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43
신필천하(神筆天下) 43화
진양이 다소 격양된 분위기를 수습했다.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그만 쉬도록 하지요. 내일 아침 일찍 혈사채를 찾아가면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리겠지요.”
그러자 정여립이 콧방귀를 꼈다.
“흥! 언제 또 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잠이 오겠소?”
“그렇다고 밤을 새고 가면 기력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면서 번을 서도록 하지요. 제가 먼저 서겠습니다. 한 시진 간격으로 교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장옥이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오. 한데 어차피 나는 잠시 기를 다스려야 하니 내가 먼저 번을 서도록 하겠소. 한 시진 후에 양 소협을 깨우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두 번째로 번을 서겠습니다.”
대충의 이야기가 정리된 네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흑표가 모두를 깨워서 일어났다. 도장옥과 진양, 그리고 흑표가 번을 서는 것만으로 세 시진이 지났기에 이미 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객점 주인에게 깨진 창문을 변상하고는 조반으로 간단히 만두를 챙겨 먹었다. 이후 경석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쯤 올랐을까?
도장옥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도 표두님?”
진양이 물어보자 도장옥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더니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대략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경석산의 혈사채 위치가 표시된 지도였다.
도장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분명 이쯤이면 사람이 있어야 할 터인데.”
혈사채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이긴 하나, 혈사채의 내부까지 자세하게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혈사채를 찾아가기 위해서 제일 처음 관문이 나와 있을 뿐이다.
한데 지금 네 사람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그 표시된 지역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혈사채의 무인이 나타나서 이들을 막아서고 용건을 물어보든지 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사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순간 진양은 매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잔뜩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역시 인근에서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요?”
“흐음, 그럴 리가…….”
도장옥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면서도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막상 눈앞에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길을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흑표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우선 올라가 보지요.”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따랐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경석산 중턱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산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모양입니다.”
진양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정여립이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이놈들이 우리를 습격한 것을 실패하자 모두 도망간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랬다면 비어 있는 산채라도 나타났어야지요. 그리고 이들의 머릿수가 우리보다 훨씬 많은데 도망갈 까닭이 있겠습니까?”
“흥! 대장군님의 명을 받은 흑 형이 함께 계시니 도망을 갈 수도 있지 않겠소?”
“그래도 산채조차 보이지 않으니 이상한 노릇입니다.”
진양은 사방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이때 흑표가 돌연 몸을 번쩍 날려 마치 다람쥐처럼 잽싸게 나무를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나무 제일 윗가지까지 도달한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행 모두 흑표의 날렵한 몸놀림에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잠시 후 흑표가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장포를 펄럭이며 내려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과도 같았다. 그가 방향을 잡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쪽이오.”
모두 서로를 번갈아보며 흑표의 경신술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는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얼마나 갔을까?
과연 언덕 아래로 산채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야 안 사실이지만 진양 일행은 다른 길로 산채를 지나쳐 한참이나 더 올라갔던 것이다.
한데 문득 산채 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리고 사람들의 고함 소리도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소리일까요?”
“흠! 아무래도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오. 흑 형과 양 소협이 먼저 가보시오!”
도장옥의 말에 진양과 흑표가 얼른 몸을 날렸다.
도장옥은 독에 중독되어 운기할 수 없었기에 정여립의 보호를 받으며 뒤에 처질 수밖에 없었다.
진양과 흑표가 나는 듯이 달려가서 보니, 암벽 아래의 산채에서는 벌써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꽤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었고 부상자도 어마어마했다.
사세를 가만 살펴보니 혈사채 무인들이 침입자를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침입자들은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이들 개개인의 무공이 상당히 뛰어난 듯했다. 머릿수로 보더라도 흑의인들이 훨씬 부족했지만, 혈사채 무인들을 빠르게 제압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손속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이미 부상을 입고 전의를 상실한 무인들마저 단칼에 목을 베어내곤 했다.
‘도대체 저들이 누구기에 혈사채 무인들을 급습했단 말인가? 아무리 원한이 있다고 한들 이미 패배를 시인한 무인들까지 가차없이 죽이다니, 너무 잔인하구나.’
진양 일행은 애초에 혈사채 무인들에게 따져 물을 것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혈사채 무인들이 고양이 앞에 쥐 신세가 되어 꼼짝없이 당하는 것을 보자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꼭 그런 마음이 아니더라도 혈사채가 이대로 전멸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들이 무사해야 따져 물을 것도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양이 주먹을 말아 쥐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혈사채 무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전멸하지 싶습니다. 가서 도와주어야겠습니다.”
흑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의 의견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혈사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암벽 위였다. 때문에 진양은 이제 어떻게 혈사채를 도우면 될지 생각하면서 장내를 꼼꼼히 살폈다.
한데 가만 보니 혈사채의 내당 쪽에 제단처럼 높은 지대가 있었다. 아마도 채주가 기거하는 곳인 모양인데, 그곳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난 긴 돌계단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때문에 혈사채 무인들은 속출하는 부상자들을 그곳으로 대피시키고 있었다.
“흑 형님, 저기 높은 지대로 부상당한 혈사채 무인들을 모아주십시오. 그동안 제가 흑의인들을 상대해 보겠습니다.”
흑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려 비탈진 길을 돌아 내려갔다.
진양도 얼른 그 뒤를 쫓았다.
5. 원수를 돕다
원래 진양 일행은 산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길을 찾아왔으나 입구에서 파수를 서야 할 무인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 습격을 받고 장내까지 물러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바람에 진양 일행은 입구에서부터 길을 잃고 헤맨 것이다.
진양이 혈사채 안으로 들어서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마구 뒤섞여 들려왔다.
혈사채 무인들은 진양과 흑표가 장내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흑의인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진양은 얼른 사람들 틈으로 달려갔다.
그가 건물 사이사이를 굽이굽이 돌아 달리는데, 마침 한쪽 구석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채주님! 아악!”
진양이 깜짝 놀라서 건물을 돌아가 보니 흑의인이 커다란 낫을 내찔러 홍의를 입은 무인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낫에 배가 뚫린 무인 뒤로는 회색빛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사내가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만 보니 그 역시 옆구리와 가슴에 자상을 입어 피로 범벅이었다. 거기에 내상까지 입었는지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홍의무인이 세 명이 더 있었다. 아마도 노인을 호위하는 무사인 듯했다.
이때까지 진양은 흑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은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편 흑의인은 낫을 비틀어 홍의인의 배에서 뽑아냈다.
“끄우욱!”
홍의인이 입을 쩍 벌린 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다.
흑의인이 커다란 낫을 한차례 휙 휘두르자, 날에 묻어 있던 피가 바닥에 ‘촤악!’ 소리를 내며 뿌려졌다. 그 모습을 보며 홍의무사들은 검을 양손으로 쥔 채 몸을 떨었다.
이윽고 홍의무사 중 한 명이 용기 내어 소리쳤다.
“쳐, 쳐랏!”
동시에 세 명의 무사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흑의인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흑의인은 정면으로 빠르게 쇄도하더니 단 일 수에 홍의무사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이어서 그가 낫을 놓고 양옆으로 쌍장을 뻗어내자 홍의무사들이 속절없이 튕겨 날아갔다.
퍼펑!
“크아악!”
“아악!”
그런 중에도 그가 내찌른 낫은 여전히 앞에 서 있는 홍의무사 가슴에 꽂혀 있었다. 그가 손잡이를 잡고 낫을 뽑아내자, 홍의무사가 털썩 쓰러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회색빛 수염의 노인뿐이었다.
노인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흑의인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죽여라!”
흑의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낫을 들어 내려쳤다.
그런데 낫이 노인의 목을 찍기 직전,
슈우우웃!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맹한 기운에 흑의인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파팡!
허공을 내찌른 진양의 주먹에서 요란한 파공음이 울렸다. 엄청난 기의 파장에 흑의인이 짐짓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제야 진양도 흑의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한데 이제 보니 피부가 조금 거뭇했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눈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색목인(色目人)?’
진양이 내심 놀라고 있는데, 색목인이 서투른 발음으로 소리쳤다.
“누구냐!”
진양이 그 와중에도 포권을 취하며 대꾸했다.
“금룡표국에서 온 양진양이라고 하오. 만약 그쪽에서 살수를 거둔다면 나 또한 그쪽을 해치지 않을 것이오.”
상대는 금룡표국이라는 말을 알아듣고는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가 곧 코웃음을 치더니 달려들었다.
“흥! 죽어라!”
진양은 앞서 색목인의 무공 실력이 결코 만만찮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한 치의 방심도 하지 않았다. 진양은 얼른 몸을 기울여 적의 공격을 피한 후 상대의 배후로 돌아가 풍결권을 내질렀다.
쉬이익! 팡!
워낙 긴장한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풍결권은 상대의 옆구리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커억!”
색목인이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갔다. 그는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내공이 제법이군!”
“알아봐 주시니 감사하오. 계속하시겠소?”
진양이 차분히 대꾸했으나 그 역시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의 주먹을 이렇게까지 감당해 낸 사람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양이 사용한 초식의 한계였다. 풍결권은 천상련에 갓 입련한 자들을 상대로 가르치는 초식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완벽하게 초식을 펼치더라도 그 위력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진양이 풍결권이 아니라 좀 더 격조 높은 권초를 사용했더라면 아마 색목인은 지금쯤 요단강을 건너고 있으리라.
색목인은 대답 대신 낫을 휘두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진양은 얼른 몸을 굴려 피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검 한 자루를 주워 들었다.
까앙!
낫과 검이 부딪치며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진양이 왼손으로 장을 뻗어냈다.
색목인은 진양의 내공이 몹시 두텁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때문에 그는 맞서 손을 뻗지 않고 얼른 몸을 옆으로 굴려 피했다.
그 순간 진양은 검을 높게 세우고 야공유성 초식을 펼쳤다. 검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니, 그 기세가 무척 매섭고 날카로웠다. 색목인은 피할 여유가 없음을 느끼고 얼른 낫을 들어 올려 검을 막았다.
까앙!
다시 한번 커다란 금속성과 함께 불티가 튀었다. 낫을 들어 막은 색목인은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이때 진양은 곧바로 선풍유검 초식을 전개했다.
십절류의 무공 특징은 바로 흐름에 있었다. 모든 초식이 다양하게 변하면서 흘러가듯이 이어지는 것이 바로 십절류의 장점이었다.
진양의 몸이 돌개바람처럼 회전하자 색목인은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낫을 든 채로 팔이 싹둑 잘려 나가고 말았다.
“아아악!”
색목인이 길게 비명을 터뜨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가 얼른 왼손으로 오른쪽 팔뚝 몇 군데의 혈을 점하고는 지혈을 시도했다. 그러고는 진양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손으로 낫을 주워 들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실제로 색목인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진양이 어린 것을 보고 방심한 것이 큰 실수였다.
진양은 그를 쫓으려다가 쓰러져 있는 노인을 의식하고는 돌아왔다.
“상처는 좀 어떠신지요?”
“자네는…… 금룡표국에서 왔다고 했나?”
힘겹게 대답하는 노인은 이미 기력이 많이 쇠진한 듯했다. 진양이 다가가서 맥을 짚어 보니, 내상이 몹시 깊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진양은 얼른 노인의 혈도를 몇 군데 짚어 그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말씀을 많이 하지 마십시오.”
“클클. 곧 죽을 몸이라는 건 내가 잘 안다. 금룡표국에서 왔다면…… 나를 죽여야 할 것이 아닌가?”
“원수를 갚고자 온 것은 아닙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대화라…… 클클. 우욱! 쿨럭!”
노인은 툴툴 웃다가 돌연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냈다.
진양은 그를 계속 이곳에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얼른 어깨에 걸머멨다.
노인은 진양의 거침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 우습기도 했다.
진양은 다시 건물을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