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42
신필천하(神筆天下) 42화
다음 날 진양은 도장옥 등과 함께 길에 올랐다. 혈사채는 응천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빠른 말을 타고 하루 꼬박 달린다면 혈사채의 본거지인 경석산(磬石山)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진양 일행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경석산 아래의 마을에서 하루를 묵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객점에 들어가서 두 명씩 나누어 방을 배정받고 여장을 풀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그들은 내일 이른 아침부터 혈사채를 찾아갈 것을 대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일행 모두 먼 길을 달려왔기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경(二更:밤 11시)쯤 지날 때였다.
진양은 문득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허공에서 빛이 반짝 뿜어졌다. 곧이어 날카로운 검날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진양은 얼른 몸을 굴려 피했다. 그러자 검날이 그대로 침상에 박히며 ‘치익!’ 하고 타는 소리를 냈다. 누린내가 나는 것을 보니 검날에 독을 발라놓은 모양이었다.
만약 진양이 피하지 않고 검날을 양손바닥으로 잡았더라면 독상을 면치 못했으리라.
진양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몸을 물렸다. 그리고 같은 방에서 자던 흑표를 깨우기 위해 눈길을 돌렸다.
한데 이미 흑표는 검까지 뽑아 들고 다른 복면인과 대적하고 있었다.
실제로 진양과 흑표는 거의 동시에 깨어나서 복면인들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다만 각자의 위기가 다급했던지라 서로가 이제야 깨어난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했다니, 암살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살수들이 분명하다.’
진양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흑 형님, 괜찮으십니까?”
흑표는 대답 대신 검을 두어 번 휘둘러보였다. 진양은 그 소리만 듣고도 흑표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복면인들은 암살에 실패하자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쏘아냈다.
삐잉! 삐잉!
새털 같이 가는 침이 예리한 소리를 울리며 날아왔다. 진양은 일전에 복면인에게 독침을 맞은 기억이 있는 터라 얼른 몸을 납작하게 엎드려 암기를 피했다.
흑표 역시 빠른 움직임이 특기였던지라 순간적으로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침을 모조리 튕겨냈다. 비록 으스름한 달빛만이 시야를 확보해 주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특유의 예리한 감각으로 막아낸 것이다.
하나 이번 공격은 복면인들이 몸을 빼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복면인들은 곧장 몸을 돌리더니 창문을 통해 달아났다.
흑표가 얼른 그 뒤를 쫓았다.
진양도 그들을 쫓으려다가 문득 옆방에서 자고 있을 도장옥과 정여립이 걱정됐다. 그는 얼른 문을 열고 나가서 옆방으로 들어섰다.
“도 표두님! 정 표두님! 모두 무사하십니까?”
“앗! 양 소협! 조심하시오!”
마침 도장옥이 황급하게 소리쳤다.
진양이 무심코 돌아보니 정여립을 공격하던 복면인이 막 들어서는 자신을 보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진양은 복면인들의 검에 독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손을 뻗지 않고 몸을 기울여 피해냈다. 복면인은 연이어 살수를 펼쳐 왔고, 진양은 그럴 때마다 연신 회피 동작만 취할 뿐이었다.
한편 한시름 돌릴 수 있게 된 정여립은 도장옥을 거들기 시작했다. 도장옥이 복면인을 상대하며 정여립에게 소리쳤다.
“나는 괜찮네! 양 소협을 도와주게나!”
그런데 때마침 진양은 독이 묻은 검을 피해 몸을 한껏 뒤로 젖히고 있는 상태였다. 이어서 그의 가슴을 검이 스치고 지나가자 진양은 상대의 빈틈을 확인했다.
진양은 곧장 질풍권을 내질렀다.
슈우우욱! 펑!
바람처럼 내지른 주먹이 적의 갈비뼈에 정통으로 들어맞았다.
“커억!”
순간 복면인은 갈비뼈가 깊이 함몰되면서 피를 토하며 튕겨 날아갔다.
권력이 어찌나 거센지 복면인은 그대로 창문마저 부수고는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순간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적수공권으로 검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데, 진양은 단 일격으로 적을 거꾸러뜨린 것이다.
아마도 밖으로 나가떨어진 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남은 복면인도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진양이 벼락같이 외쳤다.
“모두 조심하세요! 암기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면인이 품에서 암기를 꺼내 쏘아냈다.
삐잉! 삥! 삐잉!
세 대의 암기가 정확히 세 사람을 향해 각기 날아갔다. 진양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일찌감치 몸을 피했고, 정여립은 운이 좋게도 암기가 빗나가서 부상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복면인과 가장 가깝게 붙어 있던 도장옥은 도저히 암기를 막아내거나 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왼쪽 가슴에 암기를 맞고 말았다.
복면인은 옆방을 습격했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곧장 몸을 돌려 창문을 통해 달아났다.
잔뜩 화가 난 도장옥이 그를 쫓으려고 했지만 진양이 얼른 말리며 나섰다.
“도 표두님! 운기하시면 안 됩니다! 앉아서 절대 운기는 하지 마시고 토납술만 이행하십시오!”
이미 적의 독에 당한 적이 있는 진양이었다. 그 때문에 진양은 이들 독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와 다른 적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이 지난번 복면인과 상당히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사용하는 암기가 똑같은 종류였다.
도장옥은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소리쳤다.
“양 소협!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놈을 쫓으시오! 정 표두 자네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고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진양은 마침 좀 전에 자신에게 일격을 맞고 쓰러진 복면인을 발견했다.
“정 표두님! 저자의 몸을 뒤져서 해독약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제가 놈의 뒤를 쫓겠습니다!”
“알겠소!”
정 표두가 바닥에 내려섰고, 진양은 곧장 복면인을 쫓아 내달렸다.
한데 복면인의 뒤를 쫓아 숲으로 들어서고 나니 좀처럼 어디로 달아났는지 행방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만약 밝은 대낮이었다면 흔적이라도 찾아보겠는데, 캄캄한 밤이다 보니 그조차도 힘들었다.
진양이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서쪽 방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양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를 밟으며 쏜살같이 달리던 진양은 갑자기 옆구리로 누군가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는 얼른 몸을 굴려 피했다.
쉬이잇!
상대의 검이 진양의 왼쪽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재빨리 몸을 굴렸기에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진양이 얼른 몸을 바로 세우고 적을 보았다.
“엇? 흑 형님!”
“음? 양 소협?”
이제야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맥이 빠졌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아군이었던 것이다.
“그자들은 어찌 됐습니까?”
진양은 흑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의 오른손에 검 한 자루가 더 들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평소 그가 사용하는 검에 비해서 길이가 조금 짧았는데, 바로 복면인들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오른손이 피로 범벅된 것을 보아 아마도 상대의 손을 잘라내고 검을 빼앗은 듯했다.
흑표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놓쳤소.”
그가 바닥으로 검을 내팽개치자 땅 깊숙이 검날이 박혔다.
흑표는 곧장 복면인들을 추격했지만, 암살자들은 매우 민첩했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암살 훈련만 받은 살수인 듯 무공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경신법과 은신술만큼은 자못 훌륭했다.
하나 흑표 역시 빠른 움직임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지간히 그들을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이 흑표에게 암기를 다시 발사한 것이다. 흑표가 암기를 피하는 동안 두 복면인이 돌연 몸을 돌리고 흑표를 공격해 왔다.
흑표로서는 혼자서 둘을 상대하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흑표는 복면인 중 한 명의 손목을 잘라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도 적에게 일격을 당해 옆구리가 베이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검날에 발라 있던 독은 이리저리 닦이고 말라 버린 상태였다.
흑표가 주춤하자 두 복면인은 다시 암기를 쏘아내며 달아났다. 다행히 암기에 당하지는 않았지만 옆구리의 부상 때문에 두 사람을 더 쫓는 것은 무리였다.
그가 걸음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후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순간 흑표는 옆방에 잠입한 자객일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숲속에 은신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 길을 지나간 사람이 바로 진양이었다.
진양은 흑표의 옆구리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는 얼른 다가갔다.
“부상을 당하셨군요. 우선 숙소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흑표는 손을 들어 부축받기를 거부하고는 몸을 돌려 걸었다.
두 사람이 객점으로 돌아오니 도장옥은 여전히 정좌한 채로 토납술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고, 정여립은 방 한쪽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정여립은 진양과 흑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다가왔다.
“놈들은 어찌 됐소?”
“놓쳤습니다.”
진양의 대답에 정여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나 그 목소리에는 짐짓 질책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놓아 보내다니!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도 함께 그들을 쫓는 것이 나을 뻔했소.”
진양은 기분이 언짢았다. 자신이 일부러 보내준 것도 아닌데, ‘놓아 보냈다’는 표현을 쓰니 여간 기분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자는 나한테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나 보군.’
진양은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하면서 물었다.
“도 표두께서는 해독약을 드셨습니까?”
“놈의 몸을 뒤져 봤지만 해독약은 없었소.”
진양의 표정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보통 독을 쓰는 자들은 자신들이 그 독에 당할 것을 염려해서 해독약을 함께 가지고 다닌다. 그래서 도장옥이 독에 당했을 때도 조금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한데 해독약을 구하지 못했으니 또 어떻게 치료를 한단 말인가.
“얼굴은 아는 자였습니까?”
“아는 자라면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겠소?”
정여립이 다시 툭 쏘듯이 말하자 진양은 그만 더 이상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해서 도장옥에게 걸어가 물었다.
“도 표두님, 몸은 좀 어떠신지요?”
“양 소협 말대로 운기를 하지 않고 토납술만 이행했더니 한결 편해졌소. 감사드리오.”
“별말씀을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도장옥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표를 보았다.
“흑 형께서도 부상을 입은 모양이구려.”
“가벼운 부상입니다.”
흑표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도장옥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자들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으니 아쉽게 됐구려. 내 실력이 변변치 못하여 여러분께 짐이 되는 듯하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도 표두님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이번 일은 피치 못한 것이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진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그때 정여립이 잔뜩 화가 난 듯 말했다.
“분명 혈사채 놈들의 짓일 겁니다! 이놈들이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미리 살수를 쓰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도장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섣불리 단정 지을 일은 아닐세.”
“하지만 그놈들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입니까? 분명 혈사채의 그 도적놈들 짓이겠지요!”
“그럼 혈사채는 어떻게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건…….”
도장옥의 질문에 정여립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놈들은 감히 금룡표국을 건드렸지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진작부터 주시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산 아래까지 당도하자 살수를 쓴 것이겠지요.”
도장옥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여립의 말도 일리가 없진 않았으나, 혈사채가 그렇게까지 무모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혈사채가 처음부터 표국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대장군의 명을 받은 흑표도 함께인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수를 펼친다?
‘아무래도 찝찝한 구석이 많아.’
도장옥이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객실은 곧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