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8
신필천하(神筆天下) 28화
“흥! 감히 우리 상대가 될 것 같으냐?”
흑의인들도 거침없이 보표들에게 부딪쳐 갔다.
관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여기저기서 욕설과 고함 소리,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각종 병기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금속성이 터져 나오고 피가 튀었다.
그중에서도 텁석부리사내, 복면인, 세 명의 표두(?頭)는 단연 무공이 돋보였다.
진양은 잠시 표국을 도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저들 사이에 은원이 있다면 괜히 제삼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데 지켜보고 있자니, 흑의인들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쟁자수들조차 가리지 않고 마구 죽여대고 있었다. 게다가 흑의인들의 무공이 꽤나 고강해서 보표들이 무척 애를 먹고 있었다.
이를 보니 자연스레 그의 마음이 표국을 돕고자 하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그런데 그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갑자기 흡혈마가 길게 울부짖더니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히히힝!
“으엇! 왜 그래?”
흡혈마는 단숨에 싸움이 벌어지는 곳까지 달려갔다.
마침 유설과 표두 한 명을 맞아 싸움을 벌이고 있던 텁석부리사내는 진양을 태운 흡혈마가 거침없이 달려들자 얼른 몸을 물렸다.
“으익! 뭐냐?”
“우와아아! 진정하라니까!”
진양이 고삐를 쥔 채 이리저리 흔들리며 소리쳤지만 흡혈마는 막무가내였다.
흡혈마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라도 된 양 싸움터를 이리저리 누비며 다녔다.
그 바람에 한창 어우러져서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사람들이 잠시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타난 난동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양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흡혈마는 쓰러진 자들의 피를 핥아 먹고 있었다.
본래 흡혈마는 무인의 피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동안 야생동물의 피만 먹어왔던지라 내심 불만이 쌓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 이렇게 싸움터에서 사람의 피를 보게 됐으니 눈이 뒤집히고 만 것이다.
텁석부리사내는 난데없이 나타난 진양과 흡혈마를 보고는 불쑥 노기가 치솟았다.
“이것 봐! 여기서 뭐하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그때 복면을 쓴 사내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텁석부리사내에게 말했다.
“위 형, 저깟 애송이한테 뭣하러 소리치는 거요? 그냥 죽여 없애면 그만일 것이지!”
몹시 탁한 목소리였는데, 듣는 이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듣기가 거북했다.
복면인이 검을 뽑아 든 채로 흡혈마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단칼에 진양을 죽일 생각인 듯했다.
이를 본 유설이 얼른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저 사람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예요. 무고한 인명을 다치게 할 필요가 있겠어요?”
이때쯤 진양은 흡혈마의 상태를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들려온 아름다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유설이 자신을 가로막으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진양은 내심 감동을 받아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기울었다.
반면 복면인은 코웃음을 치더니 불쑥 왼손을 뻗어왔다. 그의 출수가 놀랍도록 빠른지라 유설은 얼른 물러나며 피했다.
한데 복면인의 일장은 허초였다. 그는 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몸을 날려 진양의 배후로 다가갔다. 이제 그가 일검을 휘두르면 꼼짝없이 진양의 목이 날아갈 터였다.
한데 그가 막 검을 부리려는 찰나, 흡혈마가 느닷없이 뒷다리를 불쑥 들어 올리며 내뻗었다.
이히히힝!
깜짝 놀란 복면인이 얼른 장을 뻗어내서 막았다.
퍼억!
이때 복면인은 손바닥에 내공을 가득 실었다. 때문에 보통의 경우라면 말다리가 부러졌어야 정상이다.
한데 복면인은 마치 쇳덩이를 두드린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뒤로 훌쩍 물러나서 착지했다.
‘저 말이 보통이 아니구나!’
복면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네 이놈! 정체가 뭐냐?”
역시나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진양이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흡혈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양손을 맞잡으며 예를 차렸다.
“불초 후배는 그저 길을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여러 선배님들께 피해를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분위기가 흉흉한 와중에도 깍듯하게 예를 차리는 모습을 보고는 표국 사람들은 물론 흑의인들도 조금은 놀란 표정이었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담이 크군!’
모두들 같은 생각으로 진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유설이 그에게 다가갔다.
“공연히 저희 일에 말려들까 걱정이군요. 이곳은 위험하니 어서 길을 떠나시지요.”
그야말로 옥구슬이 은쟁반을 구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원래 진양은 표국 사람들에게 좀 더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서 함부로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유설이 이처럼 자신을 위해주자 자신도 표국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은 유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척 대답했다.
“베풀어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소생은 방해하지 않고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양이 흡혈마의 고삐를 쥐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제 신나게 피를 핥아 먹고 있던 흡혈마로서는 이 자리를 떠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진양이 막 힘으로 끌어내려는데, 마침 텁석부리사내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끼어들었다가 물러난단 말인가? 그쪽이 표국과 한패거리일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대로 보낼 순 없다!”
그러자 유설이 발끈해서 맞받아쳤다.
“이 사람은 금룡표국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우리 표국이 댁들과 원수진 일이 없을 것인데, 어째서 우리 길을 방해하는 건가요?”
“흥!”
텁석부리사내는 콧방귀만 뀔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때 성질이 급한 복면인이 일갈을 터뜨리며 진양에게 날아들었다.
“놈! 물러가려거든 그 목을 놓고 가거라!”
복면인의 신법이 워낙 빨랐기에 아무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진양의 코앞에 다다른 그가 검을 세로로 내려쳤다.
그 순간 진양은 소매에서 굵은 붓 자루를 꺼내 들었다.
까앙!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복면인이 놀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붓 자루가 복면인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진양이 곧이어 질풍권을 내질렀다.
슈우욱!
“헉!”
복면인이 화들짝 놀라며 왼손을 뻗어 막았다.
퍼엉!
질풍권이 복면인의 장에 부딪치며 큰 소리를 냈다. 가까스로 질풍권을 막아내긴 했지만, 복면인은 진양의 막강한 내력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주춤 물러나서 경계하자, 이번에는 텁석부리사내가 호통을 치며 달려들었다.
“어린 녀석이 겁이 없구나!”
텁석부리사내는 그대로 도를 들어 가로로 후려 갔다.
진양은 잽싸게 몸을 눕혔다.
바로 지둔도법에서 사용되는 회피 동작으로 온몸이 강시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텁석부리사내의 도가 그대로 진양의 배 위를 스치고 지나가자 복면인이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위 형! 놈의 내공이 보통이 아닌 듯싶소!”
그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진양은 이미 풍결권을 펼치고 있었다.
진양의 주먹이 마치 흐르는 물결처럼 텁석부리사내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갔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진양의 주먹이 제대로 텁석부리사내의 갈비뼈에 맞은 것이다.
한데 어쩐 일인지 텁석부리사내는 별로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복면인의 말대로 이 소년의 내공이 심후하다면 지금쯤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고 오장육부가 뒤집어졌어야 하리라.
사실 진양은 복면인이 ‘위 형’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는 내력을 일순간에 거두어들였던 것이다. 이 텁석부리사내가 누군지 그제야 기억이 난 것이다.
진양이 뒤로 두어 걸음 훌쩍 물러난 다음 예를 갖춰 물었다.
“혹시 혈사채의 위사령 선배님이 아니신지요?”
텁석부리사내가 흠칫 몸을 떨고는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반격할 생각도 잊은 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나를 어찌 아느냐?”
“후배, 양진양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위 선배님을 뵌 적이 있지요. 대략 육 년 전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때 위 선배께서는 화산파의 제자 두 분을 추격하다가 저와 만났습니다.”
위사령이 이맛살을 구기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육 년 전이라…….
자신이 화산파의 제자들을 쫓을 일이 뭐가 있을까?
그때 불현듯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육 년 전에 자신이 아끼던 동생 하나가 손가락 두 개가 잘려서 돌아온 적이 있다. 이에 격분한 자신이 화산파의 제자 두 명을 뒤쫓았던 것이다.
‘흠, 그때 이 소년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위사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진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른의 얼굴이야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법이지만,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지 않던가.
그동안 진양은 키도 훌쩍 자랐고 목소리도 변했으니, 위사령은 그를 좀처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진양이 그의 기억을 돕기 위해 한마디 더 보탰다.
“그때 선배님께서는 제 손가락을 자르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절 보살펴 주시던 어르신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위사령은 안개가 걷힌 듯 당시의 일을 소상히 기억할 수 있었다.
“아! 그럼 네가 그때의 그 꼬마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위사령은 그 어렸던 꼬마가 이렇게 장성한 것을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하하하! 이제 보니 많이도 컸군. 육 년 전에도 날 방해하더니 오늘도 날 방해할 셈인가?”
마지막 질문을 던질 때는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사실 오랜만의 재회이긴 하지만 위사령은 진양에게 어떤 호의도 적의도 없었다. 다만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 제거할 대상이 될 뿐이었다.
마침 듣고 있던 복면인이 위사령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위 형, 아는 자요?”
“그저 일면식이 있을 뿐이오.”
“그렇다고 해도 이 일은 확실히 해야 할 것이오.”
어쩐 일인지 복면인은 위사령에게 명령을 내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위사령은 그런 복면인을 영 탐탁찮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위사령이 퉁명스레 말했다.
“나 위사령이 그렇게 무른 인간이었다면 채주께서 날 보내셨을 것 같소이까?”
“거야 나는 확인하지 못했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만약 당신이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리 쪽에서도…….”
“흥! 그건 그때 가서나 얘기할 일이고!”
위사령이 짜증스레 말하고는 진양에게 성큼 나섰다.
“우리 악연이 또 겹쳤구나. 일전에는 네놈이 운이 좋아 멀쩡하게 갈 수 있었다만, 이번만큼은 목숨을 내놓아야겠다.”
두 눈은 진양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마치 복면인에게 들으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을 복면인에게 내비친 것이다.
진양 역시 위사령이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흑의인들은 이 싸움에 연루된 자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쟁자수들조차 가차없이 죽였으리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보표들이 더욱 이를 갈며 흑의인들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진양도 몸을 빼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 없던 그로서는 내내 담담한 표정이었다.
진양은 표국 사람들을 둘러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단 나서긴 했는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구해낸단 말인가?
특히 무공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쟁자수가 스무 명 남짓이다. 그나마도 서너 명은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질 못했다.
무공을 할 줄 아는 자들은 기껏 열 명 정도다. 그중에서도 흑의인들과 대등한 수준을 가진 표두는 유설을 포함해 겨우 세 명.
만약 이대로 패싸움이 된다면 표국 사람들은 살아남기 힘들 터였다.
‘어떻게든 일대일의 대결을 유도해 봐야겠다.’
생각을 굳힌 진양이 한 걸음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선배님들께서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저도 연루됐으니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서로 간의 빚이 있다면 정당하게 일대일의 대결을 펼쳐서 승부를 짓는 것이 어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