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0
신필천하(神筆天下) 30화
그 말에 진양이 속으로 뜨끔했다.
그들이 혈사채라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위사령은 자신이 알아보자 표정을 굳히더니 곧바로 죽이려고 했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사실 진양이 이토록 무리해 가면서까지 이들을 도와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설프게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이들을 더욱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생각이 진양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정 표두의 말을 들어 보니 은연중에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아서 못내 마음이 괴로웠다.
유설이 분위기를 눈치채고 얼른 말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했어요. 나타나자마자 쟁자수들마저 거침없이 죽였으니까요.”
“흐음, 그래도 참 안타깝게 됐습니다. 양 소협도 이렇게 말려들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기습을 가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보이는 창은 막기 쉬워도 숨어 쏘는 화살은 막기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양 소협도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진양이 말려든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진양의 경솔함을 교묘하게 탓하고 있는 것이다.
진양도 면목이 없던 터라 그저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후배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공연히 여러분을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유설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오히려 양 소협 덕분에 그들의 정체라도 알게 됐으니 반드시 살아남아서 복수를 해야죠.”
도 표두가 동조했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요. 아니, 제가 아가씨를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때마침 위사령과 복면인이 흑의인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들은 네 사람이 좁은 동굴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흐흐, 뛰어야 벼룩이지.”
위사령이 도를 휘두르며 천천히 걸어왔다. 복면인과 흑의인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동굴은 좁았기 때문에 먼저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일대일의 싸움이 가능했다.
위사령이 천천히 다가서며 진양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동생과 나는 악연인가 보군. 내세에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세.”
“굳이 내세까지 갈 것 있습니까? 당장에라도 위 선배께서 도를 내려놓는다면 우린 좋은 인연이 되겠지요.”
“하하, 그건 사정상 그럴 수가 없겠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진양이 말을 받자마자 위사령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타다닷! 휘익!
진양은 얼른 몸을 눕히며 대각선으로 후려 오는 도를 피했다. 동시에 쌍장을 뻗어내며 기를 한껏 발출했다.
퍼펑!
위사령이 얼른 몸을 뒤채며 피했다.
그를 스쳐 간 장풍이 멀찌감치 서 있는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나무는 한차례 부르르 떨면서 입을 우수수 떨쳐 냈다.
위사령은 도를 허리춤에 넣고는 손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좁은 동굴 입구에서 싸우다 보니 도를 들고 싸우기에는 오히려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펑! 퍼펑! 펑!
두 사람의 장이 서로를 스쳐 가며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들의 출수가 어찌나 빠르고 현란하지 지켜보는 자들은 잠시 넋을 놓고 구경하기에 바빴다.
위사령은 내심 놀랐다.
‘그 조그맣던 꼬마 녀석이 몰라보게 성장했구나! 도대체 무슨 무공을 익혔기에 이렇게 내공이 강해진 걸까? 이대로 싸우면 내가 불리하겠다!’
사실 위사령 정도면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비록 절정고수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어지간한 중소 문파의 문주는 이길 정도의 실력이었다. 게다가 그는 혈사채에서 흑호왕(黑虎王)이라고 추앙받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무인이었다.
다만 도법이 장기인 그가 지금은 장법을 사용하고 있고, 좁은 동굴에서 주로 내력을 이용한 대결을 펼치고 있으니 싸움이 쉽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진양을 동굴에서 서서히 끌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른바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를 쓸 작정이었다.
위사령은 일부러 매섭게 공격하는 척하면서 조금씩 허점을 내보이며 차츰 물러났다.
진양은 점점 우위를 점하게 되자 자신감을 되찾아갔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진양으로서는 상대가 속임수를 쓴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 지켜보던 도 표두가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앗, 위험하오! 양 소협!”
하지만 그가 소리쳤을 때는 이미 진양이 동굴 입구에서 두 장 정도나 나아갔을 때였다.
도 표두가 진양의 등을 보호하기 위해 얼른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 순간 흑의인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랏!”
그가 일갈을 터뜨리며 검을 휘두르자, 앞을 가로막았던 흑의인이 팔 하나를 잃고 쓰러졌다.
“크악!”
하지만 이내 흑의인 두 명이 양쪽에서 합공을 가하자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게 됐다.
그제야 진양도 자신이 너무 심취한 바람에 상대의 유인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가기에는 늦어 버렸다.
그때 복면인이 진양의 배후로 다가들며 검을 곧게 내찔렀다. 위사령을 상대하기에도 바쁜 진양은 그를 미처 막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언제 어떻게 따라왔는지 숲에서 흡혈마가 맹수처럼 달려나오더니 복면인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복면인이 깜짝 놀라서 검을 돌려세웠지만, 흡혈마가 어디 보통 말이던가?
이히히힝!
흡혈마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내지르니, 복면인은 그만 발길질에 팔을 얻어맞고 검까지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화가 잔뜩 난 복면인은 순간 신법을 이용해 흡혈마의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기를 잔뜩 싣고 흡혈마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퍼억!
이히히힝!
흡혈마가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며 비틀비틀 물러가다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복면인은 말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진양의 등을 노리며 쇄도했다.
이때쯤 위사령은 도를 뽑아 들고 휘두르고 있었기에 진양은 한창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때문에 진양도 이제는 정말 복면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가거라!”
복면인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진양의 등에 일장을 먹였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나며 진양의 몸이 비틀 흔들렸다.
동굴 입구 쪽에서 싸우던 도 표두도 놀라서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한데 갑자기 복면인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느닷없이 선혈을 울컥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커억! 우웨엑!”
반면 진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위사령의 도를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복면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거칠게 피를 토해냈다.
그가 진양의 등에 일장을 날렸을 때, 진양의 몸에서 자양진기가 자연스럽게 호체신공을 일으킨 것이다. 때문에 복면인은 자신이 내지른 공력을 고스란히 되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내막을 정작 진양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복면인이 흡혈마에게 얻어맞으면서 내상을 입었나 보다 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한편 위사령은 복면인이 까닭없이 쓰러지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진양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매에 감춰두었던 붓을 들어 잽싸게 내찔렀다.
위사령은 미처 진양의 붓을 보지 못하고 그만 왼쪽 어깨 견정혈(肩井穴)을 찔리고 말았다. 그는 몸이 찌르르 울리며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진양은 이어서 가슴의 신봉혈(信封穴)과 옆구리 밑의 연액혈(淵液穴)을 차례로 짚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위사령의 왼편으로 돌아가서 무릎 뒤쪽의 음곡혈을 걷어차서 거꾸러뜨렸다.
진양이 점혈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순전히 천상련에서 읽었던 의술서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발길질은 육 년 전 풍천익이 위사령을 자빠뜨릴 때 썼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졸지에 사지가 마비된 위사령은 풀썩 쓰러진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두 사람이 연이어 쓰러지자 흑의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지금이에요!”
마침 유설이 정 표두와 함께 동굴에서 달려나왔다.
무공이 가장 강했던 위사령과 복면인을 꺾었으니 더 이상 그들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흑의인들은 몇 차례 맞서 싸우다가 사세가 불리해지자 곧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도 표두와 정 표두가 흑의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사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복면인은 해쓱해진 안색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진양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졌다! 날 죽여라!”
그러자 유설이 소리쳐 물었다.
“당신, 누구죠?”
“흥! 대답한들 네놈들이 날 살려두겠느냐? 어서 죽여라!”
진양이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죽일지 살릴지는 표국 사람들이 정할 겁니다. 전 우연히 이 일에 끼어들었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더 이상 개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때였다.
복면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진양에게 무언가를 뿌렸다.
삐잉! 삐잉!
예리한 소리가 울리며 새털처럼 가는 침이 진양에게 날아왔다. 진양은 순간 가슴과 옆구리가 따끔한 것을 느끼고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워낙 가는 침이었기에 그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복면인이 벌떡 일어나서 숲속으로 달려갔다.
“앗! 거기 서!”
유설이 고함을 지르며 복면인을 뒤쫓았다.
진양도 복면인을 추격하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어어?”
진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틀거리자, 유설이 돌아보고는 추격을 포기하고 얼른 돌아왔다.
“괜찮아요?”
진양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네, 잠시 현기증이…… 어서 추격합시다!”
진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경공을 펼치려고 했다. 한데 이번에도 머리가 핑 돌더니 그만 발이 뒤엉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양 소협!”
유설이 깜짝 놀라며 부축했다.
“이거…… 내가 왜 이러지?”
진양은 왜 이렇게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설이 가만 보니 진양은 아무래도 독침에 당한 듯했다.
때마침 흑의인들을 추격하러 갔던 도 표두와 정 표두가 돌아왔다.
도 표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양 소협께서 독침에 당한 것 같아요!”
“무슨 독인지 아십니까?”
유설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편 진양은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독침을 맞은 건가? 그럼 아까 따끔하던 감각이…… 그렇구나. 그 복면인이 날 속이고 내게 독침을 던졌구나. 강호에는 정말 비열한 인간이 많구나.’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도 표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침이 너무 가늘어서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정 표두, 혹시 흡철석(吸鐵石) 가지고 있는가?”
“아뇨. 수레가 있는 곳에 돌아가면 있을 겁니다.”
“흐음. 아직 거기에 있을지…….”
유설이 말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 목숨만 노린 듯하니 어쩌면 호송물이 그대로 있을지도 몰라요. 혹시 혈사채가 또 무리를 끌고 올지 모르니 서둘러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양 소협, 조금만 참으시오. 다행히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맹독은 아닌 듯하니 곧 나아질 거요.”
그때 정 표두가 쓰러진 위사령을 보고 말했다.
“제가 저자를 업고 가겠습니다.”
“그러게나. 내가 양 소협을 업도록 하지.”
진양은 몸이 축 늘어진 채 도 표두의 등에 업혔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도 표두의 등에 업히니 진양은 내심 송구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죄송…… 합니다, 도 표두님.’
하지만 독 기운이 퍼져서 그런지 진양은 어지럼증 때문에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그는 도 표두의 등에서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