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7
신필천하(神筆天下) 27화
한데 그 순간 진양은 전신을 찌릿하게 울리는 감각에 하마터면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흡혈마가 워낙 마른 탓인지 등뼈가 진양의 회음혈(會陰穴)을 정확히 내찌른 것이다.
“헉!”
진양이 반사적으로 말고삐를 움켜잡으며 당겼다.
그러자 흡혈마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더니 긴 울음을 터뜨리고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질주에 진양은 깜짝 놀라서 다시 고삐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의 혈도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가서 고삐를 잡아당길 수도 없게 됐다.
진양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말 등에 올라탄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말이 뼈밖에 없어서 달릴 때마다 전신을 쑤셔대는구나!’
이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그대로 낙마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데 진양이 중심을 잃고 떨어지려는 순간, 막혔던 혈이 거짓말처럼 뚫렸다. 정말 운이 좋게도 막혔던 부분이 다시 자극을 받으면서 혈이 풀린 것이다.
진양은 얼른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삐를 잡아당겨도 흡혈마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내달리기만 했다. 나무와 바위가 휙휙 정신없이 지나갔다.
흡혈마는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숲속도 마구 뛰어다녔다.
문제는 흡혈마가 뛸 때마다 진양의 하반신을 쉴 새 없이 자극한다는 것이다. 말뼈가 연신 경혈을 두드려 대니 흡사 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았다.
“아얏! 윽! 아악!”
진양의 입에서 연이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진양은 내력을 운용해 자극받는 부위의 혈도를 차단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다 보니 온몸을 쑤셔대던 고통도 점차 줄어들었고, 말을 타는 자세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순간 진양은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 흡혈마가 내력을 운용하는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계속 이어졌던 자극은 단지 무언가에 찔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혈도를 통해서 어떤 기운이 전신을 찌르르 통과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진양은 그제야 흡혈마가 단순한 준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르신께서는 흡혈마가 영물이라고 하셨지. 흡혈마는 내력을 운용하고 있는 거였어. 한낱 말이 내력을 운용할 줄 알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진양은 내심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간혹 내단이나 독단을 형성하는 영물들이 존재한다. 그런 영물들은 신성한 것을 먹거나 타고난 본능으로 내력을 운기해서 내단을 형성한다.
흡혈마도 영물에 속한다.
한데 흡혈마는 단순히 내단을 형성하거나 내력을 운기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자신의 등에 탄 사람과 내력으로 교감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흡혈마도 처음부터 이러한 것이 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패각은 흡혈마가 여느 말과는 다른 영물이라는 것을 곧장 알아보았다. 그 후로 그는 말을 탈 때마다 의식적으로 발뒤꿈치로 말의 배를 툭 치며 공력을 주입시키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감은 말의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었고, 임패각에게도 이로운 것이었다. 서로의 공력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니 마치 말을 타는 동안 임패각은 부드러운 안마를 받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전신의 진기가 상호작용을 통해 활발하게 주천하니 말을 타고 가는 행위만으로도 내공 수련에 도움이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던 진양은 말을 타자마자 전신을 찔러대는 듯한 감각에 깜짝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의 몸에 공력이 주입되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대신 뼈마디가 몸을 찔렀다고 착각한 것이다.
‘하긴 아무리 말이 말랐기로 뼈가 내 몸을 찌른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진양은 그 뒤로 자연스레 내력을 운기해서 말을 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처음에는 말을 타면서도 공력을 운기해야 한다는 것이 몹시 번거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흡혈마 역시 진양과 공력으로 교감을 하니 아무리 먼 거리를 달려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진양은 잠을 자거나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말을 타고 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한 달여가 흘렀다.
어느 날 진양은 말을 탄 채로 광덕현(廣德縣) 일대를 배회하다가 산길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마침 날씨가 따뜻하고 오반을 먹은 직후였기에 진양은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말 등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흡혈마를 타면서 잠을 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쯤 진양은 이미 무의식중에서도 내공을 본능에 따라 운기할 수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산길을 올랐을까?
진양은 문득 귓가를 스치는 인기척에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나무와 수풀이 울창한 숲속이었다.
인기척은 왼편 숲 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보통 그 정도의 거리라면 일반인들이 온 신경을 집중해야 들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공이 심후한 진양은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가만히 주의를 기울여 보니 인기척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몹시 민첩하면서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는데, 대략 스무 명 정도로 짐작됐다.
진양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딜 바삐 가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평탄한 길을 두고 어째서 험난한 숲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진양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히 호기심 때문에 나섰다가 피해를 볼지도 모르니 멀찌감치 벗어나자.’
하지만 말을 타고 몇 걸음 가지 못해 진양은 다시 멈춰 서서 고민에 잠겼다.
‘아니야. 만약 저들이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응당 나서서 말려야 할 일이다. 어르신께서는 올바른 일에 힘을 쓰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일생을 옳은 일에 힘쓰다가 죽은 임패각을 떠올리자 진양은 문득 자신의 안일한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더구나 흡혈마를 타고 있으니 그의 당부가 더욱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결국 진양은 말고삐를 잡아 돌렸다.
“우리도 저들을 몰래 쫓아가 보자꾸나.”
흡혈마가 걸음을 돌려 다시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진양은 조금 거리를 두고 인기척의 뒤를 쫓았다.
흡혈마가 영물인 데다가 진양 역시 내공이 심후하니 기척을 숨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그들의 인기척이 숲 한곳에 운집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은 제법 널찍한 관도를 앞둔 숲속이었다.
아마도 무언가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매복하고 있는 듯했다.
진양은 흡혈마에 탄 채로 관도까지 걸어나갔다. 그러고는 마치 숲속에 잠복해 있는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커다란 바위 곁에 앉아 쉬었다.
숲속에 숨은 자들도 진양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진양은 길가에 핀 꽃을 꺾기도 하고, 풀피리를 불기도 하면서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남쪽 언덕 아래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표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뭔가 나타났군.’
진양이 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레를 이끌며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깃발에는 금빛 수실로 용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막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모습이었다.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이니 마치 금룡(金龍)이 살아서 비상하는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표행(?行)을 목격한 진양은 감개가 무량했다.
커다란 깃발과 건장한 보표(保?)들, 그리고 호송물을 둘러싸고 행진하는 쟁자수(爭子手)들까지.
이들 표행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직 강호 경험이 부족한 진양은 괜히 마음이 두근두근 설렜다.
표행의 인원은 대략 삼십여 명에 달했다.
진양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진양의 앞을 지나쳐 일 리 정도 나아갔을 때다. 순간 느닷없이 화살 한 대가 날아오더니 표사(?士) 한 명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수레에 박혔다.
그 바람에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진양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그렇구나! 잠복해 있던 자들은 저 표행을 노렸던 거구나!’
진양은 섣불리 나서지 않고 흡혈마에 올라탄 채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마침 표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죽립을 눌러쓴 자였는데, 체구가 가냘프고 몸매에서 굴곡이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여자인 듯했다.
죽립인은 표행이 다른 지역을 지나칠 때 으레 차리는 예로 표국의 깃발을 한 번 감았다가 펼치며 낭랑하게 소리쳤다.
“응천부의 금룡표국(金龍?局)이 귀하의 경내를 통과하오! 늦게나마 인사를 드리겠으니 모습을 보이시기 바라오!”
청아한 목소리를 들어 보니 틀림없는 여자였다.
그러자 숲속에 매복해 있던 흑의인들이 우르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모두 열다섯 명으로 진양의 생각보다는 적은 인원이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의 무예 실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두 명의 무공이 고강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들 중 한 명만이 복면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인이 다시 소리쳤다.
“저는 금룡표국의 유설(柳雪)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높으신 존함은 어찌 되시는지요?”
여인은 시종일관 예의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흑의인들은 여전히 적의를 거두지 않은 듯 냉랭한 시선으로 보표들을 훑어보기만 했다.
흑의인 중에서 텁석부리사내가 앞으로 성큼 나오더니 말했다.
“우리 이름은 알 것 없다!”
몹시 무례한 태도였지만 여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올려 표사 한 명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표사 한 명이 얼른 수레에서 상자 하나를 가지고 오더니 텁석부리사내에게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은자가 가득 들어있었다.
여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정성이니 받아주시고 경내를 지나갈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시지요.”
표국이 산적이나 수적을 만났을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경우 상대는 적당히 예물을 거두어들이고 표행이 지나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강호상의 예절이었다.
만약 이를 거부하고 표행에 해를 끼치기라도 한다면 전 강호의 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더구나 응천부의 금룡표국은 표국 중에서도 명망이 높은 곳이라 아무리 겁없는 녹림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곳이었다.
한데 텁석부리사내는 코웃음을 치면서 상자를 받지 않았다.
“흥!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지! 우리를 거지로 아는 모양이군!”
그의 말에 보표들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죽립의 여인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목소리가 사뭇 매서워졌다.
“그럼 귀하는 무엇을 바라시오?”
“크하하하! 그쪽이 몸이라도 바친다면 한번 생각해 보지!”
그의 말에 표두 한 명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저런 무엄한!”
이제 표행과 흑의인들 사이에서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다.
한편 멀리서 지켜보던 진양은 텁석부리사내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사내가 누구인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아악!”
그때 느닷없이 비명이 터졌다.
텁석부리사내 옆에 서 있던 복면인이 다짜고짜 검을 휘둘러 상자를 가져왔던 사내를 베어 버린 것이다.
“저, 저런!”
“호송물을 보호하고 놈들을 막아라!”
순식간에 보표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흑의인들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