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3
신필천하(神筆天下) 33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 미약하나마 제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허허, 말씀만으로도 감사하오.”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차를 다 마신 진양은 두 부녀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서 슬슬 일어나려는 눈치를 보였다.
유인표 역시 진양의 배려를 알아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먼 길을 오느라 많이 피곤하실 텐데 묵을 곳을 안내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국주 어르신.”
진양이 일어서서 답례하자, 시녀가 다가와서는 그를 데려갔다.
진양이 대청을 나가자 유인표가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로구나. 나이도 많이 어려 보이는데…….”
“만약 양 소협이 아니었다면 우린 그자들이 혈사채라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유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잠시 후 그녀가 근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혈사채가 왜 우리를 공격했을까요?”
“흐음. 글쎄다. 원래 녹림이 표국을 습격하는 일이야 자주 있어왔던 일 아니겠느냐?”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어요. 마치 물건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유설은 뒷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당시의 일을 생각만 해도 팔뚝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들은 분명 표국 사람들을 몰살시키려고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표행을 여러 번 다녀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유인표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구나. 하지만 아무리 놈들이 배짱이 두둑해도 이곳까지 쳐들어오진 못할 것이니 이제 안심하거라. 그 일은 아비가 천천히 알아보마. 당장은 쌓인 일이 산더미라 정신이 없구나.”
“네, 아버지.”
유설이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나마 귀환하던 중에 습격당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표행을 떠나는 길에 그런 습격을 당했더라면 호송물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표두들마저 모두 죽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말 양 소협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양진양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유인표는 그런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우리 딸이 연하를 마음에 둘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괜한 말씀 마세요, 아버지. 그런 것 아니에요.”
“흐음, 그래? 이 아비가 잘못 본 모양이군.”
“물론 양 소협은 훌륭한 분이에요. 비록 나이가 어리다지만 기개가 있고 의협심이 남다른 분이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자를 그리워하는 게냐?”
유인표의 물음에 유설이 낯빛을 붉혔다. 아무리 허울없이 대화를 나누며 지내는 부녀지간이라지만, 역시 이런 이야기는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워낙 아버지와 가까이 지낸 유설이라 딱히 부정하지도 않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인표가 혀를 끌끌 찼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어찌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자를 마음에 둘 수가 있다더냐?”
“만난 적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넌 그자를 모르지 않느냐? 그자는 너를 보고 기억하고 있다지만.”
“그렇긴 하지만…….”
“만약 그자가 천하에 못생긴 추팔괴면 어쩌려고?”
유인표가 짓궂은 농담을 던지자 유설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외모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마음이 고와야지요.”
“한번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마음이 고운 줄은 어찌 알겠느냐? 지난 세월 겨우 서신만 주고받지 않았더냐?”
“글씨는 마음을 나타내는 창이에요. 그분의 글씨를 보자면 제 마음마저 평안해지는 걸요. 그런 분이 결코 악한은 아닐 거라 믿어요. 다만…….”
유설이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껏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이 있었다.
벌써 오래된 일이었다.
그녀는 상대를 보지도 않았지만, 그의 서신 내용과 글씨만 보고도 그리움에 빠져 버렸다. 언제부턴가 그의 서신만 읽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달콤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한데 그 서신이 일여 년 전부터 오지 않았다. 그녀가 여러 번 인편으로 서신을 보냈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답장이 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 답장조차도 그녀가 기다리던 것이 아니었다. 분명 다른 누군가가 상대를 사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필체가 아니었고, 그의 문장이 아니었다. 여전히 수려한 필체와 멋진 글귀들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유설은 더욱 그리움에 젖고 말았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그리워하자니 여간 마음이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표국 일에만 몰두하게 됐고, 이번 표행도 그 바람에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나서기로 한 것이었다.
유인표가 유설의 어두운 표정을 읽고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래도 이 아비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구나. 기껏 서신만 보고 마음이 흔들리다니. 하여튼 요즘 젊은이들이란…….”
유인표는 그 서신을 본 적이 없었다.
유설의 입장에서는 왠지 낯부끄러워서 보여주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그러니 더욱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유설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양진양은 금룡표국에 머물면서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금룡표국은 그를 은인처럼 대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챙겨주는 바람에 민망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유인표는 응천부 곳곳에 방을 붙여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을 모집했다. 벌써 여러 명이 진양의 방에 들러 몸을 진찰하고 여러 가지 약재를 사용해 봤지만 하나같이 효력이 없었다.
결국 숱한 의원들이 두 손 두 발을 들며 물러났고, 오히려 치료하기 어려운 독이라는 소문만 퍼져 괜히 망신을 당할까 봐 겁이 난 의원들이 찾아오지도 않게 됐다.
진양은 이렇게 된 바에야 금룡표국을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난치병이라면 괜히 신세를 져서 표국에 피해를 끼치기는 싫었던 것이다.
진양이 시종을 시켜 물어보니 마침 흡혈마도 어지간히 기운을 회복해서 걸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내가 지금 떠난다고 말하면 은혜를 반드시 갚고자 하는 표국 사람들은 나를 말릴 거야. 차라리 흡혈마를 끌고 가 문전에서 작별을 고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을 정리한 진양은 마구간으로 걸음을 돌렸다.
한데 막 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데, 마침 객당으로 들어서던 유인표와 마주치고 말았다.
유인표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진양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양 소협, 어딜 가는 길이오?”
사정이 이리되자 진양도 더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간 너무 오래 신세를 졌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길을 떠날까 합니다.”
“아직 독을 치료하지도 못했는데 어찌 이리 서두른단 말이오? 그러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곧 훌륭한 의원이 찾아올 거요.”
진양은 유인표에게 깊은 감동을 느끼며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 병이 고황(膏?)에 들었나 봅니다. 지금껏 여러 의원이 치료하지 못한 것을 보면 쉽게 나을 병이 아닌 모양입니다. 더 이상은 폐를 끼칠 수 없지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옛말에도 죽은 말을 놓고 산 말처럼 치료한다고 하지 않소. 의원들이 여럿 다녀갔으니 이제 더욱 입소문을 타고 유능한 의원이 찾아올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구려.”
유인표는 말을 꺼내면서도 내심은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근래에 들어 찾아오는 의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진양이 아니었다. 때문에 진양은 오늘만큼은 물러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시녀 한 명이 급히 달려오며 유인표를 불렀다.
“주인마님, 의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오, 마침 잘됐구나. 양 소협, 나와 함께 갑시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찾아온 사람은 만나보아야 할 일 아니겠소?”
“그러지요.”
진양도 그마저는 거절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유인표와 진양이 사합원 대청으로 들어서자 마침 시종이 손님에게 차를 내오고 있었다.
한데 가만 보니 의원이라고 찾아온 자는 나이가 지긋한 노파였다. 게다가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추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유인표는 얼른 탁자에 마주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유인표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요?”
노파는 차를 마시다가 고개를 들어 유인표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냥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의원일 뿐이오.”
“그러시군요. 높으신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존함이라고 할 것까지 뭐 있겠소? 그저 백파(白婆)라고 불러주시오.”
유인표는 상대의 차가운 태도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 그런데…….”
“확실하오?”
백파가 말을 가로지르며 묻자, 유인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얼 말씀하시는지요?”
“돈! 독을 치료해 주면 은자 이백 냥을 준다던데?”
그제야 유인표는 이 노파가 은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까지 찾아오는 의원 중에도 이렇듯 돈을 노리고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진양의 독을 치료하지 못했다. 오히려 돈을 밝히는 자들일수록 더 빨리 포기하고 물러났다. 때문에 유인표는 내심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대답했다.
“치료만 할 수 있다면 이백 냥을 드리지요. 단, 치료를 하지 못한다면…….”
“환자는?”
이번에도 백파가 말을 가로지르며 물었다.
아무리 후덕한 인심을 가진 유인표라지만, 말끝마다 가로채이자 내심 기분이 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백파를 무시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이런 자가 제대로 된 의원일 리가 없지.’
그가 별 기대를 가지지 않고 진양을 소개했다.
“양 소협,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백파, 이분이 환자입니다.”
진양이 다가오자, 그를 힐끔 바라본 백파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하지만 그 눈빛의 변화는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진양이 자리에 앉자 유인표가 사정을 설명했다.
“양 소협은 지난번 우리 표국을 돕다가 독침에 당했습니다. 독침을 뽑아낸 건 한 식경 정도 지난 후였고…….”
그런데 이번에도 백파는 유인표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더니 불쑥 팔을 뻗어 진양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맥을 짚었다.
말을 꺼내던 유인표는 머쓱해진 기분이 들어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유인표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흥! 치료도 할 수 없으면서 뭣하러 왔겠소?”
백파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마치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였지만, 유인표도 이번만큼은 마음에 두지 않고 되물었다.
“정말 독을 치료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이렇게 선뜻 치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진양 역시 뜻밖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파를 쳐다보았다. 백파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진양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다가 말했다.
“치료하는 거야 대수롭지 않지. 한데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