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51
신필천하(神筆天下) 51화
결국 진양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철우비기를 펼치고 간신히 삼절곤을 막아낼 수 있었다.
쩌엉!
육중한 소리와 함께 진양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터벅터벅 물러났다.
이제 한 번만 더 삼절곤을 휘두른다면 진양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양은 끝내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죽는구나!’
갑자기 죽음을 직면하게 되자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그의 생각은 표국의 유설에게 머물렀다. 그녀의 꽃 같은 얼굴을 떠올리자 문득 그리움과 함께 슬며시 미소마저 그려졌다.
한편 갈지첨은 진양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자 속으로 뜨끔했다.
‘이 녀석이 아직도 힘이 남아 있는 건가? 저 웃음의 의미는 뭐지?’
그때였다.
갈지첨은 문득 남쪽 방향에서 매서운 기운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혹시나 진양이 무슨 꿍꿍이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되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차였다.
한데 갑자기 강맹한 기운이 날아오니 적지 않게 놀랐다. 그가 얼른 몸을 돌리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데, 다행히 그 기운은 옆 쪽 숲속으로 날아들어 갔다.
그 순간 숲이 흔들 움직였다.
갈지첨과 종지령이 깜짝 놀라서 옆의 숲을 바라보았다.
종지령이 소리쳤다.
“거기 누구냐!”
그러자 수풀이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더니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기운이 몹시 희미해서 두 사람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수풀을 헤집으며 비틀거리며 나타난 것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기 직전인 노루 한 마리였다.
남쪽에서 날아온 강맹한 기운은 바로 노루의 몸에 박힌 화살이었던 것이다.
놀라기는 진양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고 삶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나타난 노루 한 마리가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켜 준 것이다. 또한 노루의 몸에 화살이 박혀 있으니 근처에 사냥하던 사람이 있을 거란 뜻이고, 날아온 기세로 보아서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한편 종지령은 얼른 옆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더니 먼발치를 내다보고는 재빨리 내려왔다.
“사부님! 황실의 깃발입니다!”
황실이라는 말에 갈지첨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어디에 있더냐?”
“금방 이곳으로 올 것 같습니다! 지금 마주쳐서 이로울 것은 없으니 우선 여길 떠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크흠.”
갈지첨은 불편한 침음을 흘리며 진양을 돌아보았다.
진양은 이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갈지첨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저 녀석이 아까 지은 미소가 이 때문이었나 보군.’
사실 진양은 지금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만약 갈지첨이 지금 그에게 가서 가볍게 천령개만 내려쳤어도 진양은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었다.
하지만 갈지첨은 진양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도 진양을 죽일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그 미소가 영 찜찜했던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삶의 끝자락에서 떠오른 한 여인의 얼굴이 이 순간 죽음도 피해가게 만들 줄을.
갈지첨은 진양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흥! 오늘은 하늘이 널 돕는구나! 하나 다음에 날 만나면 살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결국 그는 종지령을 데리고 북쪽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내 두 사람의 기척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진양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모든 기운을 다 소모했기 때문이다.
진양은 검을 지팡이 삼아 기대고 서 있다가 이내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때 마침 여러 명의 인기척이 들리더니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진양은 다음 순간 앞으로 털썩 엎어졌다.
엎드려 있는 진양의 시야에 말발굽과 사람들의 발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소리쳤다.
“저하! 여기 웬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은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진양은 그 목소리가 상당히 귀에 익었다. 바로 얼마 전 남옥의 집에서 만났던 황손 주윤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자, 다시 또 다른 굵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 수상한 자일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이때쯤 진양은 눈이 가물가물 감기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 앞에 와서 이리저리 몸을 만지고 살피더니 돌아서서 말했다.
“저하, 아무래도 부상이 심한 것 같습니다.”
“흐음, 내가 직접 보지.”
누군가 말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양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진양이 가만 보니 신발이 고귀해 보이는 것이 틀림없이 주윤문일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윤문의 놀란 목소리가 다시 귀에 이어졌다.
“아니, 그대는 양 소협이 아니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이오?”
주윤문이 소리쳐 물었지만, 진양은 지금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체력과 공력이 모조리 바닥난 지금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내 주윤문이 소리쳤다.
“이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다! 어서 이자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자!”
“예, 저하!”
진양은 사람들이 대답하는 소리를 들으며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1. 신병이기를 얻다
진양은 온몸을 뒤덮는 뜨거운 화기(火氣)를 느끼고 있었다.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 안은 온통 이글거리는 불길에 삼켜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처참하게 떨어져 나간 문밖으로는 어렸을 때 자주 나가 놀곤 했던 안마당이 보였다. 그곳에는 낯선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하인들의 시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불길에 휘감긴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면서 진양을 덮쳤다. 진양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들어 올리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진양은 천천히 눈을 떴다.
‘꿈…… 인가?’
희부연 등잔불의 누르스름한 빛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 자신이 어느 방의 침상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하얀 턱수염을 길게 기른 의원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아마도 맥을 짚고 있는 모양이었다.
“열이 많이 내렸군. 심박도 안정을 되찾았고. 기분이 좀 어떠시오?”
나이 지긋한 의원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꾸었던 꿈을 상기하자 이내 착잡한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한동안 잊었던 십삼 년 전의 일이다.
의원도 굳이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닌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양이 얼른 입을 열어 몇 마디를 물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신을 뒤덮는 화끈한 통증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구석구석 들쑤셨다. 결국 진양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음에 진양이 깨어났을 때는 방 안에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밝은 대낮이어서 방 안의 풍경이 확연히 보였다. 방 안에는 온갖 호사스러운 장식품과 가구들이 진열되어 있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누워 있는 침상 역시 두툼한 비단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고 양 갈래로 곱게 가른 상유자(床?子:침대 커튼)는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금룡표국도 매우 호화스러운 구조였지만, 이곳은 그보다 더욱 부유하면서도 화려해 보였다.
어쩌다가 이런 방에 누워 있게 된 걸까.
진양은 밀교의 위교사왕 중 한 명인 금곤삼왕 갈지첨과 격전을 벌인 기억이 났다. 하지만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유설의 얼굴을 떠올린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어쨌거나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전신을 들쑤시는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내상을 입은 데다 내공을 완전히 소진시켜 버렸으니 전신의 근맥이 가닥가닥 끊어질 듯 아파왔다.
‘당분간은 운공하면서 몸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얼마 동안이나 의식을 잃었던 것일까? 또 여기는 어디일까?’
금룡표국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진양은 흐리멍덩한 혼수상태 속에서 보았던 늙은 의원을 떠올렸다.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누군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진양은 깜짝 놀랐다.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손 주윤문이 아닌가?
그의 양옆으로 두 사람이 따르며 보좌하고 있었다.
진양은 도무지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혹시 아직도 꿈에서 깨지 않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주윤문은 진양이 깨어난 것을 보고 반색했다.
“오, 정신이 들었소?”
“저, 저하…….”
진양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예를 차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주윤문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번거로운 예는 접어두시오.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소. 어젯밤에 잠깐 의식이 돌아왔었다고 전해 들었소. 양 소협은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던 거요? 처음에 발견했을 때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오.”
“그것이…… 표국을 위협하던 자들과 마찰이 있었사옵니다.”
진양은 괜히 입을 가볍게 놀렸다가 이 사건이 어떻게 번질지 알 수 없어 우선은 대충 얼버무렸다. 주윤문 역시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원래 강호의 일에 황권이 개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오. 참, 표국에는 기별을 넣어두었으니 양 소협은 우선 몸조리에 신경 쓰구려.”
이때쯤 진양은 주윤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이 조금씩 기억나고 있었다. 진양은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감사를 표했다.
“저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리 예를 차릴 필요 없소. 괜히 내가 옆에 있어봐야 신경만 쓰일 것 같군. 그럼 나는 이만 방해하지 않고 가볼 테니 몸조리 잘하시오.”
“예, 저하.”
주윤문이 신하들을 이끌고 돌아가자 진양은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우리 가문을 멸문시키더니 그 손자는 내 목숨을 구했구나.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다.’
잠시 후 시녀 한 명이 따뜻한 죽 한 그릇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진양은 몇 숟가락을 들었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더는 먹지 못하고 반 이상을 남겼다.
이렇듯 진양은 꼬박 사흘을 누워 지내다시피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는 닷새 만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직은 원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운신이 그리 자유롭지는 못했다. 다행히 주윤문이 그를 아끼는 마음에 계속해서 머물기를 권한 데다 표국에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몸 관리를 우선시하라며 연락을 보내온 터였다.
덕분에 진양은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다스릴 수 있었다.
칠 주야가 지나자 진양은 걷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몸이 회복됐다. 진양은 주윤문을 찾아가서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해 수발을 들던 시종 한 명에게 부탁했다.
“오늘 황태손 저하를 만나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소.”
그러자 시종은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이 있는지 곧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진양을 안내했다. 진양은 옷을 추스르고 시종의 뒤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