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9
신필천하(神筆天下) 39화
진양은 천천히 보법을 옮기면서 흑표에게 다가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느릿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실상 이 순간 그의 걸음 일보 일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만한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진양은 지금 상대의 모든 방위를 차단하며 천천히 궁지에 몰아넣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진양이 성큼성큼 두어 걸음을 크게 내딛더니 수도를 횡으로 후려쳤다. 보통 도검술의 보법이 잰걸음을 많이 사용하는 데 반해 지둔도법은 보폭이 큰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동작이 커진 만큼 빈틈도 많이 보이게 마련이지만, 이미 상대의 방위를 철저히 차단한 진양으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쒜에엑!
진양의 수도가 도기를 뿜어내며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 순간 흑표가 손을 뻗으며 진양의 팔꿈치 안쪽을 노리고 내찔렀다.
순간 진양은 깜짝 놀라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진양은 도법을 펼치고 있었기에 은연중에 상대도 도법이나 검법을 펼칠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한데 뜻밖에도 상대는 금나술법(擒拿術法)을 펼친 것이다.
어찌 보면 오히려 당연한 반응이었다. 적수공권으로 싸우니 당연히 맨손을 이용한 무공을 쓴 것이다. 다만 진양은 익힌 무공이 많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간신히 혈도를 짚일 위기를 모면한 진양은 뒤로 훌쩍 물러난 다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내가 도법을 쓴다고 상대방도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 장법이나 권법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제대로 장법이나 권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 초식 대결로 이어지면 내가 훨씬 불리해진다. 어쩌면 좋을까?’
진양은 천천히 걸음을 옆으로 옮기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맘 같아서는 도를 들고 싸우고 싶었지만, 갑자기 병기를 들자고 제의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 아니겠나.
그 순간 흑표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진양이 얼른 몸을 돌려 피하려는데, 어느새 허공으로 솟아오른 흑표가 발을 뻗어왔다.
주먹이 날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진양은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한데 흑표가 연이어 발을 내지르며 진양에게 바짝 붙어 따라왔다. 흑풍칠각(黑風七脚)이라는 초식이었는데, 발이 빠른 흑표는 각법이 특기이기도 했다.
피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진양이 양팔을 교차해서 발을 막아냈다.
파앙! 팡!
발과 팔뚝이 부딪칠 때마다 응축된 기가 폭발하듯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흑표는 진양의 내공이 몹시 두텁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진양은 생전 처음 받아보는 충격에 놀랐다.
하지만 놀란 심정도 잠시, 진양은 상대의 흑풍칠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먹을 굽어 도는 바람처럼 내질렀다.
바로 풍양권법의 풍결권이었다.
그 순간 흑표 역시 상대의 주먹이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쇄도하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뒤채며 발을 휘둘렀다.
쉬이익! 파앙!
다시 흑표의 발과 진양의 주먹이 충돌하면서 마찰음이 일어났다.
진양은 두 눈을 부릅떴다.
풍결권이라는 권초는 물꼬가 터져 흐르듯이 주먹을 내찌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만큼 갑작스럽고 힘이 실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상대의 방어를 뚫는다는 것이다. 고인 물이 틈을 비집고 어느 순간 쾌속하게 흐르듯이 상대의 방어 틈을 비집고 주먹을 뻗어낸다.
때문에 풍결권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막아내기보다 피하는 것이 쉽다.
그런데 흑표는 발을 휘둘러 풍결권을 차단한 것이다. 하니 엄밀히 말하자면 진양은 풍결권을 펼치지도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진양은 상대가 발을 휘두르면서 몸이 돌아서는 것을 보았다.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진양으로서는 일격을 내지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지금이다!’
진양은 곧바로 질풍처럼 내달리며 주먹을 뻗었다.
그가 알고 있는 단 두 가지의 권초 중 남은 하나인 질풍권이었다.
슈우우욱!
진양의 주먹이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들었다.
그때쯤 흑표는 발을 휘두르며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몸이 반쯤 돌아가 있었으니 어떻게 하더라도 진양의 권공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는 방어하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몸을 뒤채며 진양의 왼쪽 어깨를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한편 진양은 질풍권을 내뻗다가 자신의 왼쪽을 노리며 날아드는 발을 보고는 내심 깜짝 놀랐다. 이대로 주먹을 뻗어내면 틀림없이 질풍권이 먹혀들어 가겠지만, 자신 역시 흑표의 각법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서로가 상잔하게 되니 어느 쪽도 이겼다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모두가 자칫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기였다.
결국 진양은 주먹에 실은 내공을 절반 정도 거두고 자신의 왼쪽 어깨를 보호하는 데 힘을 썼다.
이러한 생각과 판단은 실제로는 거의 촌각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파팡!
두 사람의 각법과 권법이 각기 상대를 치며 다시 한번 큰 소리가 울렸다.
하나 두 사람 모두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신경 써야 했으므로 소리만 요란할 뿐 실제로는 거의 힘이 실리지 않은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흑표가 선택한 최선의 공격이 최상의 방어가 된 셈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힘에 밀려 뒤로 주룩 밀려가고 나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갈채를 터뜨렸다. 권각만으로 이렇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련은 보기 드물었던 것이다.
진양이 양손을 맞잡으며 진심 어린 감탄을 터뜨렸다.
“흑 형님의 각법은 그야말로 무림일절이군요. 소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맞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자 흑표 역시 포권을 취하며 답례했다.
“과찬입니다. 양 형의 권법에 오히려 제가 놀랐습니다. 과연 강호의 젊은 영웅이라 하겠습니다.”
진양은 상대가 이렇듯 예까지 차리니 내심 상대방에게 호감이 생겨났다.
한데 두 사람의 대련이 이렇게 대충 마무리되는 분위기로 흐르자 남옥은 영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본래 뛰어난 무장 출신으로 누구보다도 이런 무예 대련에 흥미가 깊었던 것이다.
그가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하하! 역시 유 아우가 칭찬한 영웅이라 과연 대단하군! 한데 이제 막 흥이 붙으려는데 여기서 그만두면 아쉬운 일 아니겠는가? 두 사람은 내 안목을 넓혀줄 겸 조금 더 대련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 흑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반면 진양으로서는 다소 난감한 일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정중하게 물러난다면 후배로서 도리를 다하고 보기에도 남부끄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이상 대련이 지속된다면 결국 무공을 제대로 익힌 적이 없는 진양으로서는 흑표의 상대가 안 될 것이 뻔한 노릇이다.
물론 내공 대결로 이끌어간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면이 있겠지만, 즐기자고 벌인 판을 죽자고 진지하게 임했다간 흑표가 큰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진양은 이대로 대련을 이어가다가 각법에 밀려 망신을 당하기도 싫었고, 내공 싸움으로 이끌어 흑표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대장군인 남옥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했다.
한데 지켜보던 유인표가 이런 진양의 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
그가 가만 보니 진양이 처음에는 도법을 사용하는 듯했고, 지금은 겨우 두 가지의 권초만을 펼쳤을 뿐이다. 한데 이 두 가지의 권초도 무척 단순한 것이어서 무공 입문자들이나 익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진양이 상대를 배려해서 단순한 권초만을 쓰는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문득 유설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다. 딸의 말에 의하면 진양은 붓을 들고도 도법을 쓰는 듯했다는 것이다.
‘혹시 양 형제가 맨손으로 싸우는 무공을 익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인표는 얼른 일어나서 남옥에게 말을 건넸다.
“하하하! 대장군께서 흡족해하시니 정말 뿌듯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련을 이어간다면 두 사람의 뛰어난 무공을 더 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좀 더 흥을 돋우기 위해서 병기를 사용한 대련은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남옥이 반색하며 대꾸했다.
“오호! 그것 좋은 생각일세! 전장에서 맨손으로 싸울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역시 내 안목을 넓히려면 그쪽이 훨씬 즐겁겠구먼! 하하하하!”
남옥은 원래 거칠고 과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유인표의 제의가 아주 흡족했다. 그는 곧 시종을 불러 병기를 가지고 오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시종들이 마당으로 도, 검, 창, 극 등 다양한 병기를 가지고 왔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진양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도를 들고 지둔도법을 사용한다면 대련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게다가 사실은 마음 한구석에서 흑표와 마저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단순한 호승심 때문이 아니라 그와 겨루면서 진양 역시 안목이 트이는 것을 느낀 것이다.
흑표는 망설임없이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진양은 가장 정확히 배우고 익힌 무공이 지둔도법인만큼 도를 한 자루 들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마주 서서 기수식을 취했다.
이제 관람자들은 더욱 긴장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데 진양이 가만 보니 흑표는 왼손으로 검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양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생각했다.
‘혹시 나를 봐주려고 일부러 왼손에 검을 든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왼손잡이일까?’
한데 흑표의 표정이나 기수식을 보아서는 결코 자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좀 전보다도 더욱 날카로워진 기세였다.
그래서 진양은 단순히 흑표가 왼손잡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진양이 좀 더 깊이있게 무공을 배웠더라면 흑표의 자세가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터다. 현재 흑표는 왼손으로 검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검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들고 있었다. 이는 실제 중원 무림의 검리로 보자면 상당히 기이하고 독특한 것이었다.
하나 진양은 경험이 부족하고 중원무림의 검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아까와 비슷한 방법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진양의 보법에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느릿느릿하면서도 한보 한보가 매우 신중했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방위를 철저하게 차단해 나갔다.
반면 흑표는 보법이 빠르게 변하는 축에 속했다. 두 사람의 보법이 이렇듯 상반되니 관람자들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이윽고 진양이 두어 번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더니 도를 수직으로 내려쳤다. 그의 움직임은 무거우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다.
순간 흑표가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는가 싶더니 앞으로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앗!”
남옥을 제외한 관람자들이 저마다 비명을 터뜨렸다. 보통 도를 수직으로 내려치면 물러나면서 막거나 몸을 움직여 회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흑표는 오히려 도날을 향해 몸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마치 죽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흑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도 손잡이 부분까지 파고들더니 검을 가로로 눕히며 치켜 올렸다. 그러자 도와 검이 부딪치며 듣기 싫은 마찰음을 길게 울렸다.
키이이잉!
도날을 따라 검이 솟구쳐 오르면서 불티가 휘날렸다. 이어서 흑표의 몸이 희번덕 돌아가더니 진양의 목덜미를 향해 검날이 쏘아져 왔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솜씨였다.
진양은 얼른 도를 번쩍 치켜들어 머리 뒤로 넘기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엉뚱한 방식의 초식은 바로 지둔도법의 질비고준의 변초였다.
깡!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흑표가 튕겨 나갔다. 진양은 그 반동을 이용해서 성큼 뛰어올랐다.
흑표는 다시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시키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진양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그가 그대로 원심력을 이용해서 검을 가로로 베어 들어왔다.
진양은 피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하여 얼른 도를 세로로 내려쳤다. 역시 지둔도법의 철우격산이라는 초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흑표의 검이 번쩍 빛을 내뿜더니 거짓말처럼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가로 후리기는 허초였던 것이다.
흑표는 반대로 몸을 회전시키더니 검을 뒤집어 진양의 오른쪽을 베어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이 마치 돌풍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진양은 깜짝 놀라서 공력을 발아래에서 격발시켰다. 동시에 ‘꽝!’ 내려친 도의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철돈도약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흑표의 검날이 진양의 발끝을 스치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