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2
신필천하(神筆天下) 22화
그의 목소리를 들은 매지향의 얼굴이 묘하게 들떴다가 이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진양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두 분은 어떤 악연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서로를 죽이려고 한단 말인가? 더구나 지금 십지독녀의 표정에는 마치 안타까워하는 기색마저 서려 있지 않았나?’
하지만 이내 매지향은 차갑게 조소했다.
“제자도 아닌데 지둔도법의 보법까지 쓸 줄 아는 이 녀석은 누구죠?”
그녀 역시 내공을 섞어서 소리쳤기 때문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창공에 가득 울렸다.
동굴 안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알 게 뭐야? 나는 그 아이를 가르친 적이 없어, 그 녀석이 훔쳐 배운 게지.”
매지향이 고개를 돌려 진양을 보았다.
“정말이냐?”
“맞습니다. 어르신은 제게 무공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둔도법을 두 눈으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어디서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정말이에요.”
진양이 거듭 강조하자 매지향이 다시 동굴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 당신이 이 아이를 가르치지 않았단 말인가요?”
“글쎄, 그렇다니까! 그 녀석은 내가 구결을 읊을 때마다 훔쳐 들은 것밖에 없어! 나는 그 녀석에게 한 번도 도법을 시범 보인 적이 없단 말이야!”
매지향이 가만 들어 보니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둔도백마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매지향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이제 둔도백마가 저 안에 있는 걸 알았으니 썩 비켜라!”
“제가 비키면 어쩔 생각이시죠?”
“몰라서 묻느냐? 나는 그를 죽일 생각이다.”
“그럼 비킬 수 없습니다.”
“뭣이?”
“제가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매지향이 눈썹을 성큼 추켜올리고는 바라보았다.
진양은 동굴 안쪽을 힐끔 쳐다본 다음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서 물었다.
“해독약을 제게 주실 수 없나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매지향은 뜬금없는 요구에 두 눈을 멀뚱멀뚱 떴다. 그러다가 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너는 아주 재미있는 아이구나. 그래, 내가 너에게 해독약을 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해주겠느냐?”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지요.”
“흥! 너 따위를 어디에 쓴다고? 헛소리 말고 비켜라!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해독약을 줄 것 같으냐?”
“말씀드렸다시피 그렇다면 비킬 수 없습니다.”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매지향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서슬 퍼런 표정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독수를 써서 진양을 공격할 듯했다.
그때 동굴 안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클클. 그 아이가 고집이 좀 세다네. 그렇다고 설마 무림의 고수인 십지독녀가 한낱 소년을 괴롭히고 죽일 텐가? 그럼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 암!”
매지향이 코웃음을 쳤다.
“끝내 비키지 않는다면 죽일 수도 있겠죠. 여기서 죽인다고 한들 누가 알기나 할까?”
“허어,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뭘 말이죠?”
“그 아이는 내가 직접 가르치진 않았지만, 내게서 무공을 훔쳐 배웠지. 그래서 최소한의 예의로 날 위해서 나섰으니 그쪽에서도 제자를 내보내는 것이 어떻겠나? 두 아이가 싸워서 지는 쪽이 곱게 물러나도록 하지. 이쯤하면 결과야 어떻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을 일은 없을 걸세.”
매지향이 어깨 아래로 늘어진 팔색조의 붉은 꼬리 깃털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더구나 두 해 전에 만났던 진양은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였다. 겨우 일 년여 만에 성장해 봐야 얼마나 성장했겠는가?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제자인 소담화도 분명 성장을 했다. 소담화는 이제 어지간한 정도 문파의 후기지수와 겨루어도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좋아요. 그럼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는 조건이에요?”
“이를 말인가. 양아, 네가 패하면 무조건 저들에게 길을 열어주도록 해라.”
“하지만 어르신…….”
“어허! 나를 신의도 지키지 못하는 졸렬한 놈으로 만들 셈이더냐? 콜록콜록!”
역정을 부리던 임패각이 다시 격하게 기침을 했다.
진양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패한다면 길을 열어드리지요.”
진양이 약속하자 임패각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 샛길은 매우 위험해. 혹시라도 싸우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으니 한 가지 방식을 정하세.”
“그건 또 뭐죠?”
“하루에 딱 한 번만 겨루는 거야. 단, 두 사람이 합해서 열 초식을 넘기지 않도록 하세. 그 이상 싸웠다간 두 사람 모두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매지향은 가만히 생각을 굴렸다.
십 초라는 제한이 매우 짧기는 했지만, 그녀도 소담화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 비좁은 길은 두 사람이 싸우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두 사람 모두 추락할 위험이 다분했다.
매지향이 이내 청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클클. 그럼 언제 겨룰 텐가?”
“말이 나온 김에 지금 겨루도록 하죠. 만약 오늘 승부가 나지 않는다면 내일부터는 정오에 이곳에서 겨루도록 하구요.”
“클클. 좋아. 그럼세.”
말을 마친 매지향은 소담화를 데리고 샛길을 따라 돌아갔다. 제자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줄 요량이었다.
잠시 후 소담화가 앞장서서 걸어왔다.
진양은 내심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담화 역시 안 본 사이에 부쩍 성숙해져 있었다. 일 년여 전까지만 해도 앳되고 어린 티가 났는데, 지금은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굴곡있는 몸매와 깊고 맑은 두 눈망울에서는 자못 요염한 자태마저 느껴졌다.
양진양이 양손을 맞잡고 예를 차렸다.
“오랜만이오, 낭자.”
두 사람 모두 일 년여 사이에 부쩍 성장해 있었으므로 진양의 인사는 겉보기에 전혀 어색할 것이 없었다.
소담화가 차갑게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녀는 일 년여 전에 객점에서 당한 수모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공도 할 줄 모르는 진양에게 된통 당하지 않았던가?
오늘에야말로 그 수모를 갚아주고 말리라.
소담화는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비탈길이 매우 비좁았으므로 큰 동작을 취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도합 열 초식 이상 겨룰 수 없었기에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진양 역시 붓대를 들고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임패각은 자신의 둔도를 결코 빌려주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진양은 도를 대신해서 붓대를 집어 든 것이다.
소담화가 차갑게 비웃었다.
“그깟 붓을 들고 어쩌겠다는 거예요?”
그동안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그녀 역시 함부로 하대를 하지는 않았다.
진양이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우리 아버지는 늘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하셨지요.”
“흥!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요!”
“물론이오.”
진양의 대답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소담화가 훌쩍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마치 흐르는 급물살을 타고 떨어지듯 진양에게 쇄도했다.
소담화의 검공은 바로 십절류(十絶流)라는 것이었는데, 모두 열 가지의 절초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각 초식마다 변초와 허초가 무수히 많았기에 열 가지 검로(劍路)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편 진양은 상대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눕히며 붓을 들어 올렸다. 진양의 몸이 강시의 그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넘어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둔도법의 특징이었다.
까앙!
검과 붓대가 부딪치자 청명한 금속성이 울렸다.
진양은 두 발이 저절로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가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흥! 지둔도법이 아니라 강시도법(彊屍刀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
소담화가 비웃으며 다시 이 초를 전개했다.
낙수유검(落水流劍)에 이은 풍설유검(風雪流劍)이었다.
마치 어지럽게 춤을 추듯 움직이는 검날에서 빛이 번쩍이며 쏟아지니 그야말로 눈보라가 이는 듯했다. 눈앞이 어지러워지자 검이 어디에서 날아올지 감을 잡기조차 힘들었다.
진양은 심후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고 뛰어난 도공을 익히긴 했지만, 역시 실전은 많이 부족했다.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보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동굴 안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바람이 매서우면 멎게 해야 할 일이 아니더냐!”
그 순간 진양의 뇌리에 한 가지 초식이 스쳐 지나갔다.
진양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붓을 들어 전방으로 휘저었다. 바로 풍우정헐(風雨停歇)이라는 초식이었다.
시전자의 근방으로 바람조차 샐 틈이 없도록 도를 뻗어내는 것인데, 과연 초식을 전개하자 눈을 부시게 하던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진양이 휘젓는 팔과 붓이 그 빛을 교묘하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진양은 가슴으로 짓쳐드는 검을 확인하고는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지둔도법의 보법은 그야말로 이 좁은 길에서 싸우기에 최적이었다.
마치 그의 몸이 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하다가 이내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더니 소담화의 옆구리를 찍어갔다.
깜짝 놀란 소담화가 얼른 몸을 물리며 검을 돌려 세웠다.
까앙!
다시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한데 이번에는 진양이 공력을 너무 많이 주입한 탓인지 붓대가 그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바스락 부서지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담화가 일장을 휘둘러 왔다.
진양도 얼른 가슴 앞으로 손을 모으며 장을 받았다.
퍼엉!
응축된 기가 폭발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창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양진양과 소담화는 서로 가볍게 물러나며 뒷걸음질을 쳤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자존심 때문에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면 분명 내상을 입었을 터이다.
두 사람이 잠시 거리를 두게 되자, 뒤에서 지켜보던 매지향이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비겁하군요! 제자도 아니라면서 초식까지 일일이 알려주다니!”
앞서 임패각이 소리친 속뜻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임패각은 능청을 떨며 모른 척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초식까지 지적해 줬다고? 난 그저 바람이 차기에 말한 것뿐일세.”
“그런 식으로 한다면 좋아요! 화아, 섬전유검(閃電流劍)으로 나가거라!”
“네, 사부님!”
소담화가 낭랑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왼손과 왼발을 앞으로 길게 내밀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뒤로 당겨 구부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자세였다.
동굴에서 다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것 봐! 그렇다고 대놓고 초식을 알려주는 게 어딨나? 게다가 나는 여기서 그 애들이 싸우는 게 보이지도 않는다고!”
“전 혼잣말로 중얼거린 거예요. 정 탓하려면 내 제자가 귀가 너무 밝아서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은 것이나 탓하세요.”
“흥! 순 억지군! 완전히 억지야!”
그러는 사이 소담화가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진양에게 날아왔다. 그녀의 검봉(劍鋒:칼끝)이 마치 착시현상을 일으키듯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순간적으로 막강한 공력을 주입한 탓에 검날이 떨고 있는 것이다. 이 검에 당하면 몸 전체에 공력이 흘러 짜릿한 아픔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되는데, 바로 섬전유검이라는 절초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진양은 얼른 몸을 눕히며 손가락으로 검날을 튕겼다.
따앙-!
이번에도 청명한 소리를 울리며 검날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진양의 몸은 마치 뇌전이 흐르듯 전신이 짜릿짜릿하게 아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