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5
신필천하(神筆天下) 25화
두 사람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잠시 뜸을 들인 진양이 곧바로 공격을 가해왔다.
바로 풍우정헐이었다.
풍우정헐은 지둔도법의 초식 중에서도 움직임이 비교적 빠르고 복잡한 축에 속했다.
진양이 순식간에 수도를 이리저리 날려오니, 소담화는 엉겁결에 검을 휘두르며 연신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매지향이 소리쳤다.
“섬전유검!”
소담화는 곧바로 초식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미 진양은 십절류의 모든 초식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지금 펼쳐진 소담화의 초식이 섬(閃) 자에 무게를 두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섬(閃) 자는 문(門)과 인(人)의 합이다.
문틈으로 번쩍이는 빛을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즉, 지금 소담화가 펼친 섬전유검의 변초는 상대의 치밀한 공격이나 방어를 뚫을 때 쓰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진양은 아예 그 문을 활짝 열어 버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변초는 그 위력을 많이 잃을 것이 분명했다.
결단을 내린 진양이 순간 공력을 발바닥에 쏟아부으며 몸을 날아 올렸다.
바로 지둔도법의 철돈도약이었다.
진양의 수도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일시에 사라지고 활짝 열린 것이다.
그러자 검을 내뻗은 소담화는 뒤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마치 망망대해에 검 한 자루가 일엽편주(一葉片舟)마냥 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침 바닥에 착지한 진양은 그대로 질풍권을 내질렀다.
슈우우욱!
마음이 다급해진 소담화가 엉겁결에 장을 뻗어냈다.
펑!
그녀의 몸이 뒤흔들리던 찰나, 진양은 다시 철우격산을 연환식으로 펼쳤다.
이제 꼼짝없이 진양의 쌍장이 그녀의 가슴을 격타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양은 차마 소담화를 치지 못했다.
어차피 이 대결은 승부만 지으면 되는 것 아니겠나.
굳이 내공을 가득 실은 철우격산을 펼쳐서 상대에게 내상을 입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공력을 거두어들이는데, 마침 소담화가 왼손을 뻗어왔다.
그녀는 진양이 공력을 거둘 줄 몰랐기에 최대한 내상을 줄이려는 생각으로 장력을 발한 것이다.
만약 그대로 소담화의 장력을 받았다간 진양은 큰 중상을 면하기 어려웠다. 절체절명의 순간 진양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갔다.
그제야 소담화도 진양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것을 깨우쳤다.
한데 그 순간 진양의 발이 낭떠러지 부분을 디디며 주룩 미끄러지고 말았다.
“앗!”
세 사람이 동시에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헛디딘 발아래로는 계곡도 없는 천 리 낭떠러지였으므로 떨어지면 무조건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소담화는 얼른 몸을 날려 검을 바닥에 깊이 박은 후 진양에게 손을 뻗었다. 아래로 떨어지던 진양은 소담화의 손목을 낚아채며 허공으로 훌쩍 도약했다. 공중에서 두어 번 재주를 넘은 진양은 가까스로 길 위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죽을 위기를 넘긴 진양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소 낭자, 목숨을 구해주어서 정말 고맙소!”
그러자 소담화는 잠시 당황하다가 검을 뽑아 들고는 몸을 홱 돌렸다.
“흥! 모처럼 당신이 죽는 꼴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게 아쉬워서 도와준 것일 뿐이에요.”
섬뜩한 말이었지만 진양은 그 속에 담긴 묘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앞으로 소 낭자가 없을 땐 함부로 죽지도 못하겠군요.”
그러자 소담화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소리쳤다.
“당, 당신이 어딜 가서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녀가 이내 걸어가 버렸다.
매지향이 소리쳤다.
“이번 대결은 무승부다. 싸움은 끝나기 전까지 항시 방심할 수 없는 법. 엄밀히 따지자면 쓸데없는 선심을 베푼 너의 잘못이니 우리가 이겼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승부를 미루는 걸로 해두지.”
진양으로선 원래 다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렇게 무승부로 결정되니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담화에게 목숨을 빚진 것도 있어서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대신 예를 차려 인사했다.
“선배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진양이 공손하게 대꾸하자, 매지향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돌렸다.
진양은 얼른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싸우는 동안에도 임패각이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진양이 얼른 달려가서 임패각을 돌려 눕혔다.
한데 임패각의 입 주위가 온통 피범벅이었고, 침상은 벌건 핏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어, 어르신! 어르신!”
“양아…… 이겼느냐?”
임패각이 희미한 목소리로 묻자 진양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뇨. 하지만 내일은 이길 수 있어요. 이제 이길 방법을 알았어요.”
“클클클…… 내 진작…… 네놈이…… 이길 줄…… 알았지.”
“어르신, 말씀을 많이 하지 마세요.”
그러자 임패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그는 생기(生氣)가 다하는 중이었다.
그는 진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사람이 임종 직전에 잠깐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는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증상이었다.
임패각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한마디 한마디 알아듣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양아, 너는 많은 재능을 가진 아이다. 게다가 너의 놀라운 집중력과 열의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큰 장점이다. 훗날 네가 더욱 성장하거든 네 힘을 반드시 올바른 곳에 써야 한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알겠어요, 어르신. 꼭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돌아가시지 마세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누구든 태어나면 죽는 것이니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다. 내 늦은 때라도 널 알게…… 되어서…… 기쁘구나…….”
“어르신, 그래도 사셔야 해요! 그래서 저한테 더 많이 가르쳐 주셔야죠!”
이제 임패각의 목소리는 거의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클클……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제자를…… 두지 않…….”
말을 꺼내던 임패각은 끝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진양은 얼른 목에 손을 대고 맥을 짚어보았다.
하지만 손끝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양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렇게 자신을 아껴준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어르신…… 어르신!”
진양이 소리쳐 울부짖었지만 동굴 안에는 그의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릴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 진양은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동굴에서 울리기 시작한 그의 울음소리가 온 산을 뒤덮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문득 동굴 입구에서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 녀석이 어찌 그리 서럽게 운단 말이냐? 그깟 쓸모도 없는 약을 지어오지 못해 눈물을 보인단 말이냐?”
진양이 돌아보니 매지향과 소담화의 그림자가 입구에 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한 것이 있어 차마 안으로 들어오진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양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일어났다.
그는 임패각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매지향이 몹시 미웠다. 그래서 동굴 입구로 걸어가 그녀를 보자마자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제는 이곳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매지향의 가는 눈썹이 꿈틀 흔들렸다.
“무슨…… 소리냐?”
“어르신께서는 이제 이곳에 안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냔 말이다!”
매지향이 목청을 높였다.
진양이 손가락으로 매지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매 선배가 어르신을 돌아가시게 한 것 아닙니까? 이제 와서 놀란 척하지 마시죠! 자!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좋으시겠습니다! 앞으로 매일 번거롭게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순간 매지향이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사부님!”
소담화가 얼른 그녀를 붙들었다. 자칫하다간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다.
매지향이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물었다.
“지금…… 그가…… 죽었다고 했느냐?”
“그래요!”
“언제……?”
“방금 전 돌아가셨습니다!”
매지향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은 분명 원수가 죽어 통쾌하게 여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진양은 그녀의 얼굴에 비통함과 슬픔이 겹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여려졌다.
매지향이 더듬더듬 말했다.
“내,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다.”
“가 보시죠.”
진양도 목소리를 낮추고 물러섰다.
매지향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는 임패각을 보고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렇게…… 정말 이렇게 죽은 거예요?”
그녀는 임패각의 손목을 낚아챘다.
몇 번을 다시 잡아보아도 맥은 뛰지 않았다.
진양은 그녀를 몹시 미워했지만, 막상 그녀가 비통해하는 것을 보니 애잔한 마음이 들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매지향은 한참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부채를 펼치더니 입을 가리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 호호호호! 호호호호!”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자 소담화와 양진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깊은 상실감이 스며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입술만 꾹 씹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웃던 그녀가 문득 몸을 돌리더니 진양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너!”
“예?”
“이제 그가 죽었으니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게 됐다! 나는 너라도 죽여야 분이 풀리겠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진양은 따지고 반항할 기운도 없었다. 오히려 일 년여 동안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이렇게 죽자 삶에 대한 애착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마음대로 하시죠.”
매지향은 그의 처연한 태도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양의 상실감이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져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매지향이 빛살처럼 손을 뻗어내 진양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네가 그를 위한다면 어째서 목숨을 걸고 내게 덤비지 않았더냐?”
진양은 어이가 없었다.
임패각의 죽음을 이제는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니 그저 할 말이 없을 뿐이었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세요.”
진양의 일관된 태도에 매지향은 더욱 울분이 치솟았다.
그녀가 쥘부채를 한껏 치켜들었다.
여차하면 진양의 천령개를 내려쳐 일수에 죽일 기세였다.
한데 그 순간, 그녀의 쥘부채를 본 진양은 잊고 있던 임패각의 유언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그분의 유언은 따르도록 하자.’
진양이 얼른 소리쳤다.
“잠깐만요!”
“흥! 죽을 때가 되니 갑자기 두려워진 게냐?”
“절 죽이고 싶으면 얼마든지 죽이세요. 하지만 그 전에 어르신의 유언을 들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유언?”
매지향의 눈빛이 다시금 흔들렸다.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손을 놓고 물러섰다.
“그의 유언이 무엇이냐?”
“그 부채를 저에게 주세요.”
매지향이 눈썹을 슬쩍 구겼다.
이 어린것이 혹시 죽음이 두려워 꼼수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하지만 진양의 표정을 보니 시종일관 진지한 것이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부채를 건네주니 진양이 구석으로 걸어가서 벼루와 필묵(筆墨)을 챙겨왔다.
매지향은 가만히 서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먹을 간 진양은 부채를 활짝 펼치고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두 줄의 글귀를 적어나갔다.
擧頭望明月 머리를 드니 밝은 달 비추고
低頭思古鄕 머리를 숙이니 고향 생각 나는구나.
바로 임패각이 자주 읊던 시인 ‘정야사’의 마지막 두 구절이었다.
글을 모두 적은 진양은 부채를 적당히 말린 뒤 매지향에게 건네주었다.
매지향이 부채를 받아 활짝 펼쳐 보니 수려한 글씨체로 정야사 마지막 두 구절이 적혀 있지 않은가.
마치 필획 하나하나에서 임패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더구나 글씨에서 그의 마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니 매지향은 불현듯 치솟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가 부채를 쥔 손을 가늘게 떨었다. 입술이 한참이나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희미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오라버니…….”
입을 열자 참았던 눈물이 양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