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4
신필천하(神筆天下) 4화
한편 양진양은 다섯 명이 두 명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공격당하는 두 사람은 선남선녀이니 자연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노인을 바짝 뒤쫓으면서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
“각주 어르신, 다섯 사람이 두 사람을 한꺼번에 공격하면 비겁한 거죠?”
흉흉한 분위기 속에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텁석부리사내가 잔뜩 미간을 구기고 시선을 돌렸다.
“꼬마야, 지금 뭐라고 했느냐?”
양진양은 사내의 험상궂은 표정을 보고 주눅이 들었지만, 또박또박 할 말은 했다.
“다섯 명이 두 명을 공격하면 비겁하다고 했어요.”
진양이 이렇게 나설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노인을 의지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텁석부리사내는 그렇잖아도 기분이 나쁜데 어린아이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나서자 단단히 화가 났다.
“흥! 어린 녀석이 겁대가리가 없구나!”
그가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노인이 얼른 아이를 가로막았다.
“철없는 아이가 한 말일세. 신경 끄시게.”
텁석부리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노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사죄해도 그냥 보내줄까 말까다. 한데 이 영감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마을 어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순간 텁석부리사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이겁없는 영감과 아이에게 단단히 혼뜨검을 내주는 것과 동시에, 의리있는 척하는 저 청년 무인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순간 몸을 날리더니 노인을 휘돌아 나가서는 아이의 손목을 왼손으로 낚아챘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솜씨였다.
“요 녀석!”
“아얏!”
양진양이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노인이 이맛살을 구겼다.
“이게 무슨 짓인가?”
“후후.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든 대가가 무엇인지 가르쳐 드리지.”
그러자 지켜보던 백의남자가 황급히 나서서 소리쳤다.
“위사령(魏詞令), 어째서 무고한 아이까지 괴롭히는 것이냐!”
“흥! 네놈이 그렇게 의를 내세운다면,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손가락 두 개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녀석의 손가락 두 개를 대신 가져가마!”
위사령이라 불린 텁석부리사내가 시퍼런 도날을 들어 올리더니 아이의 손가락에 갖다 댔다.
양진양은 졸지에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며 악을 썼다.
“이것 놔! 이 나쁜 도적놈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그러나 아이가 어른의 힘을 당해내기란 애초에 무리였다. 위사령이 손에 힘을 주니, 양진양은 오히려 잡힌 손목이 아파오기만 할 뿐이었다.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를 그만 놓아주게.”
하지만 곱게 말을 들을 위사령이 아니었다. 그는 코웃음을 칠 뿐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백의남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백의남자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위사령이라면 정말로 아이의 손가락 따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잘라낼 위인이었다. 이제 아이가 그의 손에 꼼짝없이 붙들렸으니, 자신이 아무리 신공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구해내기는 힘들 터였다.
그렇다고 자신들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가 평생을 불구로 살게 할 수는 없지 않나.
백의남자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손가락을 자르지!”
“안 돼요, 사형! 이 일의 발단이 저로부터 시작됐으니 차라리 제 손가락을 자르겠어요!”
여자가 얼른 나서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지금껏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던 노인이 돌연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진양의 앞에 다다른 그가 왼손을 뻗더니 손가락으로 위사령의 오른쪽 팔꿈치 천정혈(天井穴)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위사령은 오른팔에 힘이 쭉 빠져나가면서 들고 있던 도를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챙그랑!
뒤미처 노인은 오른손을 휘둘러 위사령의 왼쪽 손목 회종혈(會宗穴)을 낚아채며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어이쿠!”
졸지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위사령은 수치심에 얼굴이 귀밑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편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속절없이 당하자 백의남자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무인 중 두 명이 잽싸게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은 왼팔로 양진양의 허리를 껴안아 물러난 뒤 다시 홀몸으로 두 무인에게 마주쳐 나가며 쌍장을 뻗어냈다.
퍼펑!
그의 손바닥에서 무시무시한 장력이 발하자, 칼을 부리며 달려들던 무인 둘이 추풍낙엽처럼 날려가 바닥을 뒹굴었다.
순식간에 세 사람이 쓰러지자 남은 두 명의 무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노인을 경계했다. 노인의 무공이 뜻밖에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노인이 그들을 둘러보며 냉랭한 어투로 소리쳤다.
“자네들의 은원은 자네들끼리 알아서 해결할 것이지 왜 우리한테까지 피해를 주는 겐가?”
그러자 위사령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포권을 취했다. 처음부터 노인이 그의 팔꿈치를 가볍게 튕기기만 했기에 움직이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 천중혈 주위가 아릿하게 저려오고 있었다.
“후배가 노선배께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모쪼록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노인의 무공 실력에 적지 않게 놀란 터였다.
때문에 조금 전처럼 무시하는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인이 냉랭하게 콧방귀만 뀌자, 그가 다른 네 명의 무인을 아울러서 물러나며 말했다.
“선배께서 저희에게 아량을 베푸셨으니 저희도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더니 백의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오늘은 여기 계신 선배님을 생각해서 물러가지! 하나 다음에도 우리 혈사채(血死寨)를 건드리면 오늘과 같은 요행은 없을 줄 알아라!”
“위 형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백의남자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대꾸하자, 위사령은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를 따르는 네 명의 무인도 위사령의 뒤를 쫓더니 이내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일단의 위기를 넘기자 백의남자와 여자가 노인에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선배님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불초 후배는 화산의 제자인 원세형(袁世衡)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사매입니다.”
“여미령(呂美玲)이라고 합니다.”
여자도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사례했다.
노인은 잠시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파의 원세형이라면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후기지수가 아니던가. 어린 나이에 무공 수위가 고강해서 소룡신검(小龍神劍)이라는 별호까지 가진 그였다.
그리고 여미령 또한 화산의 속가제자로 화산옥봉(華山玉鳳)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무공은 나이에 비해서는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지만, 그 별호만큼 막강한 실력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단지 화산파의 후기지수라는 지위가 이들 두 사람을 더욱 추켜세워 준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화산파 장문인의 심부름을 받고 직례 지역에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데 여행 도중 혈사채 소속의 무인이 여미령의 미모를 보고 반해 불의한 짓을 저지르려다가 그녀에게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불상사를 겪고 만 것이다.
만약 이 두 사람이 강호 경험이 많았더라면 요즘 직례 일대에서 악명 높은 혈사채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강호 초출인 데다 자신들의 무공 실력을 과신하고 있었기에 앞뒤 따져보지 않고 홧김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마침 혈사채에서는 위사령이 아우의 빚을 갚겠다며 찾아나섰고,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노인은 잠시 놀랐던 표정을 이내 지우고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딱히 자네들을 도우려고 나선 것이 아닐세. 처음부터 처신을 잘했더라면 우리가 이런 피해를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의 질타에 원세형은 머쓱한 기분이었지만 예를 차리며 물었다.
“선배님의 높으신 존함을 여쭈어도 될는지요?”
“풍천익(風天益)이라고 하네.”
노인의 대답에 두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잠시 후 원세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천중산의…….”
“그렇다네. 천상련의 천보각을 맡고 있네만.”
풍천익의 대꾸에 원세형과 여미령의 낯빛이 묘하게 변했다.
하나 두 사람은 이내 그 표정을 지우고는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사례했다.
“천보각주 풍천익 노협이셨군요.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풍천익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제 갈 길만 고집했다. 양진양도 두 남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노인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멀어져 가니 원세형과 여미령도 더는 귀찮게 하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풍천익은 그날 저녁 주마점(駐馬店)에 다다라 어느 객점으로 들어갔다.
대별산에서 천중산까지는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학립관을 나설 때가 이미 늦은 오후였고, 어린 양진양의 걸음 속도에 맞추다 보니 하룻밤을 머물 수밖에 없었다.
양진양은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은 데다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강행군으로 몹시 지친 상태였다. 때문에 저녁을 먹고 침상에 몸을 누이자마자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삼경(三更:새벽1시)이 막 지날 때쯤이었다.
양진양은 누군가 자신을 안아 드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둠 속에서 웬 사람 하나가 자신을 둘러메는 것이 아닌가. 대경실색한 양진양이 막 소리를 지르려는데, 등골이 찌르르 아파오더니 목이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상대방이 진양의 아혈(啞穴)을 점해 버린 것이다.
그림자는 곧바로 열린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내리더니 나는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진양은 공포에 질렸지만 혈도가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림자의 등 뒤에서 노한 음성이 들렸다.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양진양이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따라온 풍천익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림자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양진양을 곁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진양은 달빛에 비친 그림자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놀랍게도 그림자는 낮에 만났던 바로 화산파의 제자인 원세형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곁에는 어느새 선녀 같은 외모를 가진 여미령도 서 있었다.
원세형은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더니 양진양의 목에 갖다 댔다.
그러자 다가오던 풍천익이 눈살을 찌푸리며 우뚝 멈춰 섰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화산파의 법도이던가?”
“화산에 그러한 법도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방법이 아니면 저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 같아 부득불 손을 쓴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라?”
그러자 이번엔 잠자코 있던 여미령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사문의 비전을 현재 천상련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천보각은 중원의 온갖 무공서가 보유된 곳이라고 하니, 천보각주께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거예요.”
“흐음,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군.”
풍천익이 시치미를 떼자 여미령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설마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劒)을 천상련이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시겠다는 건가요?”
칠절매화검은 화산파의 독문 무공으로 대대로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비전 절기였다. 특히 칠절매화검은 매화를 바탕으로 하는 화산의 검법 중에서도 최상승 무공에 속했다. 때문에 장문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있는 매화검수만이 그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