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29
신필천하(神筆天下) 29화
강호상의 예절로 볼 때 진양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진양은 아직 강호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세상에는 정당함보다는 비열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복면인이 탁한 소리로 비웃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느냐? 어린 녀석은 잠자코 있어라!”
그러더니 그가 텁석부리사내와 흑의인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뭣들 하시오? 저깟 애송이 말을 정말 들을 참이오? 어서 끝냅시다!”
말을 마친 그가 쏜살같이 날아가 진양에게 일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흑의인들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표국 사람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진양이 얼른 뒤로 물러나며 복면인을 향해 발을 뻗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던 검날이 진양의 발끝에 차여 튕겨 나갔다.
하지만 복면인 역시 더 이상 진양을 얕잡아보지 않았기에 몸을 빙글 회전하며 곧바로 중심을 잡았다. 이어서 그가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진양은 뻣뻣하게 서 있던 자세에서 무언가에 튕겨지듯하늘로 솟구쳤다.
지둔도법의 철돈도약 초식이었다.
복면인은 진양이 그 상태에서 하늘로 솟구칠 줄이야 짐작도 못했기 때문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 찰나 진양이 양다리를 활짝 들어 올리며 두 손을 가랑이 사이로 내리고는 급격히 떨어져 내렸다.
마치 엉덩방아를 찧듯 떨어져 내리는 이 이상한 초식은 바로 질비고준이었다.
초식 하나하나가 괴상망측하기 짝이 없으니 복면인은 이내 검로가 흐트러져 반격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결국 양발바닥에 진기를 가득 싣고 몸을 튕겨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파앙!
진양의 두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마치 그 자리에 바위가 떨어진 듯 움푹 파였다.
만약 쌍장을 그대로 맞받아쳤다면 내상을 입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아악!”
고개를 돌려 보니 흑의인들이 쟁자수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있었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유설을 비롯한 표두들은 위사령과 흑의인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다른 표사들은 제 한 몸 지키는 데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진양은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가 얼른 유설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붓 자루를 휘둘러 위사령의 도를 튕겨내고는 소리쳤다.
“유 표두님! 우선 이곳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양 소협. 하지만 호송물을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어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양 소협부터 안전한 곳으로 피하세요.”
“이놈들!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느냐?”
위사령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도를 부렸다. 그의 도가 진양의 등짝을 향해 떨어지자, 유설이 얼른 검을 휘둘러 대신 막아냈다.
그사이에 복면인이 다시 진양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그야말로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는 공세였다.
진양은 몸을 이리저리 피하면서도 애가 탈 지경이었다.
연신 복면인의 검을 피하며 쟁자수들을 보호했지만, 역시나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쟁자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흑의인들의 칼에 쓰러져 갔다.
‘아, 내가 섣불리 나서서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렇게 죽게 생겼구나!’
진양은 강호에 나온 후로 소담화를 만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무공 대결을 펼쳤다. 때문에 그는 강호인의 모든 싸움이 그처럼 정당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곽연 부각주가 날 죽이려고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건만.’
진양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점점 자신을 잃어갔다. 제 한 몸을 지키는 것이라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여러 사람을 지키며 싸우려니 무척 힘이 들었다.
만약 표국 사람들이 전멸하게 되면 흑의인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진양이 제아무리 내공이 심후하더라도 십여 명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덤빈다면 결코 이겨낼 수 없을 터였다.
그때 표두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아 보이는 중년인이 소리쳤다.
“아가씨! 양 소협의 말대로 우선 몸을 피하시지요!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우선 살아야 빼앗긴 물건도 되찾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청년 표두도 동의하고 나섰다.
“도 표두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선 피하시지요!”
두 사람이 연이어 소리치자 유설이 참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쟁자수 중에는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고, 표사들도 상당수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두 사람의 말대로 더 이상 이곳에 남아 목숨을 걸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반면 유설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번에는 흑의인들이 조급해졌다. 혹시라도 그녀가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자칫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이에 위사령을 비롯한 흑의인들은 더욱 매섭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유설과 도 표두의 무공이 만만치 않았기에 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이때 진양이 얼른 그들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위사령을 비롯한 흑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위사령은 곧 상대가 진양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이때 복면인은 진양의 등을 노리며 검을 부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진양이 선풍유검 초식을 전개했다.
휘리릭!
이는 지난번 소담화가 펼친 적이 있는 변초였다. 바로 방(方) 자와 인(人) 자, 그리고 소(疋)의 결합을 이용한 것으로, 방(方) 자에 무게를 둔 변초였다. 즉,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중심에서 벗어나며 회피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찰나 복면인의 검이 진양을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진양은 그의 팔꿈치를 붓 자루로 툭 밀어 쳤다. 그러자 복면인의 검이 가속을 더해 그대로 위사령의 가슴으로 짓쳐들었다.
바로 상대의 힘을 끌어다가 또 다른 적을 치는 차력타력(借力打力)의 수법이었다.
느닷없는 공격에 위사령이 황급히 몸을 기울이며 도를 올려쳤다.
까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두 사람이 가까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위사령은 도를 급하게 올려친 데다 복면인의 검공이 자못 매서웠기에 약간의 내상을 입고 말았다.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난들 일부러 그랬겠소!”
복면인 역시 황당하여 마주 소리쳤다.
위사령은 이를 부득 갈고 더는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앗! 저놈들!”
마침 기회를 엿보던 표두들이 숲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를 진양이 바짝 쫓았다.
“놈들을 잡앗!”
위사령의 명에 흑의인 중 상당수가 표두들과 진양을 쫓아 숲으로 뛰어들었다. 위사령과 복면인도 곧바로 숲으로 달려갔다.
진양 일행은 숲을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뒤에서는 흑의인들이 추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쟁자수들은 흑의인들 손에 한 명도 남김없이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유설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혈사채가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금룡표국의 국주인 그녀의 아버지는 이번 표행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말하며 딸을 대표로 보냈다.
한데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느닷없이 습격을 받은 것이다.
만약 양진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설 일행은 괴한들의 정체도 모른 채 죽을 뻔했다.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물살이 거센 계곡이 나타났다. 일행이 잠시 망설이는데, 경공 실력이 낮은 표사 몇이 뒤늦게 도착하더니 소리쳤다.
“도 표두님! 저희는 계곡을 따라 하류로 달리겠습니다!”
도 표두라 불린 중년인은 표사들의 뜻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미끼로 삼을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흑의인들이 자신들을 쫓아올 동안 도 표두가 유설 아가씨를 모시고 멀찌감치 달아나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함께 도망치던 양진양도 그들의 충성심을 읽을 수 있었다.
‘이자들의 충정과 기개가 대단하구나!’
비록 무공은 높지 않지만, 주인을 향한 충정이 남다르니 진양은 절로 경외심이 우러나왔다. 그래서 그도 한 걸음 나서며 소리쳤다.
“좋소이다! 그럼 저도 여러분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자 도 표두가 얼른 말렸다.
“양 소협, 그러지 말고 우리와 함께 갑시다. 표사들이 방향을 나누어 달린다지만, 저쪽 고수들은 우리를 쫓아올 게 분명하오. 양 소협은 무공이 강하니 나와 정 표두랑 같이 아가씨를 지켜준다면 감사하겠소.”
그러자 유설이 얼른 도 표두를 나무랐다.
“도 표두님, 어째서 은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미 양 소협은 저희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으셨습니다. 어디로 가든 양 소협이 정하실 문제지요.”
그런데 진양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표사들마저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양 소협, 염치없지만 아가씨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대답도 듣기 전에 몸을 날려 계곡 아래로 달려갔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추격자들이 바짝 쫓아온 상황이었다.
결국 진양은 유설 일행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여길 건넙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도 표두와 정 표두가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설의 양팔을 잡고 계곡을 건넜다. 세 사람 중에서 유설의 경공 실력이 가장 낮았으므로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해 계곡을 건넌 것이다.
뒤이어 양진양이 단숨에 계곡을 건넜다.
진양은 따로 익힌 경공술이 없었지만, 워낙 내공이 심후한지라 어렵지 않게 계곡을 건널 수 있었다.
그들이 막 건너편 숲으로 들어설 때, 위사령과 복면인이 계곡 맞은편에 다다랐다.
위사령은 계곡 하류 지역으로 달아나는 표사들을 보고는 소리쳤다.
“너희 여섯 명은 저놈들을 쫓아라! 한 명도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여섯 흑의인이 나는 듯이 달려 내려갔다.
이어서 위사령과 복면인이 몸을 훌쩍 날려 계곡을 건넜다. 그들의 뒤를 남은 흑의인들이 이었다.
숲길을 따라 거침없이 달리던 진양 일행은 마침 암벽 아래에 난 작은 동굴 앞에 다다랐다. 사실 동굴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길이가 짧았다. 그저 서너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오목하게 파인 부분이었다.
진양이 멈춰 서 소리쳤다.
“여기서 기다립시다!”
“좋소!”
도 표두와 정 표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유설이 많이 지친데다 언제까지 도망만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네 사람은 좁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적들을 기다렸다.
“세 분은 안쪽에 계십시오. 제가 입구에서 막아보겠습니다.”
진양의 말에 도 표두가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잖아도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내가 먼저 저들을 막아보겠소.”
“아닙니다. 두 분께서는 제가 지치면 그때 나서주십시오.”
진양이 거듭 사양하자 도 표두가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양 소협. 우리가 이 위기를 넘기게 되면 양 소협께 반드시 사례를 하겠소.”
그때 정 표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왜 혈사채가 우리를 습격했을까요?”
“글쎄. 그건 정말 모를 일이군.”
도 표두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정 표두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들은 우리를 남김없이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저들의 정체를 아예 몰랐다면 살아남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이제 저들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