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6
신필천하(神筆天下) 26화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심연에 꽁꽁 숨겨두었던 슬픔이 때론 광소로, 때론 분노로 표출되다가 이제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눈물이 되어 흐른 것이다.
차갑게 굳었던 마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지자, 그녀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와 임패각은 같은 고향에서 자랐다.
어린 그녀는 임패각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따랐고, 임패각 역시 그녀를 몹시 귀여워해 주었다. 두 사람 모두 어려서부터 무공에 재능이 뛰어났지만, 사문이 망하고 나서부터는 강호를 돌아다니며 고생길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임패각은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매지향을 마치 친동생처럼 곰살궂게 대했다.
시간이 흘러 매지향은 임패각을 흠모하게 됐다. 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젊음을 유지하는 데 많은 공력을 소모했고, 그러다 보니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독공을 익히게 됐다.
하지만 임패각은 그녀의 독공이 지나치게 패도적이라 늘 마뜩찮게 여겼다.
매지향은 자신의 애정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패각을 못내 야속하게 여겼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응어리진 마음은 점점 애증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매지향의 제자가 악행을 저질러 임패각에게 살해당하자 그녀의 애증은 다시 증오가 되고 말았다.
지극한 사랑이 결국 지극한 미움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날이 갈수록 임패각을 통렬히 미워하게 됐고, 처음의 연정은 기억도 하지 못했다. 다만 무의식중에 꿈틀거리는 그 최초의 감정이 이따금씩 마음 한구석을 짠하게 만들 뿐이었다.
사실 사랑과 미움은 종이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글을 보니 마음속에도 눈물이 스며들어 감추어두었던 뒷면의 감정이 새록새록 젖어 나왔다. 그러다가 이내 처음의 연정이 다시금 완전히 피어오른 것이다.
연민이 그리움으로, 그리움은 다시 연정이 되어 하염없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한 그리움에 매지향은 체면을 챙길 생각도 잊은 채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우고 산등성을 따라 울려 퍼졌다.
양진양도 소담화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삼켰다.
한참을 울고 난 매지향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거라.”
양진양과 소담화가 그녀를 멀뚱멀뚱 보았다.
매지향이 다시 소리쳤다.
“가라고 하지 않았더냐! 내 너를 살려주겠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여길 떠나거라!”
“제가 떠나고 나면 두 분은 어쩌실 건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든 너와는 아무 상관 없다.”
“그게 아니라…… 어르신을…….”
“평생을 외고집으로 살아오신 분이다. 그냥 이대로 둘 것이다.”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제가 어르신을 직접 묻어드리겠습니다.”
“네까짓 게 뭔데?”
“뭐라도 상관없지요. 어르신의 은혜를 입은 몸이니 최소한의 도리를 다할 생각입니다.”
말을 마친 진양은 묵묵히 걸어가서 임패각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매지향은 아랫입술만 쿡 깨문 채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
절벽에서 내려온 진양은 임패각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둔도 역시 함께 묻었다. 마지막으로 비목을 세운 뒤 양진양은 비로소 그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금껏 지켜보던 매지향과 소담화 역시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 울고 난 진양이 정신을 수습하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숲 한쪽에 매어놓은 흡혈마에게 다가갔다.
“매 선배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진양은 흡혈마를 탈 생각도 하지 않고 고삐를 잡은 채 터덜터덜 걸어갔다.
매지향은 허탈한 심정으로 임패각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원망하고 싶어도 원망할 상대가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진 것이다.
매지향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져 나가는 듯했다.
본래 사람이 지독한 슬픔에 처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는 누구라도 원망을 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한평생을 삐뚤어진 마음으로 살아온 매지향이다.
그녀가 돌연 고개를 돌리고는 멀어져 가는 진양을 불러 세웠다.
“거기 멈춰라!”
진양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매지향이 구름을 밟듯 산 아래로 내려와 섰다.
“원래 나는 너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유언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런데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말씀인지요?”
“오늘은 너를 살려주겠다. 하지만 나는 일 년 뒤에 다시 너를 찾아가서 죽일 것이다.”
진양은 어이가 없어서 매지향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만약 네가 잘만 했다면 오라버니가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셨겠느냐? 오라버니가 결국 운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너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진양은 화가 났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나무라고 있단 말인가.
매지향은 임패각을 죽이기 위해서 천 리를 달려온 여자다.
한데 이제는 오히려 자신을 두고 임패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상실감이 지나쳐서, 혹은 애정 결핍으로 인해 감정의 체계가 이상하게 꼬여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이때쯤 진양은 허탈감에서 조금씩 마음을 추슬러 가고 있는 차였다. 때문에 아까와는 달리 두 눈을 부릅뜨고 맞섰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나무라는 것입니까?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정한 장본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째서 그렇게 삐딱한 생각을 가지시는 겁니까? 전 도저히 납득을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매지향이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네, 네가 감히……!”
그녀도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괴로웠다.
한데 지금 진양이 그런 아픔을 콕 집으며 말하자 괴로움이 분노로 바뀌었다.
“일 년 뒤에 반드시 네놈을 죽이겠어!”
진양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도 그때는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어르신의 원수라도 갚아야지요!”
매지향은 ‘원수’라는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어, 어떻게 감히 네가…… 나를 그리 부를 수 있단 말이냐? 네, 네까짓 것이…… 네놈이 나와 오라버니 사이를 안단 말이더냐? 네놈이 나와 오라버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안단 말이더냐? 네놈은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왔는지…… 네놈은 모른다!”
“흥! 둔도백마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소리치던 분이 갑자기 오라버니를 그리워하는 누이가 되었으니, 제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쯤 되자 지켜만 보던 소담화도 끼어들었다.
“그만하세요!”
그제야 진양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잠시 흥분해서 실례를 했습니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일 년 뒤에 뵙도록 하지요.”
매지향은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고, 진양은 흡혈마의 고삐를 쥐고 터벅터벅 산을 내려갔다.
그렇게 진양은 일 년여 만에 경정산에서 하산했다.
때는 홍무 26년, 그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1. 의(義)와 협(俠)
바람 따라 구름이 흘렀다.
한동안 진양은 구름을 따라 직례 일대를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흡혈마를 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래 흡혈마의 주인은 임패각인데, 그가 죽자마자 흡혈마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진 탓이다.
산천을 유람하며 돌아다니던 진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매지향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것이 후회가 됐다.
‘그분도 슬픔에 젖어 이성을 잃었던 것인데, 내가 거기에 똑같이 대응을 해버렸구나. 만약 어르신께서 하늘나라에서 보셨다면 아마 나를 호되게 나무라셨을 거야. 언제라도 다시 만나게 되거든 정중히 사과를 드리자. 그분과 생사를 다투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반드시 사과는 해야겠다.’
진양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야산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프면 사냥이나 낚시를 해서 배를 채웠고, 밤에는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
어느덧 그렇게 보름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진양은 나무 기둥에 매어 있는 흡혈마를 잡고 이끌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흡혈마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어봤지만 흡혈마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배가 고파? 어젯밤에도 멧돼지를 잡아다가 피를 잔뜩 먹었잖아.”
푸르르릉!
흡혈마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돌려 진양을 외면했다.
진양이 다시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혹시 어르신이 그리운 거야? 이제 너도 그분을 놓아드려야지. 이제 내가 너를 보살펴 줄 거야. 그러니 어서 가자.”
하지만 흡혈마는 다시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콧김을 뿜어댔다.
푸릉! 푸릉!
마치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도대체 왜 그래?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네.”
이히힝!
“자, 그만 가자. 지금까지 잘 다녔잖아. 가자.”
이히히힝!
여전히 말이 고개를 휘저으며 저항했다.
도저히 뜻이 통하지 않자 진양은 힘으로 흡혈마를 이끌기 시작했다.
본래 어지간한 힘으로는 흡혈마를 이끌 수 없었지만, 진양은 내공이 심후했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데 꼬박 일 리를 나아가는 동안 흡혈마는 줄기차게 저항했다. 보통 저항을 하더라도 힘으로 사오 장을 끌고 가면 흡혈마는 곧 수긍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일 리를 나아가도록 저항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물론 진양의 내공이 워낙 심후하니 이대로 계속 끌고 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너무도 다르니 진양도 걸음을 멈추고 흡혈마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야?”
그러자 흡혈마가 고갯짓을 하며 ‘푸르릉’ 콧김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이런 행동을 줄곧 보여왔다.
그러고 보면 분명 무슨 뜻을 담고 있는 듯한데, 진양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혹시…… 내가 올라타길 바라는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진양이 흡혈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흡혈마의 등에는 안장도 얹혀 있지 않았다. 게다가 몹시 마른 체구였기 때문에 등에 올라타는 건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진양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혹시 내가 타길 바라는 거야?”
그러자 흡혈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콧김을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콧김 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시원하고 즐거워 보였다.
‘정말 내가 타길 바라는 걸까? 이 비루먹은 말이 날 태울 수 있기나 한 걸까? 하긴 어르신도 태웠으니 나라고 못 태울 건 없겠지.’
진양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에 올라타기로 마음먹었다.
흡혈마는 진양이 곁으로 다가오자 마치 어서 타라는 듯 몸을 바짝 붙여왔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진양이 몸을 훌쩍 날려서 흡혈마의 등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