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
신필천하(神筆天下) 3화
대별산(大別山) 중턱 학립관 정문.
양진양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노인을 따라나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관주님의 말씀에 따라 여벌 옷까지 챙기고 나선 것이다.
성조영은 노인을 따로 이끌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언제쯤 돌려보내 주실 건지요?”
“돌려보내다니?”
“진양이 말입니다. 때를 알려주셔야 저희가 가서 데려오지요.”
그러자 노인이 이맛살의 주름을 더욱 깊게 새기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언제 돌려보낸다고 했던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아이를 돌려보낼 일은 없을 거네.”
“그럼 아예 데려가겠다는 말씀입니까?”
성조영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노인이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 셈이네.”
성조영은 뜻밖의 대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천상련에서는 가끔 학립관의 아이들을 데려가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 일정 시일이 지나면 아이들을 되돌려 보내주곤 했던 것이다.
물론 아예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럴 경우에는 학립관의 모든 과정을 수료한 아이들에 한해서였다.
한데 이제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양진양을 영영 데려가겠다니, 도대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일까?
어찌 됐든 천상련이 정한 일이다.
힘이 없는 학립관으로서는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성조영이 정문 곁에 서 있는 양진양을 힐끔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흥! 아이가 천상련에 들어온 이상 학립관이 신경 쓸 일은 아닐세.”
성조영은 노인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고 버틸 수도 없었다.
상대는 천보각주다.
학립관에서 무예 좋은 선생들을 모조리 동원하더라도 그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길 수 있다고 한들, 무림 사파의 지존이라 불리는 천상련을 상대로 밉보일 짓을 할 수야 없지 않나.
결국 성조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노인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을 따라가는 양진양을 측은한 마음으로 배웅하다 보니 어느새 학립관으로부터 삼 리나 벗어나 있었다.
노인이 몸을 돌려세우더니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자네, 천상련까지 따라올 생각인가?”
“아, 아닙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노인은 그저 콧방귀만 뀔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조영이 그에게 다가가 은자 석 냥을 쥐어주었다.
“여비에 보태십시오. 혹시 진양이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이 돈으로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흥! 여기서 천중산(天中山)까지 얼마나 된다고 이러나? 아니면 날 이 아이의 유모쯤으로 여기나 보군!”
“그럴 리가요.”
성조영은 손사래를 치고는 양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양이 학립관에 들어올 때부터 타고난 재주를 눈여겨보고 다른 아이들보다도 예뻐했다.
한데 이제 영영 학립관을 떠나게 됐으니 못내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하필이면 떠나게 된 곳이 천상련이니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진양아, 천상련으로 가거든 각주님의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아무쪼록 몸 건강히 잘 지내도록 하여라.”
“네, 관주님. 관주님도 항상 건강하세요.”
양진양은 공손한 자세로 대답하고는 돌아섰다.
갑자기 학립관을 떠나게 된 진양이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줄곧 거처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에 지금도 별로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조영보다도 더욱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일 년여의 시간을 학립관에서 보내면서 그동안 쌓였던 정이 있는지라 관주님과 헤어지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성조영은 미소로 답하고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저만치 언덕을 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쯤에서야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2. 천상련으로
양진양은 부지런히 노인을 따라 길을 걸었다. 노인은 줄곧 관도를 이용해서 걸었지만,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진양으로서는 뛰고 걷기를 반복해야만 겨우 나란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양진양도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가 아프고 발이 퉁퉁 붓기 시작해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국 언덕길을 오르던 진양이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앞서 걷던 노인이 힐끔 돌아보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
“어서 일어나지 않고 뭐하느냐?”
“각주 어르신, 조금만 쉬었다가 가요.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걷지 못하겠어요.”
“겨우 얼마를 걸었다고 엄살이냐?”
노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진양도 더는 조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리하게 걸은 데다 발이 심하게 부어오른 상황이라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보다 못한 노인이 진양에게 다가왔다.
“어디 한번 보자.”
진양이 눈치를 살피며 발을 내밀었다.
노인은 진양의 다리와 발목을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진양의 발목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부어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더랬지.’
그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속도가 빠르다곤 할 수 없었지만, 평범한 아이가 따라오기에는 분명 힘겨웠을 터다.
그는 무의식중에 진양이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힌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상련에 소속된 아이라면 걸레질을 하는 시동조차도 기본적인 무공은 익히게 마련이다. 때문에 노인은 지금까지 평범한 아이의 걸음 속도를 한 번도 맞춰줘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평소의 습관대로 진양을 데리고 걸었던 것이다.
‘제법 오래 버틴 게로군.’
노인은 길가의 바위로 가서 걸터앉았다.
“이리 와서 앉아보아라.”
양진양은 이제야 겨우 쉴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기꺼운 마음으로 바위까지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러고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자 노인이 진양의 오른쪽 발목을 만지더니 가만히 힘을 주었다.
순간 시원한 기운이 발목을 통해 줄기줄기 들어왔다. 이내 진양은 다리가 노곤해지고 발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노인은 왼쪽 발목도 같은 방식으로 만져 주고 나서는 퉁명스레 말했다.
“일각 정도 쉬었다가 가도록 하자.”
“네!”
양진양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노인이 발목을 만져 준 이후로는 통증이 확연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발의 붓기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진양은 노인을 보면서 어쩌면 무서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일각이 흐르고 두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고함 소리와 기합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이윽고 언덕 아래에서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예닐곱 명의 무인이 눈에 들어왔다.
양진양이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니 다섯 명의 무인이 두 사람의 남녀를 공격하고 있었다. 두 남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관심 밖인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양진양이 얼른 노인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각주 어르신, 저 아래에서 싸움을 하고 있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노인의 반응이 냉랭하기만 하자 진양은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이고는 가만히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갈수록 언덕 아래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는 오히려 점점 가까워지기만 했다. 이윽고 바로 등 뒤까지 소리가 따라붙었다 싶더니, 백의를 걸친 남자가 적에게 일격을 당하고 노인 쪽으로 날아왔다.
“앗!”
양진양이 깜짝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자칫하다가는 남자가 노인의 등을 그대로 덮치게 생긴 것이다.
한데 노인은 남자와 부딪치기 직전, 몸을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리더니 이어서 왼손으로 남자의 등을 툭 떠밀었다. 그 덕분에 남자는 노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아……!”
양진양이 안도와 감탄의 탄성을 흘렸다.
한편 백의남자는 노인의 뛰어난 순발력에 내심 놀랐지만 애써 침착한 태도를 보이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선배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쯤 되자 노인으로서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고개를 힐끗 돌려 바라보니 백의남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체구가 건장한 청년이었다. 손에는 기다란 장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는데, 곧게 뻗은 날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젊은 여자가 날듯이 다가왔다. 그녀 역시 백옥처럼 흰 피부에 눈망울이 영롱한 미녀였다. 그녀가 백의남자에게 물었다.
“원 사형, 괜찮으세요?”
“괜찮아. 사매는 좀 어때?”
“저도 괜찮아요.”
여자가 짐짓 힘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는 몹시 거칠었다. 게다가 격한 싸움으로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체력이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매가 힘들어하고 있어. 어떻게든 수를 내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을 공격하던 다섯 무인이 사방을 포위했다.
백의남자가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텁석부리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과 우리가 서로 원수진 일이 없을진대, 어째서 이렇게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오?”
“흥! 원수진 일이 없긴 왜 없느냐? 네놈들이 내 아우의 손가락 두 개를 자르지 않았더냐?”
“하지만 그건 그자가 먼저 사매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소!”
“어쨌든 네놈들도 손가락 두 개를 내놓아라!”
“그럴 수는 없소이다!”
“그럼 목을 가져갈 수밖에!”
텁석부리사내가 날이 시퍼런 도를 휙 저으며 다가왔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네 명의 무인도 살기를 드러내며 두 남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드러나는 살기만 보아도 이들 다섯 명의 무예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상황이 좋지 않게 흐르자 문득 손을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잠깐!”
“뭐냐?”
“여기 이 싸움에는 무관한 어르신과 아이가 있으니, 은원을 따지는 건 잠시 미루는 것이 어떻겠소?”
남자는 짐짓 두 사람의 안위를 위하는 척 말했지만, 사실 노리는 바가 따로 있었다.
만약 텁석부리사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잠시나마 시간을 끌면서 쉴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러는 동안 대책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기대를 거는 쪽은 바로 정체불명의 노인이었다.
남자는 조금 전 노인과의 접촉을 통해 상대가 상당한 무공을 익힌 고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노인이 자신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동해서 싸움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다음 순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노인은 남자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던 길을 재촉할 뿐이었고, 텁석부리사내 역시 한마디로 제안을 묵살했다.
“흥! 어림없는 소리!”
사정이 이렇게 되자 남자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이제는 사매와 단둘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