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41
신필천하(神筆天下) 41화
4. 연서(戀書)의 여인
남옥의 저택을 나온 유인표 일행은 착잡한 심정으로 귀갓길에 올랐다. 특히 유인표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진양에게 몹시 미안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장옥과 정여립을 먼저 보내고 자신과 진양은 뒤처져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오늘 자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으이.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덕분에 안목을 크게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사실 나도 해남파의 검식을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네. 오히려 자네 덕분에 내가 많은 것을 배웠구먼.”
진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흑표의 검식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생소한 검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인표의 말을 들어보고 나니 그것이 해남파의 검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해남도의 검식이 독특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진양은 중원무림의 정공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천상련에서 지낼 때 여러 잡서를 읽으면서 언뜻 해남파의 검식이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난 것이다.
그때 유인표가 넌지시 물었다.
“남옥 대장군을 직접 뵈니 어떻던가?”
“기개가 남다르고 대장군으로서의 기백이 넘치시는 듯했습니다.”
“하하하, 그렇군. 하지만 내 앞이라고 굳이 좋은 말만 할 필요는 없네. 나도 보는 눈이 있고 생각하는 머리가 있으니까.”
유인표는 오늘 시종의 일을 떠올리고 꺼낸 말이었다. 진양도 짐작을 하고 있었기에 이내 솔직하게 대꾸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성품이 호방하고 거침없어서 존경심이 우러나오긴 하지만, 다소 과격하고 거친 모습도 보여 훗날 화를 입게 될까 봐 염려됩니다.”
“화…… 라면?”
진양은 묵묵히 말을 몰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사실 제 부모님은 호유용 사건에 연루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두 분은 살아생전에 일절 불충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하나 문제라면 인맥이었지요. 국주 어르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매우 민감한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불과 삼 년 전에도 호유용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또 한 번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남옥 대장군께서는 기개가 지나친 면이 없지 않으시니…….”
진양이 끝말을 흐렸다.
유인표는 진양의 말에 내심 놀랐다. 지금껏 진양의 가족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은 점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소리가 아니겠나.
유인표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일세. 사실 나도 그걸 가장 염려하고 있다네. 하지만 대장군께서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으시니 어쩌겠나? 그것이 그분의 성품인 것을.”
“그래도 국주 어르신께서는 매사에 조심하십시오. 혹시 제가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자네 말이 백번 옳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먼발치에 금룡표국의 장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양은 문득 표국에 있을 유설이 떠올랐다. 그녀를 생각하자 다시 곽연의 부탁을 받아 연서를 적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비록 처음에는 곽연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연서를 대신 써주었지만, 나중에는 진양 스스로도 상대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서신을 적지 않았던가.
‘정말 유 낭자가 그 여인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돌연 가슴이 두근거리고 묘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렜다.
진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내일 한번 알아봐야겠다.’
적어도 지금 떠오른 방법이라면, 옛날 연서를 주고받던 상대가 유설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은근한 기쁨을 느낀 진양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마침 그 기색을 눈치챈 유인표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던 중인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아, 아닙니다. 잠시 옛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진양이 대충 얼버무리자 유인표도 더는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진양은 오전에 표국의 일을 끝내고 인근 객점으로 갔다. 진양은 객점 이층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응천부를 배회하는 낭인(浪人)들 중 비교적 옷차림새가 단정한 사람을 골라 데려왔다. 그리고 어젯밤에 적은 서신을 건네며 금룡표국의 유설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낭인은 간단한 심부름에 은자 한 냥을 받게 되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진양은 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말라는 등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당부했다.
“하지만 혹시 유 낭자가 답신을 적어주면 그것을 받아오도록 하시오. 그럼 내가 은자 한 냥을 더 드리겠소.”
“아이구, 감사합니다요, 나리.”
낭인은 연신 꾸벅꾸벅 읍을 하고는 물러갔다.
그는 한달음에 금룡표국으로 내달렸다. 표국의 문지기에게 유설 아가씨에게 전해 드릴 서신을 가져왔다고 하자 곧 시종이 나오더니 그를 데려갔다.
유설은 낭인을 보고는 몹시 반색하며 얼른 서신을 받아서 읽었다. 서신에는 간단한 내용의 글귀와 함께 오언절구의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花園邀明月 화원에서 밝은 달을 맞으니
風來情人香 임의 향기 밤바람을 타고 전해오네.
忽想來思人 문득 그리운 임 예까지 왔나 하여
虛環顧通宵 부질없이 사위를 둘러보며 이 밤을 서성이네.
시를 읽은 유설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분명 서신에 적힌 유려한 필체는 그동안 자신과 연서를 주고받던 상대가 분명했다. 지금까지 간간이 받아보았던 가짜 서신과는 확연히 다른 필체였다.
게다가 시의 내용 역시 그러했다. 지금껏 서신의 상대는 종종 자작시를 적어 보내오곤 했던 것이다. 이 서신에 적힌 오언절구 역시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남자가 직접 적은 것이었다. 시에 대해 조예가 깊은 그녀는 일독으로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시는 진양이 어젯밤 화원을 거닐면서 지은 것이었다. 유설에게 처음으로 시를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시를 인용한 것이 아닌, 스스로 창작한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 두 행을 보면 진양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진양은 유설과 가까이에 있으니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유설이 연서의 상대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줄곧 두리번거리는 중이었으니까.
다만 유설은 연서의 상대가 진양일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런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손마저 가늘게 떨었다.
그녀가 낭인을 향해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그러자 낭인이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질문하신 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도 그저 지나던 사람에게 은자 한 냥을 받고 시킨 대로 한 것일 뿐입니다요.”
절반은 맞는 말이었고 절반은 거짓이었다. 이 역시 진양이 시킨 대로 말한 것이었다.
유설은 그의 말을 듣고 그저 서신이 여러 사람을 거쳐 왔을 것이라 여겼다.
낭인이 읍을 하고 물러가려는데 그녀가 얼른 불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서신을 써줄 것이니 답신을 보낼 수 있겠소?”
“예, 저에게 심부름을 시킨 자가 혹시 서신을 주거든 받아오라고 하였습지요.”
“그럼 잠시 계시구려.”
유설은 얼른 시종을 시켜 문방사우를 챙겨오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시종들이 문방사우를 챙겨오자 그녀는 붓을 들고 빠르게 서신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낭인이 제대로 답신을 보내지 못할까 봐 염려되어 간단한 내용만 서둘러 적었다. 마침내 할 말을 모두 적은 그녀가 서신을 고이 접어 낭인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은자 한 냥을 드릴 테니 각별히 신경 써서 꼭 전해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낭인은 입이 귀밑까지 벌어져서 은자를 넙죽 받았다. 그는 곧 몸을 물리고 표국을 나섰다.
이를 본 시녀 한 명이 넌지시 물었다.
“아씨, 저자를 미행하면 그쪽의 거처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유설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게다가 얼마나 오래 미행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섣불리 사람을 붙일 수도 없지. 정 궁금하면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야.”
“그분이 또 서신을 보낸다고 하셨나요?”
“그래. 그동안 여러 사정이 있어 미처 연락하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그것참 다행이에요.”
시녀가 웃으며 대꾸하자 유설도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옛말에 일소경국(一笑傾國)이라더니, 그녀의 미소는 그야말로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웃는 듯하였다.
금룡표국을 나선 낭인은 진양이 지시한 대로 혹시나 있을지 모를 미행을 조심하며 일부러 먼 길을 돌아서 객점에 다다랐다. 그가 이층으로 올라가니 여전히 진양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리, 다녀왔습니다요.”
“수고하셨소. 혹시 답신을 받으셨소?”
“그럼요. 여기 있습니다요.”
낭인이 두 손으로 서신을 받쳐 들며 내밀었다. 진양은 얼른 서신을 받고는 은자 한 냥을 더 건네주었다. 이때쯤 그는 표국의 일을 하면서 제법 넉넉한 돈을 지니고 있었다.
낭인은 졸지에 은자 석 냥을 벌게 되자 기분이 날아가는 듯했다. 그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하고는 객점을 나갔다.
진양은 떨리는 마음으로 서신을 펼쳐 보았다. 그러자 과연 천상련에서 주고받았던 그 서신의 필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진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떨림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이렇게 서신을 보내주셔서 소녀는 한시름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없으나 하시는 일이 만사형통하길 기원하며, 또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음이 급하여 이만 글을 줄입니다.
‘그 여인이 바로 유 낭자였구나!’
이렇게 되자 진양은 마치 유설과 각별한 사이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진양은 서신을 품에 넣고는 표국으로 돌아갔다.
진양은 달콤한 기분에 젖어서 하루 종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어쩌다가 유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더욱 설레는 마음에 오히려 말을 붙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유설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대필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그날 이후 진양은 몇 번이나 더 서신을 보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예전과 달리 너무 자주 서신을 보내면 유설이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포가 지났을 때, 진양은 유인표의 부름을 받았다.
진양이 찾아가 보니 마침 대청에는 도장옥과 정여립, 그리고 흑표가 함께 있었다.
유인표는 진양을 반기며 자리에 앉히고는 용건을 꺼냈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내일 혈사채를 찾아가려고 하네. 그래서 자네들을 불렀네. 그런데 나는 표국의 일을 진행해야 하니 갈 수가 없네. 대신 도 표두와 정 표두, 그리고 양 형제가 가주었으면 하네. 그리고 여기 흑 형이 자네들과 함께 갈 것이네. 흑 형은 대장군님의 명을 받고 가는 것이니 혈사채도 함부로 나오진 못할 것이네. 모두들 고생 좀 해주게나.”
“염려 마십시오.”
일행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