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1
신필천하(神筆天下) 21화
임패각이 불러주는 구결에 따라 토납술을 이행해 보고 운기행공을 하자 양진양은 무서운 속도로 내공이 증진했다. 그렇잖아도 자양진경을 통해 얻은 내공이 심후한데 그 힘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
내공이 증진되자 진양은 자연스레 자양진경이 훌륭한 무학의 경전임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무공을 익혔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이제 보니 자양진경은 정말 훌륭한 경전이 아닌가. 더구나 글자를 통해 내공을 쌓는 방법이니 내게 딱 맞는 수련 방식이다.’
사실 진양이 여타 무공 초식명을 글자로 적어보기만 하고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양진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양진경에는 모든 글자의 이치와 철학을 꿰뚫는 요결이 적혀 있었다. 이 역시 자양진경을 필사해야만 비로소 깨우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자양진경은 읽어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깨우치는 경전이었다.
원래 필치가 우수하고 글자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진양은 누구보다도 빨리 자양진경의 요결을 파악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이 쌓이고 무학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 년의 세월 동안 천하 각종 무공을 필사했으니 은연중에 무학의 요결을 파악하는 능력이 향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양진경은 여느 내공심법처럼 오로지 내공과 무학의 요결밖에 없었다. 실제로 싸움이 났을 때 공방전에 쓸 수 있는 초식은 일초반식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자양진기는 몸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니, 진양이 그 내기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어쨌거나 진양은 임패각을 통해 내공이 더욱 증진됐고, 그 기운을 다스릴 줄 알게 됐으며, 나중에는 임패각이 일평생 익혔던 지둔도법(遲鈍刀法)까지 익힐 수 있었다.
내공을 다스릴 줄 알게 되자 진양은 더욱 훤칠하게 자랐다.
그렇게 일 년여가 흘렀고, 햇수로는 두 해가 지났다.
그사이에 부쩍 성장한 진양은 이제 웬만한 어른만큼 큰 키였다. 게다가 체격도 다부지고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보는 사람마다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생각도 자못 깊어져 말투도 조금은 어른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어느 날 임패각은 기침을 심하게 하고는 자리에 몸져누웠다.
날이 갈수록 임패각은 독상이 심해지기만 했다. 그의 말대로 살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어르신, 아무래도 십지독의 해독약을 구해야겠습니다. 안 그러면 어르신이…….”
“클클. 해독약을 어디서 구한다고? 네놈이 만들 재주라도 있더냐?”
“십지독녀에게 가서…….”
“흥! 그 악녀에게 구걸을 하자고? 절대 안 될 말이지. 그런다고 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다간 어르신의 몸이…….”
“시끄럽다!”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버럭 소리친 임패각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어느새 하늘은 잔뜩 어두워져 있었고,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임패각은 입구에 주저앉더니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 산세 풍경을 하릴없이 내려다보았다. 그가 문득 처연한 목소리로 시 한 소절을 읊었다.
바로 이백의 정야사(靜夜思)였는데, 달을 보다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의 시였다.
임패각은 이 시를 자주 읊곤 했다.
한데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처연한지 듣고 있던 진양마저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
임패각이 다시 그 시를 읊을 때, 진양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동굴 벽에다가 정야사를 초서체로 받아 적어나갔다. 구불구불한 글씨가 달빛처럼 새겨지더니 어느새 먼 고향으로 아득히 날아가듯 이어졌다. 마치 임패각의 입에서 흘러나온 시 구절이 고스란히 날아와 벽에 새겨진 듯했다.
이때쯤 진양은 이미 내공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경지에 이르러서 나뭇가지를 들고도 암벽에 글씨를 얕게나마 음각할 수 있었다.
임패각은 등 뒤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그는 진양의 필체를 보더니 내심 감탄해마지 않았다.
진양의 글씨를 보고 있자니 조금 전 치솟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가 다시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평평한 바위 위에 짚더미를 깔아서 만든 침상이 있었다.
“양아, 이리 와서 앉아보아라.”
“예, 어르신.”
“너는 앞으로 어찌 살 것이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이제 독상이 깊어져 며칠 살지 못할 것 같다. 너 홀로 살아남으면 이제 네 길을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
양진양은 임패각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깊은 정을 느끼자 새삼 눈시울이 불거지며 목이 메었다.
진양이 우물쭈물하자 임패각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자, 말해보아라. 너도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 아니냐? 네가 이루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그게 무엇이더냐?”
임패각이 진지하게 물어오자, 진양도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꿈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큰 서예당을 차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또 서예를 통해 진리와 도를 깨우치게 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 전에 저부터 그만한 능력을 길러야겠지요.”
“클클. 너다운 생각이다. 한데 어째서 무공을 익히려고 했더냐?”
“강해지지 않으면 꿈을 이루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고, 그동안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무공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임패각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너는 네가 익힌 무공을 너 자신을 지키는 데 써야 할 것이다. 함부로 과시하면 네 꿈과도 거리가 멀어질 게야.”
“예, 어르신.”
임패각은 눈을 뜨고 다소 허망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여태껏 많은 악인들을 멸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이 강호에는 간악한 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오늘에서야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소생이 불초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남을 개선시키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악을 멸하는 것보다 더욱 힘든 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악을 멸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지만, 내가 선을 행하면 내게 감화된 다른 이가 또 선을 행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악을 멸하는 것에만 여념이 없었다. 정작 나 자신을 돌보진 않았다. 그것이 가장 후회되는구나.”
진양은 임패각의 말에 절로 숙연한 기분이 들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임패각이 시선을 내려 진양을 바라보았다.
“양아, 너는 스스로 협의를 지키는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 은혜를 입으면 배로 갚을 줄 알아야 하고, 네가 베푼 것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너에게 감화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또 너를 닮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네가 원하는 꿈도 이룰 수 있을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만약 내가 죽기 전에 십지독녀가 나타나면 네가 그녀를 막아야 한다. 혹시 내가 죽고 그녀가 너마저 죽이려거든 내가 자주 읊는 정야사의 마지막 두 구절을 그녀의 부채에 적어주거라. 그리고 흡혈마는 네가 보살피도록 해라.”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에 진양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르신,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와 함께 마을로 가서 약이라도 지어보지요.”
“아서라. 십지독을 삼류 의원이 치료할 수 있을 듯싶으냐? 십지독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극독이다. 괜한 수고 하지 말고 너는 내가 불러주는 구결이나 잘 받아 적어라.”
“예…….”
나흘 뒤 진양은 지둔도법을 모두 받아 적었다. 물론 자양신공을 익힌 진양은 지둔도법의 요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지둔도법은 이름과 달리 매우 민첩하고 빠른 무공이었다. 하지만 지둔(遲鈍)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겉보기에는 몹시 느리고 우둔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상대의 이목을 속여 느림 속에 빠름을 추구하고 우둔함 속에 영악한 심리가 숨어 있으니, 그야말로 도공(刀功)의 절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패각은 정식으로 제자를 두지 않기 때문에 절대 진양에게 자신의 둔도를 쓰게 하지 않았다. 해서 진양은 언제나 붓대를 들고 지둔도법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난 날, 잠을 자던 임패각이 눈을 뜨고는 진양을 불렀다.
“양아, 그들이 왔구나. 나가서 좀 맞아야겠다.”
“그들이라니요?”
“날 찾아올 사람이 그 악녀 말고 또 있겠느냐?”
그 말에 진양은 덜컥 겁이 났다.
일 년여 전에 만났던 십지독녀는 정말 무서운 실력을 보였다.
그때도 자양신공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손길 한 번에 맥을 못 추지 않았던가?
그런데 겨우 일 년여가 지난 오늘 그녀를 상대할 수 있을까?
그때 과연 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직 그들이 동굴에 다다르려면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내공이 심후해진 진양은 멀리서 들린 소리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임패각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너무 두려워할 것 없다. 내 보기에 네가 가진 내공은 매우 뛰어난 수준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실패보다도 무서운 게 바로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예, 어르신.”
임패각의 말에 용기를 얻은 진양이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8. 아, 애증(愛憎)이여
양진양이 입구로 나와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이윽고 두 사람이 절벽으로 난 샛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 샛길은 말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였기 때문에 무공을 겨루기에는 매우 위험한 장소였다.
진양을 본 매지향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일 년여 사이에 훌쩍 자란 진양을 잠깐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진양을 알아보고는 눈썹을 성큼 추켜올리며 차갑게 소리쳤다.
“이제 보니 그 영악한 꼬마로구나! 감히 네놈이 나를 속여?”
진양이 빙글 웃었다.
“속이다뇨. 전 정말로 어르신이 그때 서쪽으로 간 줄 알았습니다.”
“닥쳐라! 오늘만큼은 날 속이지 못할 것이다! 둔도백마는 안에 있느냐?”
“글쎄요. 안 계신다고 해도 믿지 않으실 것 같고…….”
진양이 능글맞게 대꾸하자, 약이 바짝 오른 매지향이 손을 매섭게 뻗어왔다.
“감히!”
“엇!”
깜짝 놀란 진양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단 일 수에 불과했지만 매지향은 진양의 몸놀림이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방금 저건 지둔도법의 보법인 것 같은데?’
의구심이 든 그녀는 다시 한번 오른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쥘부채까지 길이가 더해졌다.
진양은 더 물러갔다간 동굴 입구까지 다다를 것 같기에 얼른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몸을 눕혔다. 한데 그 모습이 마치 절벽 밖으로 떨어질 것처럼 아찔했다.
“앗!”
매지향의 뒤에서 지켜보던 소담화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다음 순간 진양의 몸이 거짓말처럼 일어서더니 다시 샛길 위에 중심을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강시가 관절을 구부리지 않고 누웠다가 일어서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매지향이 부채를 거두고는 차갑게 힐난했다.
“흥! 일평생 제자를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더니 결국 둔도백마가 그 맹세를 깨고 네놈을 제자로 받아준 모양이군!”
그러자 동굴 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누가 내 제자란 말이야? 나는 제자를 받지 않아! 콜록콜록!”
내공을 섞어 소리친 탓인지 임패각은 격하게 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