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3
신필천하(神筆天下) 23화
“크읍!”
진양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전신의 혈맥이 뒤흔들리는 느낌에 중심을 잡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때 곧바로 소담화가 진양의 다리를 노리고 검을 뻗었다.
때마침 동굴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철돈도약(鐵豚跳躍)!”
진양은 거의 무의식중에 임패각이 소리친 초식을 펼쳤다. 철돈도약은 말 그대로 돼지가 높이 뛰어오르는 형상을 상상해서 붙인 초식명이다.
지둔도법은 대체로 둔한 움직임 속에서 날렵함이 깃들어있었기 때문에 초식명 또한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진양은 곧바로 모든 공력을 발바닥에 모아 격발시켰다. 그러자 그는 지극히 적은 움직임으로도 허공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본래는 도약과 동시에 도를 후려야 했지만, 진양은 지금 무기를 들지 않은 상태이니 마땅히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다시 임패각의 외침이 들렸다.
“질비고준(跌?股?)!”
이 역시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어엿한 지둔도법의 초식명이었다.
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는 형상을 본떠 만든 것인데, 원래는 도를 엉덩이 아래에 깔고 앉듯이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진양은 현재 도를 들고 있지 않으니, 양손바닥을 내뻗으며 장력을 일으켰다.
마침 허방을 내찔렀던 소담화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진양을 보고는 얼른 허리를 젖혔다. 그리고 급한 김에 왼손만 들어 장력에 맞섰다.
퍼펑!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소담화가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갔다.
그러자 매지향이 매섭게 소리쳤다.
“흥! 야공유성(夜空流星)!”
순간 소담화가 옆의 절벽을 따라 보법을 밟아 타고 올라갔다. 본래 야공유성은 신법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허공으로 도약하면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지형을 이용한 변초였다.
이내 정점까지 오른 소담화가 바람을 가르듯 떨어졌다.
쒜에엑!
임패각은 여태까지처럼 그 소리만 듣고도 상황을 능히 짐작했다.
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철우격산(鐵牛擊山)!”
순간 진양이 공력을 양손에 주입시키면서 쌍장을 뻗어냈다. 등을 한껏 구부린 그의 모습은 정말로 철우(鐵牛)가 야산을 들이받을 듯한 기세였다.
“하앗!”
그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지면서 장풍이 날아갔다.
동시에 소담화 역시 기합을 터뜨리며 검풍을 날렸다.
퍼엉!
두 사람이 외압에 밀리듯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매지향은 놀란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내공이 순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 년여 사이에 이토록 무공이 발전하다니. 방심했구나. 과연 임패각이다.’
그녀가 차갑게 소리쳤다.
“다시 섬전유검!”
소담화가 곧바로 검을 내찌르며 달려들었다.
분명 같은 섬전유검이었는데, 이번에는 찔러오는 방식이 사뭇 달랐다.
변초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진양이 당황하면서 연신 뒷걸음질로 물러나는데, 동굴 안에서 다시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멈춰라!”
그 목소리가 어찌나 웅장하고 위풍당당한지 소담화는 저도 모르게 움찔 떨고는 검을 거두고 말았다. 도무지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매지향도 잠시 깜짝 놀라서 말을 잃고 있는데, 마침 동굴 안에서 격한 기침 소리가 이어지자 그녀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소리쳐 물었다.
“무슨 수작이죠? 이제 직접 나서려는 건가요?”
“쿨럭쿨럭! 직접 나서긴. 우리가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가?”
“뭘 말인가요?”
“하루에 열 초식만을 겨루자고 말일세. 이미 두 아이가 열 초식을 넘겼으니 승부는 내일로 미루도록 하지.”
그 말에 매지향이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열 초식을 겨룬 것이다.
처음에는 진양이 소담화에게 오초지적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물론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진양으로서는 소담화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만약 아무도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만 싸웠더라면 오 초도 가지 못해 진양이 패했을 게 자명했다. 무공은 절대로 내공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패각이 그에게 초식을 지적했고, 그녀도 소담화에게 초식을 알려주었다.
결국 두 아이들의 싸움은 임패각과 매지향의 초식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승부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흘렀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소담화가 이겼을 것이다.
한데 기분이 좋지 않다.
왜일까?
그렇다. 진양은 제대로 된 도법이 아니었다. 도도 들지 않고 도법을 쓴 것이다. 처음에는 붓을 들었고, 붓이 없을 땐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장력을 섞었다. 말이 쉽지 이건 무공에 어지간히 숙련된 사람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소담화와 용호상박(龍虎相搏)을 이루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양진양의 재능이 생각보다 뛰어다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패각의 지둔도법이 딱히 병기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무공이라는 것이다.
매지향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이미 약속을 했으니 먼저 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화아, 그만 가자!”
그제야 진양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는 포권을 취했다.
“소 낭자의 무공에 감탄했습니다.”
“흥!”
소담화는 콧방귀를 뀌고는 몸을 홱 돌렸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자 진양은 긴장이 풀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동굴로 돌아왔다.
임패각이 껄껄 웃었다.
“수고했다. 그걸 싸웠다고 바로 주저앉느냐? 한심한 놈.”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웠다구요.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언젠간 죽을 목숨. 나를 위해 죽게 되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느냐? 하하하!”
임패각은 농담을 하면서도 내심 진양을 기특하게 여겼다.
사실 매지향은 진양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진양은 오히려 재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다만 어떤 무공이든 글자를 써서 익히고 나면 누구 못지않게 이해력과 응용력이 빨랐던 것이다. 이는 자양진경의 신묘함과 타고난 서예 실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날 매지향과 소담화는 정말로 약속을 지켜 동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매지향과 소담화는 매일 정오만 되면 진양과 겨루기 위해 동굴 앞으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진양은 절벽 위의 좁은 길까지 나아가서 소담화와 대결을 펼쳤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싸움 방식은 거의 임패각과 매지향의 초식 대결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각각의 무공으로 정점에 도달한 고수들이었기에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십 초라는 짧은 제한을 두고 승패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어불성설이었다.
하나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무공 대결은 치밀해졌기 때문에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결이 끝나고 나면 진양은 언제나 녹초가 된 몸으로 동굴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날, 진양이 이번에도 승부를 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한데 임패각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는 얼굴빛이 노랗게 변해서는 연신 기침을 해댔다. 기침을 할 때마다 토해지는 피가 더욱 많아졌다.
매지향과 소담화가 길목을 막고 있으니 마을에 내려가서 약을 구해오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르신, 아무래도 약을 좀 지어와야겠습니다. 해독약은 아닐지라도 증세를 좀 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필요 없대도.”
“하지만 이러다간 제가 저들을 이기기도 전에 어르신이 먼저…….”
양진양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임패각은 다시 쏟아지는 기침을 참지 못해 콜록거리면서 손을 내젓고는 돌아누웠다.
진양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가 비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매지향과 소담화가 보였다.
매지향이 진양을 돌아보고는 곱게 뻗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내려왔지? 둔도백마가 더 겨루어도 된다고 하더냐?”
“그게 아니라 길 좀 열어달라고 부탁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째서?”
“어르신이 위독하십니다. 이대로는 제가 소 낭자와 승부를 짓기 전에 어르신께서 큰 화를 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의 말에 매지향의 표정에 잠시 어두운 그늘이 졌다.
진양이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마을로 내려가서 약을 지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하지만 매지향은 이내 차가운 태도로 대꾸했다.
“십지독공에 당한 상처가 어디 보통 약으로 치유될 줄 아느냐? 어림도 없지!”
“하지만 증세를 늦출 수는 있지 않겠어요?”
“당치도 않는 소리! 그런 약 따위는 없다! 설령 있다고 한들 나는 둔도백마를 죽이기 위해서 온몸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를 위해서 길을 비켜준다는 말이냐? 정녕 네놈이 마을에 내려가고 싶거든 나를 꺾고 가거라!”
양진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 보면 매 선배는 어르신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한데 왜 이렇게 깊은 원한을 가진 걸까?’
한편 진양이 돌아설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자, 매지향이 버럭 소리쳤다.
“뭘 하느냐, 돌아가지 않고? 아니면 정말 나와 한번 겨뤄보겠느냐?”
“불초 후배가 어떻게 선배님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제 보잘것없는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지?”
“도대체 매 선배님은 왜 그렇게 저희 어르신을 미워하시는 겁니까?”
순간 매지향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 눈빛은 마치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연정을 품는 듯도 했고 미움과 증오를 품는 듯도 했다.
그러나 이내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왔다.
“둔도백마가 내 제자 두 명을 죽였다. 두 아이 모두 강호를 호령하던 고수였지. 하지만 둔도백마 그 인간이 나를 하찮게 여기고 그 아이들을 죽여 버렸어!”
말을 꺼내던 매지향은 제 울분에 복받쳤는지 눈시울마저 벌겋게 물들었다.
진양은 사뭇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매지향은 겉보기에 아직도 이십대 처녀처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만한 고수를 제자로 두고 있었다니. 그럼 도대체 실제 나이는 얼마란 말일까?
그녀가 진양을 표독스럽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이제 알았으면 썩 물러가라! 더 여기서 버티겠다면 내 일수에 너를 쳐 죽이겠다!”
진양은 결국 그녀의 서슬 맺힌 기세에 눌려 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동굴로 돌아오자 돌아누워 있던 임패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클클. 멍청한 녀석. 가지 말래도.”
진양이 그 뒤로 다가가서 앉았다.
“어르신.”
“뭐냐?”
“정말 어르신께서 매 선배님의 제자들을 죽이셨습니까?”
“흐음, 그랬지.”
매지향의 말에 반신반의하고 있던 진양은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양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그 두 사람은 강호를 호령할 정도로 고수였다는데요.”
“클클. 그 새끼 고양이들이 무슨 강호를 호령한다고? 강호를 호령하려면 나 정도는 돼야지.”
“어쨌든 그 제자들을 죽였으니 매 선배님이 어르신을 이토록 미워하잖아요.”
“흥! 나는 결코 올바른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그 아이들은 사리사욕에 눈멀어서 악한 짓을 밥 먹듯이 일삼고 다녔어! 그럼에도 사매는…… 커험! 십지독녀는 자기 제자라고 감싸기만 했지. 내가 대신 그놈들에게 경고했지만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무시해 버렸다. 오히려 그놈들이 나를 밟으려고 하더군. 그러니 내 손을 쓸 수밖에.”
“사매…… 라니요?”
“무슨 소리냐?”
“방금 사매라고 하셨잖아요. 매 선배님이 어르신의 사매였어요?”
“시끄럽다. 다 옛날 옛적 일이다.”
“그럼 어르신은 매 선배님의 사형인 셈이군요?”
“내가 어렸을 때 그 악녀와 잠시 동문의 제자로 지낸 적이 있다. 하지만 혼란한 시기에 몽고 녀석들 때문에 멸문당하고 나서 우리는 같이 명교에 투신했지. 뭐 그러고 보면 사매라는 말은 맞는 셈이군.”
진양은 아연한 기색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도대체 매 선배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보자…… 아마 쉰이 넘었을 게다.”
“예에?”
진양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임패각이 그 반응을 보고 낄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