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4
신필천하(神筆天下) 24화
“왜? 너무 늙어서 놀랐느냐? 그 악녀가 네놈 반응을 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구나. 클클.”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우신데…….”
“그 악녀가 원래 미모 하나는 뛰어났지. 그리고 내공도 제법 깊다. 그런데 지금까지 상당한 공력을 젊음을 유지하는 데 소모해 왔으니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미 천상련주보다도 무서운 무공을 지녔을 게다.”
말을 마친 임패각은 또 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진양은 더 이상 임패각에게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말을 할수록 증세가 심해지니 궁금한 것이 있어도 속으로만 삼켰다.
대신 진양은 내일 정오에 있을 대결에 대해서 골몰히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어르신이 정말 위독하다. 어떻게든 내일 대결에서 내가 소 낭자를 이겨야 해. 그래서 마을로 내려가 임시방편으로나마 약을 지어와야겠다.’
진양은 연신 기침을 해대는 임패각의 등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동굴 입구로 걸어가서 생각에 잠겼다.
‘십절류는 총 열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 초식들을 내가 이미 모두 겪었으니 남은 건 허초와 변초들을 잘 가려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소 낭자를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아! 그 방법이라면!’
그 순간 진양은 갑자기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매지향과 임패각은 매번 대결을 펼칠 때마다 초식명을 소리쳐 불러주었다. 때문에 진양은 지금껏 십절류의 열 초식을 지겹도록 들어왔다.
한데 이것이 열쇠가 될 줄이야!
아니, 왜 그걸 이제야 생각했을까?
진양은 얼른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쥐었다.
붓과 종이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급한 김에 진양은 바닥에다가 나뭇가지로 글씨를 새겼다.
그가 새기는 글씨는 모두 십절류의 초식명이었다.
처음에는 열 가지 초식명을 반듯한 해서체로 새겼다.
늘 그렇듯해서체는 글자 하나를 적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대신 그 글자의 의미를 어느 때보다도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열 초식을 모두 새겼더니 한 시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그만큼 신중하고 반듯하게 글씨를 새겼기 때문이다.
진양은 다시 행서체로 글씨를 새겼다.
해서체로 글씨를 한 번 새겨보았기 때문에 각 글자의 의미는 처음보다도 훨씬 잘 간파하고 있었다. 경직되어 있던 글씨체들이 좀 더 유연하게 구부러지며 이어졌다.
행서체를 모두 적은 진양은 다시 초서체로 글씨를 새겼다. 역시 행서체보다도 빠른 속도로 글씨를 적었다.
그다음은 광초(狂草)로 글씨를 새겼다.
이때쯤 진양은 이미 각 초식의 특징을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 넣은 상태였다. 거기에 광초로 초식명을 적으니 그 초식들의 심오한 뜻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더구나 각 초식은 모두 대결을 펼치면서 견식해 보지 않았던가?
스윽. 슥슥. 스윽.
진양의 나뭇가지가 마치 바닥 위에서 춤을 추듯이 미끄러져 갔다.
마치 바람이 흐르듯, 물이 흐르듯, 낙엽이 미끄러지듯…….
순식간에 열 초식을 모두 적은 진양은 다시 첫 초식을 적어보았다.
처음에는 거친 물살처럼 써 내려갔던 초식이 이번에는 깊은 물속의 힘센 움직임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진양은 같은 글자를 다시 또 썼다.
묵직한 움직임을 보이던 초식이 이번에는 바람에 흘러가 버릴 듯 가볍고 날렵하게 이어졌다. 또다시 같은 글씨를 새길 때는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멈추어 있는 듯 필획이 이어지고 있었다.
분명 같은 글자를 광초로 쓰고 있었는데, 쓸 때마다 그 움직임이 미묘하면서도 크게 차이가 났다.
이는 진양이 각 초식의 변초를 파악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글씨는 마음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즉, 진양이 같은 서체로 글씨를 쓰면서도 필획이 그때그때 변하고 있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형상이 매번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양은 온 정신을 글자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임패각이 얼마나 심하게 각혈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날 진양은 밤이 새도록 거듭 글씨만 썼다.
무림에는 천 년에 한 번 꼴로 태어나는 천재가 있다고 한다. 어떤 무공이든 일견(一見)하면 곧바로 요체를 파악하는 천재.
한데 진양이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글씨로 쓰고 나면 그 무공의 이치를 깨우치니 과연 기재라고 부를 만하지 않겠는가.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진양은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바닥에 글을 새기던 진양은 문득 들려온 날카로운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포기라도 한 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소리의 주인은 매지향이었다.
어느새 샛길을 따라 올라온 그녀가 아무도 보이지 않자 소리친 것이다.
진양은 그제야 해가 중천에 솟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밤새도록 쪼그리고 앉아서 글씨를 썼더니 몸이 생각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잠시 주춤거리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그러고 보니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면 임패각이 자신을 깨웠어야 한다.
한데 임패각은 여전히 몸을 돌려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양이 불안한 마음에 얼른 달려가서 보니 임패각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진양이 얼른 임패각의 웃옷을 벗겼다. 그러자 가슴을 중심으로 새하얀 반점이 점점 퍼져 나가듯 찍힌 것이 보였다.
바로 십지독공에 당한 증세였다.
임패각은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그때 다시 매지향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어서 나오지 않으면 내가 그곳에 가겠다!”
임패각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워낙 기운이 쇄한 상태라 그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진 않았지만, 진양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대결을 하러 가라는 말이었다.
진양이 입술을 쿡 씹고는 동굴 밖으로 나갔다.
마침 샛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매지향이 차갑게 비웃었다.
“흥! 이제야 나타나셨군!”
그런데 진양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더니 양손을 맞잡았다.
“선배님! 부탁드립니다! 어르신께서 지금 매우 위독하십니다! 부디 아량을 베푸시고 그분을 살려주십시오!”
진양이 절박하게 부탁하자, 매지향도 짐짓 놀랐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턱을 치켜들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내가 그를 죽이려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지! 그렇게 급하거든 우리를 꺾으면 될 일이 아니더냐?”
“선배님!”
“시끄럽다! 어서 대결을 펼쳐라!”
진양은 도무지 그녀가 물러날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든 어제 밤새도록 연구한 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만약 오늘도 대결에서 승부를 짓지 못한다면 정말로 임패각이 죽을 수도 있었다.
매지향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화아, 뭘 꾸물거리느냐? 어서 저 버릇없는 녀석에게 혼뜨검을 내주어라!”
어쩐 일인지 소담화도 매지향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앞으로 나섰다.
진양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소 낭자, 사정이 급해서 그러니 혹시 제가 좀 거칠더라도 이해해 주시오.”
“남을 걱정해 줄 처지가 아닐 텐데요.”
“좋소. 그럼!”
진양이 말을 마치자마자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이는 지둔도법을 응용한 것이 아닌, 천상련에서 익혔던 질풍권이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파하며 쏜살같이 날아가자, 소담화도 깜짝 놀라서 검집 째로 들어 올리며 물러났다.
쾅!
검집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이어서 그녀가 반동을 이용하며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바로 회오리바람을 연상시키게 하는 선풍유검(旋風流劍)이라는 초식이었다.
순간 진양은 어제 썼던 선풍유검의 초식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그중에서도 자신이 세 번째로 썼던 광초가 바로 지금 소담화가 펼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풍유검의 선(旋) 자는 본래 ‘돌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보법을 본다면 선 자를 뜯어보았을 때, 언 자와 소 자의 결합을 사용하고 있다. 즉, 나부끼는 듯한 보법에서 나오는 선풍유검이다. 이 변초는 보법의 현묘함이 중심이 되므로 상대의 눈을 속이긴 쉬우나 공력이 검에만 집중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강공으로 나간다면 막을 수 있다!’
생각은 길었지만 이러한 판단은 거의 동시적으로 나왔다. 때문에 진양은 곧바로 앞뒤 가릴 것도 없이 철우격산을 펼치며 쌍장을 앞으로 뻗었다.
퍼펑!
순간 휘몰아치던 검풍과 진양의 장풍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터뜨렸다.
‘통했어!’
진양은 내심 희열을 느꼈다.
매지향과 소담화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보통 아까와 같은 순간이라면 몸을 물리며 피하게 마련인데, 진양은 겁도 없이 강공으로 맞부딪쳐 온 것이다. 이는 선풍유검의 변초를 꿰뚫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설마! 저 어린 녀석이 선풍유검의 변초를 벌써 파악해 냈단 말인가?’
매지향은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날카롭게 소리쳤다.
“화아, 한 번 더 펼쳐라!”
“네!”
소담화는 사부의 뜻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부는 정말 진양이 선풍유검의 변초 원리를 꿰뚫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번에는 또 다른 변초를 사용하며 같은 초식을 펼쳤다. 역시 회전하며 검을 부리는 방식은 비슷했지만, 거기에는 아까와 다른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 순간 진양의 눈빛이 다시 반짝 빛났다.
‘이번에도 선풍유검이군! 지금 사용한 변초는 아까와 달리 방(方) 자와 인(人) 자, 그리고 소(疋) 자를 결합한 초식이구나. 그중에서도 방(方) 자에 무게가 실려 있으니, 중심에서 벗어난 보법을 밟으면서 측면에서 후려 올 것이다. 그렇다면!’
진양이 순간 두 다리에 공력을 잔뜩 실은 다음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몸을 눕혔다. 바로 지둔도법의 강발거목(?拔巨木)이라는 초식이었다.
이름 그대로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혀 넘어지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본래 이 초식은 뒤에서 얕게 공격해 오는 자를 노리고 쓰는 초식이었지만, 무기가 없는 진양은 회피하기 위한 자세로 응용한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측면을 파고들었던 소담화의 검이 진양의 앞가슴을 스치며 바람처럼 지나갔다.
이어서 진양은 곧바로 소담화의 어깨와 왼쪽 다리 사이로 주먹을 내찔렀다. 마치 바위틈으로 물이 새는 듯한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바로 천상련에서 익혔던 풍결권이다.
깜짝 놀란 소담화는 연이어 선풍유검을 펼치며 뒤로 휘리릭 날아올랐다.
‘흠! 이번에는 소(疋) 자에 힘을 실어 회피용으로 사용했구나! 그러니 공력 또한 다리에 집중되어 있을 터. 섣불리 쫓는 것보단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
한편 소담화는 뒤로 물러선 상황에서 심호흡을 했다.
불과 하루 만에 진양의 무공은 크게 증진되어 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진양의 무공이 증진되었다기보다는 십절류의 핵심이 간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매지향도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어째서 하룻밤 사이에 이토록 성장할 수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