔어요, 어르신.”
“네 녀석이 너무 늦은 바람에 오늘은 할 수 없게 됐다. 내일 하자.”
진양은 영문도 모른 채 고분고분 대답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임패각은 다시 진양을 불렀다.
“어제 네가 바닥에 쓴 글씨를 보니 제법 필체가 봐줄 만하더구나. 내가 악필이니 너에게 글을 좀 적게 해야겠다.”
“무슨 글인지요?”
“내가 일평생 갈고닦은 무공을 책으로 만들어볼까 한다. 내가 불러주는 대로 너는 받아 적으면 된다.”
“그럼 저한테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시끄럽다! 나는 아무에게도 내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을 거야! 너는 내 제자가 아냐!”
“예…….”
진양이 시무룩하게 대답하는데, 임패각이 흘깃 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네 녀석이 너무 똑똑해 스스로 깨우친다면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내가 너를 일부러 가르쳐 주진 않을게다.”
그 말에 진양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머리가 좋은 진양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평생 제자를 두지 않기로 했으니 드러내 놓고 무공을 가르쳐 주진 못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가르쳐 주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 아닌가!
진양이 먹을 갈면서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책을 만들려고 하세요?”
“이제 나는 독이 발작해서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게다. 그럼 내가 익힌 무공이 영원히 사라질 테니 그게 아쉬워서 그런다.”
“어르신은 돌아가시지 않을 거예요. 제가 보살펴 드릴게요.”
“흥! 네까짓 것이 날 어떻게 보살핀다고?”
임패각은 차갑게 비웃었지만, 내심 진양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임패각은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진양은 그 구결을 받아 적었다.
별로 많은 구결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구결을 알려주면 진양이 충분히 익힐 시간이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임패각은 하루에 몇 안 되는 구결만을 불러주었다.
진양은 그렇게 처음으로 임패각을 통해 내공을 다스릴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