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5
신필천하(神筆天下) 35화
진양이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마침 유설이 객당으로 들어서며 진양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양 소협, 몸은 좀 어떠신가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약이 많이 쓰다고 들었어요. 매일 밤 맞는 침도 무척 아프다고 하던데요.”
유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그동안 시종으로부터 진양의 치료 과정에 대해서 줄곧 들어왔던 것이다.
진양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자칫 유설에게 침과 약을 두려워하는 철없는 소년처럼 비칠까 봐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정말이지 백파가 놓는 침은 세상의 그 어떤 고문보다도 지독했다.
게다가 약은 또 어떤가.
한 모금만 마셔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져 토할 것만 같았다.
유설은 진양의 반응을 보고 근심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 의원이 치료할 수 있긴 한 걸까요? 침술과 약이 너무 지독하다고 하니 오히려 걱정되네요.”
“백 의원님도 노력하고 계시니 곧 차도가 있겠죠.”
“하지만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으니…… 아, 죄송해요. 제가 실례되는 말을…….”
“아니에요. 다 절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인 걸요.”
진양은 유설이 이처럼 자신을 생각해 주자 내심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와 같은 생각을 완전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벌써 칠 주야가 흘렀건만 몸에 나타나는 뚜렷한 변화는 없었다. 치료를 시작한 첫날에는 분명히 차도가 나타났다. 그런데 사흘 정도가 지나자 증세는 다시 나빠졌다. 그러다가 엿새가 지나자 다시 좋아졌고, 지금은 또 약간 나빠진 상태였다.
증세가 호전됐다가 악화되길 반복하니 진양으로서도 의심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날은 침술을 놓으러 온 백파에게서 술 냄새가 훅 끼쳐 올 때도 있었다.
‘혹시 그 노파가 어쩌면 일부러 날 낫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닐까? 처음부터 노파는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한편 유설은 진양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고는 자신이 괜한 이야기를 꺼내 걱정을 끼쳤다고 내심 자책했다.
그때 어디선가 ‘삐루룽’ 하는 맑은 새소리가 울렸다. 진양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데, 마침 팔색조 한 마리가 정원을 휙 날아서 지붕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저건!”
진양이 깜짝 놀라서 말을 뱉자, 유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보았다.
“왜 그러세요?”
“혹시 방금 지나간 새 못 보셨나요?”
“아뇨. 새 소리는 들었지만…… 그런데 갑자기 새는 왜……?”
하지만 이미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진양의 귀에는 유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진양은 조금 전 정원을 가로지르며 날아간 새를 떠올리고 있었다. 무척 빠르게 지나갔지만 분명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틀림없이 팔색조였어. 붉은 꼬리 깃털이 유난히 긴. 그렇다면 어쩌면…….’
진양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유설은 혹시나 그가 상심한 나머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어할까 봐 더는 부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백파는 어김없이 침구통을 들고 진양의 방에 나타났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 있는 진양을 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때쯤엔 침상에 웃옷을 벗어놓고 엎드려 있어야 했던 것이다.
“뭘 하고 있는 게야? 침을 맞지 않으려는 게냐?”
“예. 더 이상은 맞지 않으려고요.”
뜻밖의 대답에 백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독은 치유될 수 없을 듯합니다.”
“흥! 그사이에 의원이라도 된 것이냐? 진단은 내가 한다.”
“아뇨. 사실 백 의원님으로서는 아무래도 무리인 듯합니다.”
“네놈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제 병의 증세를 좀 더 확실히 깨달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내력은 운기하지 않는다면 큰 불편함이 없으니 생명에 지장없다면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흥! 세상에 몸에 해롭지 않은 독이 있을 성싶으냐? 그 독은 운기를 할 때 독효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평소에는 천천히 네 몸을 잠식해 가느라 느낄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진양이 슬쩍 눈치를 살펴보니 그 말은 진심인 듯했다.
하지만 진양은 짐짓 생사에 달관한 듯 처연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일 년 정도만 더 살 수 있어도 차라리 고통없이 사는 것이 낫겠습니다. 백 의원님의 침술은 도저히 참기 힘든 걸요. 지난 칠 주야 동안 저는 칠십 년은 산 듯한 기분입니다.”
“앞으로 일 년? 네놈이 여기서 치료를 멈춘다면 반년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진양이 곁눈질로 보니 이번 말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진실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진양은 슬슬 자신이 생각한 계책을 이행했다.
“그래도 할 수 없지요. 아무래도 백 의원님께서는 제 독을 치료할 능력이 안 되시는 듯하니.”
“뭐야? 나는 그저 네놈을…….”
진양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제가 아는 한 이 독을 치료하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백파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세상에 딱 한 명? 그게 누구란 말이냐?”
“그분은 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박학다식하지요. 오래전 저를 보살펴 주시던 어르신이 그러셨거든요. 천하에 누구도 그분에게 독으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구요.”
그 말에 백파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그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누구란 말이냐?”
“휴우! 관두지요. 어차피 여기 없는 분을 입에 올려 무엇하겠습니까?”
“내가 묻질 않느냐! 그자가 누구란 말이냐?”
백파가 버럭 역정을 부렸다.
진양은 짐짓 놀란 척하며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분은 강호에서 십지독녀라는 별호로 명성을 떨친 분이십니다. 절 보살펴 주시던 어르신은 세상 천하에 십지독녀의 십지독공을 능가할 수 있는 독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셨지요. 그분이라면 분명히 절 치료할 수 있겠지요.”
그러자 백파가 탁자를 ‘탕!’ 내려치면서 물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냐? 네가 모시던 분이 그런 말을 하셨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지만요.”
진양이 울적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 감정이 백파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 돌연 진양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그렇잖아도 감정이 복받쳐 오르던 백파가 짐짓 매섭게 소리쳤다.
“사내 녀석이 어찌 눈물을 보인단 말이냐?”
“갑자기 그분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네가 모셨다던 분 말이더냐?”
“아니오.”
“그렇다면?”
“십지독녀 매 선배님이 생각났습니다.”
백파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째서 그자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
“저는 그분께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이라?”
“저는 그분에게 제가 모시던 어르신의 원수라고 욕했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이 돌아가신 이유가 그분 때문이라고 몰아세웠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도 어르신을 생각하시던 분이 바로 그 매 선배님이었습니다. 한데 제가 그토록 무례한 언사를 저질렀으니 후회가 막심해서 눈물이 납니다.”
진양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일 년 뒤에 절 찾아오신다고 하셨는데, 그때가 되면 저는 그분께 정중히 사과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한데 이제 제 목숨이 일 년도 남지 않았다고 하니 저는 그분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드린 채 사과도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런 처지를 생각하자니 마음이 너무나 괴롭습니다.”
진양이 울면서 말하자 백파도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허공에 머문 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좇는 듯했다.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웃옷을 벗고 엎드려라. 침을 맞아야지.”
“괜찮습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제 독은 매 선배님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을 겁니다.”
백파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매지향이다. 이제 너를 정말 치료해 줄 테니 침을 맞도록 해라.”
그 말에 진양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백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양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오! 매 선배님은 비록 연세가 있으시지만 천하절색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아름다우십니다! 어르신이 늘 그리워하던 그분의 모습을 제가 모르시는 줄 아십니까? 누굴 속이려고!”
눈앞에 늙수그레한 노파를 두고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진양은 짐작한 바가 있었기에 거침없이 소리쳤다. 과연 백파는 노하기는커녕 은근히 만족하는 기색까지 띠며 대꾸했다.
“그래, 네가 아는 매지향이 바로 나다. 내가 일 년 뒤에 너를 찾아 죽이기로 했지. 약속대로 난 일 년 뒤에 널 찾아서 죽일 거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널 일 년 동안은 멀쩡하게 살게 해야겠지.”
백파의 목소리가 말을 하는 와중에 점점 변하더니, 이내 청아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양이 더욱 놀란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정, 정말 매 선배님이십니까?”
“그렇다.”
“도저히 믿기 힘듭니다. 제가 알던 매 선배님은…….”
그 순간 백파의 몸이 기이하게 꺾이면서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점점 허리가 곧게 펴지고 키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내 헐렁하던 옷이 몸에 딱 맞으며 아름다운 굴곡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가 목 언저리에서 살가죽을 벗겨내자 가히 화용월태(花容月態)라 이를 만한 미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
사실 진양은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매지향을 눈앞에서 보자 입이 척 벌어져서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십지독녀 매지향이었던 것이다.
경정산에서 진양과 헤어진 매지향은 곧바로 하산하지 않고 제자 소담화와 함께 임패각이 머물던 동굴에서 한동안 지냈다. 하루하루 슬픔에 잠겨 시간을 보내다보니 매사에 무기력하고 그리움만 깊어져 갔다.
결국 사부가 걱정된 소담화는 매지향을 설득해서 응천부로 향하게 됐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같이 북적이다 보면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매지향과 소담화의 아름다운 용모를 본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물론 추파를 던져 올 때마다 매지향은 어김없이 살수를 펼쳐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를 죽이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귀찮아진 그녀는 곧 축골공(縮骨功)을 이용해서 몸을 변형시키고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써서 외모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그런 뒤에는 줄곧 주루에서 술독에 빠져 지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진 돈이 바닥이 나자 더 이상 머물 곳도 마실 술도 없었다. 매지향은 소담화에게 매일같이 돈을 벌어오라고 야단을 쳤다.
결국 소담화는 매지향의 곁을 잠시 떠나 있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강서(江西) 지역에서 임패각을 사칭하는 자를 처단하겠다는 명목으로 매지향의 곁을 떠났다. 그 후 매지향은 응천부 일대를 방황하다가 마침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유능한 의원을 찾는다는 방을 보게 된 것이다.
돈이 필요했던 매지향은 금룡표국을 찾아왔고,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진양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진양이 결코 반가울 리가 없었다. 특히 경정산에서 헤어질 때는 진양에게 모진 말을 들었던 터라 더욱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진양을 치료해 주지 않고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독한 약을 지어주고 아픈 침을 놓았던 것이다.
한데 이렇게 진양에게 임패각의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고, 그가 살아생전에 자신을 추켜세웠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만 것이다.
게다가 진양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며 눈물까지 흘리니, 응어리졌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한편 진양은 매지향이 본모습을 드러내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매 선배님! 정말 매 선배님이셨군요! 제가 선배님을 몰라보고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