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2
신필천하(神筆天下) 32화
‘역시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쫓으려니 힘들구나. 혹시 위사령이 달아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스스로 포승줄을 풀 수 있었던 것일까?’
그가 곰곰이 생각하는데, 문득 옆의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진양은 얼른 커다란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상대는 진양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소리가 지척에 다다랐을 때, 진양이 성큼 나섰다.
“누구냐! 어?”
“음?”
진양은 상대방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고, 상대방도 진양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 표두님?”
“양 소협,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풀숲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정여립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진양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 정 표두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위사령이 달아났다는 말씀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정여립이 다소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눈초리가 비교적 위로 추켜올라간 인상이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니 더욱 그 표정이 매서워 보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양이 순진하게 되묻자 정여립이 차갑게 대꾸했다.
“지금 위사령이 사라진 것을 보고 찾는 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양 소협이야말로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저도 위사령이 사라진 것을 보고…….”
“위사령이 사라진 것을 보셨단 말씀은, 위사령이 잡혀 있던 마차에 다가갔단 말씀이지요?”
이쯤 되자 진양은 정여립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양은 내심 기분이 나빴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마차에 다가가 보니 위사령은 이미…….”
“사라졌다?”
“그렇소.”
“거참, 이상한 노릇이군요. 그 포승줄은 제가 묶어서 잘 아는데, 절대로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이지요.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 한.”
진양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발끈해서 소리쳤다.
“정 표두님! 지금 날 의심하는 겁니까?”
“이런, 내가 언제 양 형을 의심한다고 했소?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상의하고자 말을 꺼냈지요. 너무 흥분하는군요. 아니면 혹시 정말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한 건 아닙니까?”
“당치도 않는 소리지요! 내가 왜 위사령을 풀어준단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지요.”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게 되자 이내 숲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유설과 도장옥이 나타났다. 유설은 서로 강렬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진양이 입을 열었다.
“위사령이…….”
“위사령이 사라졌습니다.”
정여립이 얼른 말을 앞질렀다.
그러자 도장옥이 깜짝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위사령이 사라졌다고?”
“예. 포승줄도 끊어져 있었습니다.”
정여립이 대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진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장옥도 그 의미를 아는 터라 정여립을 엄하게 나무랐다.
“그만하시게! 아무렴 양 소협께서 그러실 분인가!”
“그래요, 정 표두. 양 소협은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에요.”
하지만 정여립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요?”
“어떻게 정확히 혈사채의 습격을 받은 순간에 나타났을까요? 뭔가 노리는 것이 있지 않는 바에야…….”
“정 표두, 말이 지나치지 않은가!”
도장옥이 얼른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그가 대신 진양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하오, 양 소협. 다소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오.”
“별말씀을요. 제가 봐도 오해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진양이 겸사로 대답하는데, 정여립이 다시 조소를 지었다.
“보십시오.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습니까? 도 표두님, 저자는 위사령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지만요. 저는 위사령이 사라진 것을 보고 숲속으로 들어왔고, 위사령은 찾지 못했지만 저자를 여기서 보았지요. 그러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양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대꾸했다.
“나도 위사령이 사라진 것을 보고 인기척을 쫓아 들어온 것이오.”
“흥! 그렇다면 왜 거기 숨어 있었던 거요?”
“인기척을 놓쳤소. 그래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또 인기척이 들리더군. 그래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소. 한데 나타난 사람이 당신이었소.”
“위사령을 풀어주고 돌아오는 길은 아니었고?”
“이보게! 정 표두!”
도장옥이 다시 나서서 버럭 소리쳤다. 그가 정여립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만하시게! 그리고 포승줄을 끊은 것이라면 칼이 있어야 할 텐데, 양 소협은 칼을 가지고 있지도 않잖은가?”
“혹시 모를 일이지요. 이 일대를 찾아보면 버려진 단검이라도 나올지.”
“그만하세요.”
이번에는 유설이 나섰다.
그녀가 직접 나서니 정여립도 더 이상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정여립을 향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남을 모함해선 안 되죠.”
“죄송합니다, 아가씨.”
“양 소협은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에요. 이번 일은 위사령을 확실히 감시하지 못한 정 표두님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그러니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죠. 위사령이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혈사채라는 것을 알았으니 표국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께서 어떻게든 해결하실 거예요.”
“예, 아가씨.”
정여립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유설은 송구한 표정으로 진양에게 사죄했다.
“죄송해요, 양 소협. 저희의 실수로 괜히 양 소협을 곤란하게 만들었군요. 저를 봐서라도 정 표두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진양은 짐짓 소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내심은 당장에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더니 이제 와서 도적과 한패거리 취급을 하다니.
물론 도움을 주었다는 표현이 다소 어울리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자신은 독에 당하지 않았는가. 역시 억울하고 화가 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나자니 그 또한 너무 속 좁아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이대로 자신이 떠난다면 정여립은 더욱 자신을 의심할 게 틀림없었다.
때문에 진양은 그저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표행은 응천부에 들어섰다.
명나라가 세워지기 전 이곳은 집경(集慶)이라고 불렸지만, 주원장이 집경을 점령하고 나서는 응천부로 개명했다. 그리고 명이 세워진 후에는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성벽을 축조했다.
예전에도 이곳은 사람이 많았지만 도읍으로 정해지고 나서부턴 더욱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표행의 마차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응천부에서 비교적 동쪽 외곽에 위치한 금룡표국을 향해 나아갔다.
진양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거리를 처음으로 보았다. 때문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어린아이처럼 여기저기 구경하기에 바빴다.
한참을 가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도 조금씩 뜸해졌다.
마차도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에 진양도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나아가다 보니 전방에 대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담장이 장원을 두르고 있었고, 대문은 크고 높아서 장엄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대문 양옆으로는 금룡표국의 커다란 깃발이 높이 내걸려 있었다.
미리 소식을 들었는지 표국에서 중년인이 달려나와 유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국주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유설은 아버지의 극성을 아는지라 응천부에 도착하고 나서야 사람을 미리 보내서 그간의 일을 아뢰도록 했다.
지금 그녀를 맞이하는 사람은 바로 금룡표국의 총관 직을 맡고 있는 심일태(沈一太)였다. 그는 눈가에 잔주름이 많은 탓에 나이가 실제보다도 더 들어 보였는데, 매사에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그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국주는 지금쯤 버선발로 딸을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심일태가 몸을 돌려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문을 열어라!”
“옛!”
문지기들이 커다란 문을 밀었다. 지도리와 돌쩌귀에 기름칠이 잘된 탓인지 육중한 문짝은 삐걱거리는 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마차 세 대가 여유있게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진양은 유설을 따라 걸으면서도 으리으리한 장원을 둘러보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자면 천상련이 이곳보다 훨씬 넓고 웅장했지만, 그곳에서는 자유가 없었다.
한데 여기서는 이렇게 마음껏 돌아다니며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으니 감개가 무량할 뿐이었다.
유설은 진양을 이끌고 서쪽 사합원으로 걸어갔다. 내정을 지나 그녀가 대청까지 들어서자, 지금껏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던 중년인이 얼른 달려왔다.
“오오! 설아, 설아! 네가 무사하구나!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디 보자, 내 딸.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아픈 데는 없고?”
그는 연신 유설의 얼굴을 살펴보며 물었다.
유설이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전 괜찮아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착한 내 딸.”
그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설을 다독였다. 그가 바로 금룡표국의 국주이자 유설의 아버지인 유인표(柳仁慓)였다.
유설이 몸을 물리며 진양을 가리켜 소개했다.
“아버지, 이분이 우리를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금룡표국의 국주 어르신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양진양이라고 합니다.”
진양이 양손을 맞잡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유인표는 이미 대략의 사정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한데 막상 진양을 보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이렇게 어릴 것이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유인표라고 하오. 딸아이를 구해주어서 정말 감사드리오, 양 소협.”
그가 어린 상대에게 깍듯이 예를 차려 대하자, 진양도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룡표국이 천하에 명성을 드날린다더니 이분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구나.’
유인표는 얼른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으시지요. 설아, 너도 이리 와서 앉아라.”
“네, 아버지.”
세 사람은 대청 한쪽에 놓인 탁자로 걸어가서 앉았다. 잠시 후 시녀가 쟁반에 찻잔을 담아왔다.
유인표가 진양을 향해 말했다.
“딸아이가 여러모로 신세를 졌다고 들었소. 어찌 사례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사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게다가 전 한참 어리니 어르신께서는 말씀을 낮추어주십시오.”
“허허, 딸아이의 은인이신데 그럴 수야 없지요. 참, 독에 당했다고 들었소. 상처가 좀 어떻소?”
“내력을 함부로 사용할 순 없지만 큰 부상은 아닙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진양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유인표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 어린 친구에게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나이도 한참 어려 보이는데, 수양이 깊은 어른들보다도 침착하고 도량이 넓구나. 참으로 인재로다.’
그는 원래 적당히 사례하고 진양을 보낼 생각이었다. 한데 대화를 나눠 보니 점점 호감이 생겨났고, 어떻게든 이 어린 친구를 돕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반드시 양 소협의 독을 치료해 드리도록 하겠소. 이곳 응천부에는 사람이 많으니 독에 대해 지식이 많은 의원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표사 중 한 명이 일전에 독공에 당했는데, 한 의원이 약방문을 지어주어 지금 치료 중이라오. 그러니 한동안은 우리 집에서 지내시구려.”
“그렇게 하세요, 양 소협. 어차피 말도 치료해야 할 테니까요.”
진양은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송구한 마음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