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46
신필천하(神筆天下) 46화
“양 소협! 채주님을 구해주시오! 내 이렇게 부탁드리겠소!”
그가 갑자기 말투까지 바꾸며 애걸하자, 진양이 당황해서 움찔 물러났다.
그때 정여립이 불쑥 나서서 검을 뽑아 들더니 고래고래 소리쳤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당신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알고도 감히 그런 말을 내뱉는단 말이오? 지금 당장 당신네들을 갈아 마셔도 속이 시원찮을 판에 살려달라고? 흥!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하지만 위사령은 정여립의 호통이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는 진양에게 다시 매달리며 호소했다.
“채주님은 애초에 이 일에 반대했소! 하지만 내가 독단으로 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인 거요! 저 빌어 처먹을 놈들이 우리에게 금화 삼천 냥을 제시했소! 그래서 내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그만……! 양 소협, 부탁드리오! 원수를 갚으려거든 내 목을 치면 될 일이오! 채주님을 좀 살려주시오!”
정여립이 다시 나서서 소리쳤다.
“오냐! 그러면 내가 먼저 네놈 목을 치마!”
그가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분기탱천한 정여립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검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릴 듯했다.
그때 도장옥이 얼른 소리쳤다.
“정 표두! 경거망동하지 마시게!”
하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가 끝났을 땐 검이 위사령의 목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한 줄기 빛이 번쩍이더니 ‘깡!’ 하는 쇳소리가 울리면서 정 표두가 휘청 물러갔다. 그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니 흑표가 검을 올려쳐 막은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자 흑표가 검을 거두어들이면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자에게 알아내야 할 것이 많소.”
도장옥도 나서서 흑표의 편을 들었다.
“정 표두, 자네 요즘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변한 건가? 복수는 언제든 할 수 있다. 우리 국주님께서 복수를 못해서 이러고 계신 게 아니지 않나? 좀 차분해지시게.”
이쯤 되자 정여립도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흑표를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위사령을 한차례 쏘아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물러났다.
진양은 착잡한 마음으로 위사령과 채주를 번갈아보았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연 진정한 의협이란 무엇이고 복수란 또 무엇인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채주를 살려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면 금룡표국이 복수를 하도록 방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어디선가 읽은 글에 의하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한은 어찌 풀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보니 진양은 문득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자신 역시 부모님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는가? 하나 지금까지 복수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 대상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세상에 황제를 대상으로 복수하려는 자는 아마도 없지 않겠나.
그래서 자신은 지금 한을 품고 있는가?
모르겠다.
부모님을 잊은 적은 한시도 없지만, 복수를 하지 못해 괴로워하거나 한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용서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 다시 위사령의 목소리가 진양의 귀를 때렸다.
“양 소협! 제발 부탁드리겠소!”
진양은 바짓단을 붙들고 매달리는 위사령을 보면서 내심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들이 비록 악한 짓을 많이 저지르고 다녔다지만, 서로에 대한 의가 이처럼 두텁구나.’
진양이 주변을 둘러보니 흑표는 무심한 태도로 서 있었고, 정여립은 금방이라도 위사령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장옥을 바라보니,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위사령과 채주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다가 진양과 눈길이 마주치자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양이 그 뜻을 알아듣고 채주에게 다가갔다.
그가 채주의 맥을 짚자 정여립이 그 의도를 알아채고 발끈해서 나섰다.
“뭐하는 짓이오?”
“정 표두!”
도장옥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정여립을 말렸다.
“우선 이들에게서 알아내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은가?”
정여립은 그래도 납득하기 힘들다는 듯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반면 위사령과 장발사내는 얼른 채주의 몸을 부축해서 돌려 앉혔다. 진양은 양손을 뻗어서 채주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공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두터운 공력이 줄기줄기 흘러들어 가자 채주의 안색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진양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따뜻한 공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천천히 운기하기 시작했다.
6. 천의교(天義敎)
혈사채의 채주 곡전풍(曲癲風)이 머무는 혈사전.
혈사전 대청의 커다란 탁자에는 진양 일행과 위사령, 장발사내, 그리고 곡전풍 채주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곡전풍은 진양에게 진기를 주입받은 뒤 안색이 눈에 띄게 호전되어 있었다. 진양의 도움으로 그가 목숨을 건지자, 혈사채 무인들은 진양에게만은 시종일관 예의 바르게 대했다. 다만 정여립에게만큼은 쌀쌀한 눈빛을 던졌다.
곡전풍은 좌중을 둘러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내 불찰이었소. 내 식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니 식구들을 대신해서 사죄하겠소. 염치불고하고 용서를 빌겠소.”
그가 머리를 숙이자 위사령과 장발사내 역시 머리를 숙였다. 진양 일행이 착잡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정여립만큼은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곡전풍은 다시 장발사내와 위사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손님들께 인사를 드리거라.”
그러자 장발사내가 먼저 일어나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혈사채 좌검부장(左劍部長) 조전(趙田)입니다.”
이어서 위사령이 일어나 포권하며 말했다.
“혈사채 우도부장(右刀部長) 위사령입니다. 일전에 금룡표국에 저지른 잘못은 내 독단이었소이다. 벌을 하시겠다면 내 목숨을 취하시면 될 일입니다.”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정여립이 다시 콧방귀를 꼈다.
하나 도장옥이 정중히 포권하며 대꾸했다.
“우린 오늘 원수를 갚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조사하기 위함입니다. 은원을 따지는 것은 훗날 국주님께서 정하실 것입니다.”
그 말에 위사령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혈사채는 크게 두 개의 조직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바로 좌검부와 우도부였다. 좌검부를 책임지고 총괄하는 자는 바로 조전이었고, 우도부의 수장은 위사령이었다.
도장옥이 곡전풍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들어볼까요? 혈사채가 우리 표국을 습격했던 경위에 대해서 말입니다.”
곡전풍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말씀드리겠소.”
혈사채가 직례 일대에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경석산을 찾아오는 손님들이었다. 그중에는 혈사채에 원한을 가지고 복수를 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살인 청부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혈사채가 살문(殺門)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악명이 높다 보니 이런저런 사주가 종종 들어오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혈사채에 두 명의 무인이 찾아왔다. 한 사람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동자 색이 푸른색목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두 눈이 움푹 들어가고 광대뼈가 유난히 도드라진 중년인이었다.
색목인은 자신을 파비산(破費酸)이라고 소개하였고, 중년인은 종지령(鍾志靈)이라고 이름을 밝혔다. 이들은 뜻밖의 사주를 해왔다.
바로 금룡표국을 습격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금룡표국은 여러 강호 문파와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마저도 금룡표국을 신뢰하고 있으니, 자칫 잘못 건드리면 혈사채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에 좌검부장 조전은 반대 의견을 내비쳤고, 채주 역시 거절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파비산과 종지령은 좀처럼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채주를 설득하다가 이윽고 황금 삼천 냥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했다.
그 말에 곡전풍을 비롯한 부장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금 삼천 냥이라니!
하지만 원래 떡밥이 크면 그만한 위험이 따르는 법이 아니겠는가.
먼저 냉정한 성격을 가진 좌검부장 조전이 우려를 표시했다.
하지만 위사령은 조전과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그는 충동적이면서도 다혈질적인 면모가 다분했다. 그런 그에게 황금 삼천 냥은 결코 눈 한번 딱 감는다고 보이지 않는 그런 하찮은 떡밥이 아니었다. 더구나 최근 들어 혈사채는 직례 일대에 분타를 두기 시작하면서 자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황금 삼천 냥이면 필요한 자금을 모두 충당하고도 남아돌 만큼의 거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채주 곡전풍은 일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결국 거절하고 말았다.
만약 수송 물품을 빼앗는 일이라면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한 것은 보표들을 몰살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표국에서 가장 노장으로 불리는 도장옥과 국주의 딸인 유설을 반드시 죽여 없애라는 것이었다.
물론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일을 처리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만약 실패하기라도 하면 그날로 혈사채는 벌통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곡전풍은 파비산과 종지령이 거듭 설득하는데도 그들의 요구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던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표행을 습격했던 것입니까?”
“그것에 관해서는 우도부장이 말해줄 것이오.”
곡전풍의 말에 위사령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내 잘못입니다.”
위사령은 그날 파비산과 종지령이 돌아가자, 황금 삼천 냥이 눈앞에서 날아가 버린 듯하여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날 저녁 말을 몰고 그 두 사람을 쫓았다. 그가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한참 동안 달리고 나자, 마침 파비산과 종지령이 머무는 객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파비산과 종지령은 위사령이 찾아오자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채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셨소. 나 우도부장 위사령이 이번 일을 맡게 됐소. 대신 당신들의 정체를 알려줘야 우리가 일에 착수할 수 있소이다.”
그 말에 파비산과 종지령은 반색하며 일어섰다. 그들은 자신들을 천의교(天義敎)에 속한 무인이라고 소개했다. 위사령은 우선 종지령과 함께 일에 착수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표행을 습격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착수금으로 황금 일천 냥을 받아서 돌아왔다.
한데 정작 표행을 습격할 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던 것이다. 표행에 진양이 끼어들었고, 일이 꼬이고 만 것이다.
“천의교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도장옥이 진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흑표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흑 형께서는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흑표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많은 정보를 듣지는 못했지만 진양 일행은 천의교가 꽤 규모가 큰 집단인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황금 삼천 냥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걸 수 있을 만큼 재력이 막강하리라.
위사령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런데 그놈들은 일에 실패하자 우리 산채를 습격한 것입니다! 우리의 입막음을 하려는 것이었겠지!”
“천의교의 거점이 어디에 있는 것이오?”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워낙 쉬쉬하며 행동했기에 자세하게 물어볼 수도 없었소이다. 다만 그들은 혈사채를 나선 후 줄곧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북쪽이라…….”
그때 곡전풍이 말했다.
“그들은 밀교의 한 지파인 것 같소.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이 여간 요상한 것이 아니었소이다. 그리고 외모로 보아 천축(天竺:인도)에서 온 자들이 꽤 보이더구려.”
“밀교라…… 그럼 몽골인들의 종교인 라마교란 말씀입니까?”
라마교란 본래 티베트에서 발전한 불교로, 13세기경 원나라에 전파되어 국교로 선정된 바 있다. 라마교의 뿌리 역시 바로 밀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 곡전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