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6
신필천하(神筆天下) 36화
매지향의 마음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진양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외면했다.
“흥!”
“선배님, 지난번 경정산에서는 제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선배님과 헤어지고 나서 정말 많이 후회했습니다. 언젠간 선배님을 다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용서를 빌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이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진양은 줄곧 매지향에게 독설을 퍼부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매지향 역시 진양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지만, 서로 그리운 사람을 잃었다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라 왠지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그녀도 더는 독하게 대하지 않고 한숨을 섞어 말했다.
“지나간 일이다. 웃옷을 벗고 엎드려라.”
“제 독을…… 치료해 주시려는 건지요?”
“흥! 어차피 일 년 뒤에는 널 죽이기 위해 다시 찾을 것이다. 그건 이미 내가 한번 내뱉은 말이니 어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는 멀쩡하게 살아 있어야겠지.”
“감사합니다, 매 선배님.”
진양은 고개 숙여 사례하고는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침상에 가서 누웠다.
매지향은 그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번쩍 치켜 올렸다. 얼핏 보면 살수를 쓰는 것과도 같은 동작이었기에 진양은 내심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피한다고 해도 늦었기에 그저 눈을 감고 모른 척했다.
다음 순간 매지향의 다섯 손가락이 등에 닿았다. 순간 싸늘하면서도 시큰한 기운이 등줄기를 통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건 독이잖아?’
진양은 매지향이 자신에게 독기를 흘려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때, 마치 진양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매지향이 말했다.
“놀랄 필요 없다. 내 독이 네 몸 속에 있는 독과 서로 상쇄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그제야 진양도 다소 놀란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자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체내의 독기가 조금씩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머리도 차츰 맑아져 갔다. 독을 독으로써 치료하는, 이른바 이독공독(以毒攻毒)의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니.’
진양은 놀랍기도 하면서 새삼 매지향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의원들이 자신을 진찰하고 나서 고개를 내둘렀던가.
‘과연 어르신이 매 선배를 추켜세울 만하구나.’
매지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내일 아침 약을 달여오면 그걸 먹고 나서 즉시 운기해라. 그럼 독은 완치될 것이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진양이 옷을 추슬러 입으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매지향이 문을 열고 나서며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흥! 어차피 내가 거둘 목숨, 감사할 필요 없다.”
“선배님께서 구해주신 목숨이니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은 일 년 뒤에 찾아왔을 때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매지향은 그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고는 휑하니 나가 버렸다.
진양은 그날 저녁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3.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
다음 날 진양은 시종이 달여온 약을 마시고는 매지향의 지시대로 즉시 운기를 했다. 그랬더니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머릿속이 상쾌해졌다.
아침 일찍 진양을 찾아온 유인표는 독이 완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었다.
“정말 다행일세. 이렇게 완치가 됐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때쯤 그는 진양과 몹시 가까워져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 후 오반을 먹은 진양은 매지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그녀가 머무는 방을 찾아갔지만 이미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시종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매지향은 오전에 유인표에게 사례금을 받고 일찌감치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매지향을 만나 감사를 표하고 싶었던 진양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서 좌정한 채로 운기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머릿속으로 자양진경을 떠올리며 마치 필사하는 기분으로 운기를 시작했다.
이미 진양은 수년 간 자양진경을 필사한 덕분에 필체까지 거의 완벽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상상 훈련을 하니, 사지백해에 녹아 있던 진기가 원활하게 주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굳이 문방사우를 갖춰놓고 필사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자양진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내공을 연마할 수 있는 경지가 된 것이다.
한데 어쩐지 오늘만큼은 다른 때보다도 유독 몸이 개운하게 느껴졌다. 진양은 병이 나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계속해서 운기에 집중했다.
무념무상 속에서 운기조식을 이어가던 진양은 새벽닭이 우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랜만에 운공을 했더니 너무 심취해 있었구나.’
잠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새벽이 된 것이다.
진양은 두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진양은 조반을 챙겨 먹은 후 유인표가 있는 사합원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막 객당을 벗어나서 걸어가는데, 마침 뒤채의 후원 쪽에서 날카로운 기합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기합성은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는데, 간간이 금속성도 울려 나왔다.
호기심이 동한 진양이 뒤채를 돌아 가 보니 작은 연못가에서 두 남녀가 검을 겨루고 있었다.
사뿐사뿐 보법을 밟으며 움직이는 여인은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강맹하게 검공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 빛살처럼 검을 뿌리다가도 유유히 뒤로 물러설 때면 마치 등에 날개가 달린 듯 우아하게 보였다.
그녀는 바로 유설이었다.
유설은 검술 대련에 몹시 심취해 있는 듯 보였는데, 그녀가 격렬하게 움직일 때마다 고운 이마를 타고 흐르던 땀방울이 보석처럼 빛나며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검공에 맞서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정여립였다. 두 사람의 검술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고 있자니, 정여립의 무공이 조금 더 윗길임이 느껴졌다. 거의 비슷한 수준이지만, 때때로 중요한 순간에 정여립이 유설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유설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검술을 겨루는 두 사람 옆에는 또 한 명의 중년인이 더 있었다.
바로 도장옥이었다.
그는 시종 진지하고도 엄격한 눈으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유설이 다시 기합성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야아관월(夜蛾貫月)!”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검을 위아래로 흔들며 정여립을 공격해 갔다. 정여립은 곧 몸을 기울이더니 유설의 검을 밀어 치며 초식을 전개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그러자 놀랍게도 날카롭게 뻗어오던 유설의 검이 방향을 잃고 맥없이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본래 일장춘몽이란, 삶의 덧없음을 이르는 고사성어다. 그런데 이 고사성어를 인용한 초식이 절묘하게도 유설의 매서운 초식을 그야말로 꿈결처럼 와해해 버린 것이다.
그때 지켜보던 도장옥이 얼른 소리쳤다.
“월량낙산(月亮落山)!”
그러자 서너 걸음 물러섰던 유설이 재빨리 몸을 돌리며 그대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검이 떨어지는 순간에 검광을 흩뿌리니, 그야말로 달빛이 서산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찰나 정여립이 검을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군조비상(群鳥飛上)!”
순간 그가 돌개바람처럼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유설의 검이 한 번 떨어지는 동안 금속성이 여러 번 울렸다. 이는 새 떼가 동시에 하늘을 날아오르는 모습을 본떠 만든 초식이었다.
“크읏!”
유설은 손아귀가 찌릿찌릿 울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진양은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서 일부러 초식명을 외치면서 대련을 하는 거였구나. 두 사람 모두 정말 뛰어난 검공이다. 정 표두에 비해 유 낭자의 무공이 조금 부족하지만, 그 누구도 결코 약하다고 말할 수 없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두 사람 모두 대단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진양이 보기에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부분이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유설의 검술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때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유인표가 다가와 있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네도 여기 있었군. 어떤가, 딸아이의 솜씨가?”
“제 주제에 어떻게 남을 평하겠습니까? 그저 두 분의 화려한 검술 실력에 넋을 놓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제가 안목을 크게 넓혔습니다.”
“허허, 과찬일세. 아직 많이 부족한 아이라네.”
진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 검법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데 저 검법이 무엇인지요?”
그 말에 유인표는 내심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했다.
“월야검법(月夜劍法)이라는 것이네. 우리 선조께서 달밤에 영감을 얻어 하룻밤 사이에 이룬 검법이라고 하네.”
“정말 대단하군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면서 대련하는 곳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 대련을 지켜보며 이따금씩 지적해 주던 도장옥이 두 사람을 보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그럼에도 유설은 아버지와 양진양이 다가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오로지 대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유 낭자의 집중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진양이 칭찬하자 유인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 아이는 지금 어떤 생각을 떨쳐 내는 중이라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딸아이는 몇 해 전부터 서신을 주고받는 남자가 있었네.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딸아이는 그 상대에게 마음이 흔들렸나 보네. 한데 대략 일여 년 전부터 그 사람에게서 서신이 오지 않는 모양일세. 그 후로 딸아이는 틈만 나면 저렇게 검술 대련에만 몰두하고 있다네. 쯧쯧. 서로 본 적도 없으면서 단지 글만 보고 저렇게 그리워하다니…….”
유인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한편 진양은 내심 놀라운 심정이었다. 그가 천상련에 있을 때 곽연을 대신해서 서신을 적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진양은 이내 고개를 내둘렀다.
‘에이, 설마…….’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곽연이 서신을 보낸 사람도 응천부에 사는 여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진양이 유인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러자 유인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도 알 수가 없네. 서신은 그쪽에서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인데, 언제나 답장을 그 인편으로 보냈으니 말일세. 상대도 소속이나 사는 곳을 밝히지는 않았던 모양일세. 딸아이도 굳이 캐묻는 성격이 아니니 그냥 넘겼던 것이고. 한데 이제 서신을 보내오지 않으니 딸아이도 서신을 보낼 수가 없게 됐지.”
그때였다.
“조운모월(朝雲暮月)!”
정여립이 매섭게 소리치며 검을 내찔렀다. 연이어 수세에 몰리던 유설은 뒤로 훌쩍 물러나며 바닥에 착지했다. 한데 정여립의 검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조운모월은 허초와 실초가 섞인 초식이다. 이는 허초가 먼저 올 수도 있고 실초가 먼저 올 수도 있었다.
한데 그가 처음 전개한 것은 바로 조운모월에서 조운(朝雲)에 해당하는 허초였던 것이다. 뒤이어 초승달이 내리꽂히듯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유설은 깜짝 놀라며 뒤로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녀가 발을 디딘 곳이 하필이면 연못가의 바위 위였다. 순간 그녀의 발이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앗!”
지켜보던 모두가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