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44
신필천하(神筆天下) 44화
“이놈들아! 그래, 어디 덤벼보아라!”
진양이 얼른 또 모퉁이를 돌아가니 이번에는 위사령이 마구 고함을 내지르며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두 명의 흑의인이 위사령 한 사람을 두고 섣불리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 포기하시지!”
흑의인 하나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검을 휘둘러 갔다. 그 순간 위사령이 잽싸게 흑의인 품으로 파고들더니 도를 올려쳤다.
쉬이잇! 까앙!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음에도 위사령의 완력이 어찌나 강한지 흑의인은 검이 튕겨 나가면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말았다. 그 순간 위사령이 왼손을 뻗어 장력을 발출했다.
퍼엉!
“크욱!”
흑의인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진양이 내심 감탄했다.
‘보지 못한 사이에 위 선배의 무공이 한층 더 강해졌구나.’
한편 흑의인 한 명을 물리친 위사령은 기세등등한 자세로 돌아섰다.
“크하하! 어떠냐? 포기할 쪽은 바로 네놈들이다!”
그런데 그가 막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쪽에 서서 보고 있던 진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그의 시선은 진양의 어깨에 걸쳐진 노인에게 향했다.
순간 위사령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채, 채주님!”
그가 경악성을 터뜨리는 바람에 흑의인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흑의인은 갑자기 나타난 진양을 보고 적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했는지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순간 위사령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진양에게 달려왔다.
“이놈! 또 이렇게 만났구나! 채주님을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위사령의 도가 거침없이 진양을 향했다. 그 기세가 몹시 매서웠기에 진양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어딜 피하느냐? 결국 네놈들까지 왔구나!”
“위 선배님! 오해입니다! 도를 거두시지요!”
“오해는 무슨 오해? 감히 채주님을!”
위사령은 진양이 노인을 상처 입혔다고 착각한 것이다. 진양도 대략의 상황을 짐작하고는 얼른 소리쳤다.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서 혈사채의 무인들을 높은 건물로 대피시키십시오! 흩어져 있다간 모두 죽을 것입니다!”
“흥! 네놈의 간계에 말려들 것 같으냐?”
위사령은 진양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대신 연신 살기를 뿜어내며 도를 휘둘러댈 뿐이었다. 진양은 노인까지 둘러메고 있으니 위사령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갑자기 돌아가는 상황에 어리둥절하던 흑의인은 천천히 사정을 깨우쳐 갔다. 둘 사이의 오해야 어떻게 되었든 그로서는 지금이 위사령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가 곧장 위사령에게 달려들며 검을 후려쳤다.
그 순간 진양이 흑의인의 움직임을 보고 얼른 앞을 막았다. 진양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흑의인의 검을 피해내고는 일장을 뻗었다.
슈우웃! 펑!
“크아악!”
흑의인도 진양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짐작 못했기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반면 같은 순간, 위사령의 도는 진양의 어깨를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진양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튀어 올랐지만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위사령은 그제야 진양이 자신을 보호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도를 거두었다.
“정, 정말 네가 채주님을 해친 것이 아니란 말이냐?”
“그렇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그럼 왜 여길…….”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우선 채주 어르신을 모시고 제일 높은 건물로 피하십시오! 혈사채의 모든 무인에게 그쪽으로 피하라고 하십시오! 저와 함께 온 한 분이 혈사채의 부상자들을 옮기고 있을 테니 막지 마시구요!”
“알, 알겠네!”
위사령은 뭐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우선 진양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언뜻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떤 상황이든 지금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내공을 실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우들은 들어라! 모두 혈사전(血師殿)으로 물러나도록 하라!”
그의 목소리가 전해지자 곳곳에서 싸우던 혈사채 무인들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위사령 역시 노인을 업은 채 혈사전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잠시 후 그곳에 흑의인 세 명이 나타났다.
진양은 얼른 몸을 돌려 혈사전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계단 입구에서 몸을 돌려 추격하는 흑의인들을 상대했다.
흑의인 중 두 명은 검을 들고 있었고, 한 명은 장봉을 들고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검부터 상대해야겠다!’
진양은 곧바로 검을 휘두르며 두 흑의인에게 쇄도했다. 흑의인들은 진양이 갑자기 패도적으로 나오자 몸을 움찔 떨고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공격권에서 벗어난 장봉의 흑의인은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진양의 뒤를 공격했다. 본래 이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재빠르고 민첩했기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진양은 미처 몸을 돌려 피하지 못하고 등에 봉을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아무래도 급하게 세 명을 상대하려니 손발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진양의 몸에서 호체신공이 발동했다. 물론 진양 역시 이를 믿고 검부터 상대한 것이었다.
봉을 후려친 흑의인은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공력에 깜짝 놀라서 봉을 놓치고 말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검을 든 흑의인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그때 계단 위의 혈사전에서 위사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양 아우! 우린 모두 대피했네! 자네도 어서 올라오게!”
진양은 곧바로 몸을 돌리고 계단을 따라 달려 올라갔다. 계단은 대여섯 명이 나란히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는데 상당히 높았다.
진양이 혈사전 마당에 올라서고 보니 과연 혈사채 무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흑표와 도장옥, 그리고 정여립까지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도장옥과 정여립은 뒤늦게 암벽 위에 다다라서 흑표가 부상자들을 데리고 혈사전으로 가는 것을 보고 대략의 계책을 눈치챘던 것이다.
위사령이 양손을 맞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양 아우! 자네들이 만약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위기를 면치 못했을 걸세! 고맙네!”
그가 허리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진양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리 감사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자 한쪽 곁에 서 있던 정여립이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감사할 것까지 없지! 어차피 우리는 당신들을 추궁하러 왔으니까! 우리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당신들을 가차없이 죽일 것이다!”
그 말에 위사령을 비롯한 혈사채 무인들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미 받은 도움도 있고 상황이 급박한지라 섣불리 나서서 대거리를 하진 않았다.
진양 역시 정여립의 말투가 여간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을 터인데 꼭 저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정 표두는 정말 도량이 넓지 못한 것 같구나.’
하지만 혈사채 무인들 중에도 진양 일행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다. 우선 도움을 받긴 했지만 금룡표국이 혈사채에 호감을 가지고 나섰을 리는 만무했다.
그때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린 사내가 불쑥 나섰다. 그는 눈매가 매우 가늘어서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다. 나이는 정여립보다도 조금 어릴 듯했다.
“우리는 꺾어질지언정 부러지진 않는다. 어차피 당신들이 우리와 싸울 목적으로 왔다면 지금이라도 덤벼라!”
그가 양손에 든 쌍검을 휙 저었다. 그러자 검날에 묻어 있던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기세에 정여립이 움찔 떨었지만, 자세히 보니 상대는 자잘한 부상을 많이 입은 데다 오랫동안 치른 싸움으로 기력을 꽤 소진한 듯 보였다. 이에 정여립이 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흥! 고작 도적놈들 따위가 겉멋만 잔뜩 들었구나! 오냐, 이 자리에서 네놈들을 모두 죽여주마!”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혈사채 무인들도 욕지기를 쏟아내며 엉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이때 도장옥이 얼른 나서서 소리쳤다.
“정 표두! 경거망동하지 말게!”
“도 표두님은 이놈들이 우리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무참히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봤지. 하지만 지금은 복수를 따질 때가 아니야.”
도장옥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여립도 더 이상은 대꾸하지 않고 검을 거두었다.
잠시의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진양이 계단 쪽으로 가서 보았다.
혈사전 아래에는 흑의인들이 모여서 웅성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계단이 좁고 높아서 함부로 오르진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했다.
그때 위사령이 진양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지난번 금룡표국을 친 것은 바로 저들의 사주였소!”
갑작스러운 말에 진양 일행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정여립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흥! 그걸 우리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요? 이제 와서 죽게 생겼으니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당신들이 한 짓을 저자들에게 뒤집어씌워서 우리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아니오! 물론 우리가 금룡표국에 저지른 짓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오! 저들은 우리에게 표국을 습격하라고 사주했고, 그 일을 실패하자 이제 우리의 입막음을 하러 온 것이오!”
진양 일행이 서로를 번갈아보았다.
위사령의 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진양은 위사령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런데 그때 위 선배는 어떻게 마차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겁니까?”
위사령이 고개를 저었다.
“복면을 쓴 자가 와서 밧줄을 끊어주었는데, 누군지는 나도 모르겠네.”
그러자 다시 정여립이 소리쳤다.
“앞뒤가 맞지 않잖소? 저들이 당신을 구해주었는데 이제 와서 왜 죽이려고 한단 말이오?”
“내가 잡혀가면 당신들에게 저들의 정체를 다 말할까 봐 겁이 났던 거겠지!”
이 역시 듣고 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한데 진양이 생각하기에 조금 이상한 점도 많았다. 저들이 정말 위사령을 구해주었다면 그날 왜 표행을 습격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 표행은 도장옥과 정여립, 그리고 유설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위사령의 표정이나 눈빛을 보면 그가 결코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귀하들은 어디서 오신 고인이기에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오?”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내공이 꽤나 심후한 자임이 분명했다.
진양이 계단으로 걸어가서 소리쳤다.
“우리는 응천부 금룡표국에서 왔소! 귀하들은 누구시오?”
이번에는 진양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들 진양의 목소리를 듣고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내공이 순후하기 이를 데 없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이미 금룡표국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인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었다.
“우리는 혈사채와 쌓인 은원을 풀러 온 사람들이오! 귀하들은 방해하지 말아주시오!”
진양은 그들이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을 보고 위사령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진양이 주변을 가만 둘러보니 혈사채의 무인 중 기력이 성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밤이 새도록 저들과 혈전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어젯밤 복면인들이 객점에서 자신들을 습격했을 때, 이미 또 다른 무리가 혈사채를 동시에 습격한 것일지도 몰랐다.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멸해 버린다면 정체가 발각되는 것을 일단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혈사채가 전멸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겠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저들 중 한 명이라도 사로잡아서 대질시키는 것이겠지. 그리고 정말 놈들이 어제 객점을 습격한 자객과 같은 무리라면 도 표두님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생각을 마친 진양이 계단 몇 칸을 성큼성큼 내려가서 소리쳤다.
“우리도 혈사채에 볼일이 있으니 손님들은 잠시 기다려 주시오.”
“흥! 우리가 먼저 왔는데 어째서 기다리라는 것이오? 당장 물러들 나시오!”
“굳이 지금 은원을 풀어야겠다면 나부터 꺾으시오! 내가 패한다면 당신들이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겠소!”
“결자해지(結者解之)! 매듭은 묶은 자가 나와서 풀어야 할 일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우리도 혈사채와 풀어야 할 매듭이 있으니 순서를 양보할 수가 없겠소!”
이쯤 되자 흑의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뭔가를 한참 수군거리더니 이내 무리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좋소! 내가 귀하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아보지! 하지만 만약 귀하가 패한다면 군말없이 물러나야 할 것이오!”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올라오시지요!”
“그 전에! 여기서 내가 올라가면 계단 아래에서 싸워야 하니 불리한 것이 아니겠소? 공평하게 같은 위치의 계단에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소?”
“좋습니다!”
진양이 대답하고 나자 도장옥이 다가왔다.
“양 소협, 괜찮겠소?”
“걱정 마십시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도장옥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의 말대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일찌감치 유리한 고지를 점해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흑표가 다가왔다.
“내가 나서보겠소.”
“아닙니다. 흑 형께서는 어제 다친 상처가 있지 않습니까? 우선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그 말에 흑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물러났다. 진양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대련을 통해서 진양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한 바 있었다.
반면 혈사채 무인들로서는 사실 진양이 썩 미덥지만은 못했다. 그의 진정성이 의심되어서가 아니라, 그의 실력에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상대는 기껏 해봐야 약관도 지나지 않았을 소년이 아닌가? 과연 저 소년이 혼자의 힘으로 흑의인들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혈사채 무인들은 이왕이면 경험이 풍부한 도장옥이 나서주거나, 강한 인상을 풍기는 흑표가 싸워주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어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으랴.
그때 위사령이 진양에게 자신의 도를 집어 던졌다.
“무기가 없다면 이걸로 싸워주게! 그래도 제법 쓸 만할 걸세!”
진양이 얼른 손을 뻗어 낚아챘다.
과연 이리저리 휘둘러보니 공기를 가르는 도날에 제법 예기가 서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위 선배님.”
“잘 부탁하네.”
위사령도 어쨌거나 이제는 진양에게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가 옛 감정은 잊고 진양에게 고개 숙여 말했다.
진양은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