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53
신필천하(神筆天下) 53화
스윽.
드디어 일획을 그으며 글자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진양은 느긋한 움직임으로 글을 적어갔는데, 그 동작이 마치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같았다.
강물은 폭이 넓어졌다가 좁아지기도 하며 도도하게 흘러갔다.
진양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일필휘지로 글을 모두 적고 나자 주윤문은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대, 대…… 대단하오, 양 소협.”
“부끄럽습니다, 저하.”
“내가…… 지금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글씨체를 본 적이 없소.”
주윤문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진양의 글씨는 정말이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직 먹물도 채 마르기 전이어서 그런지 글씨에서 우러나오는 생동감은 미불보다도 더 뛰어난 듯했다.
글자에서는 흙냄새가 나고 창공의 바람이 부는 듯했으며, 기러기가 나는 듯하고 술의 향기마저 은근히 풍겨오는 듯했다.
주윤문은 진양의 글씨에 많은 감흥을 받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래서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진양과 함께 이런저런 서예에 관해 담소를 나누었다.
본래 진양은 이날 인사를 한 후 황궁에서 나갈 생각이었지만, 주윤문은 한사코 그를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진양은 다시 별궁에서 하룻밤을 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진양은 다시 주윤문을 찾아서 작별 인사를 했다. 궁을 나가겠다는 진양의 말에 주윤문은 시종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결국 그는 진양에게 아패(牙牌: 궁전의 출입증)을 쥐어주며 말했다.
“양 소협이 굳이 떠난다니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도 없겠소. 내 아패을 줄 테니 혹시라도 적적할 때 그대를 불러 또 담소를 나눌 수 있겠소?”
“황공하옵니다, 저하. 언제든 그리하십시오.”
진양이 깊이 읍을 하며 대답하자 주윤문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배웅했다.
황궁을 나선 진양은 곧장 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오랜만에 표국의 대문으로 들어서자 일을 하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나와 진양을 반갑게 맞이했다.
사실 진양이 처음 금룡표국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시기와 질투하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아무리 표국의 은인이라지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소년이 나타나서는 갑자기 표두와 맞먹는 지위를 차지하고 앉았으니, 이를 곱게 보는 사람들이 드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양이 보표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거나 다른 잡다한 일을 도맡아하면서 표국 사람들은 저마다 진양의 겸손함과 올곧은 마음씨에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쯤엔 이미 혈사채에서 있었던 진양의 활약상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진양의 귀환은 그들에게 더욱 반갑고 기쁜 일이었다.
특히 그를 내심 아꼈던 유인표는 버선발로 뛰어나올 만큼 기뻐했다.
“어서 오게, 어서 와! 그렇잖아도 지금 자네 걱정을 하고 있는 참이었네. 몸은 좀 어떤가?”
“전 괜찮습니다. 괜한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말게나. 어쨌든 자네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야. 다행일세!”
유인표가 진양을 이끄는데,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유설과 마주쳤다. 그녀 역시 진양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나오는 중이었다. 진양은 유설을 가까이에서 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마 전 죽음의 문전에서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그 순간 진양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도 잊은 채 희미한 미소까지 지었다.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진양은 유설의 얼굴을 감히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리는데 유설이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양 소협, 무사하셨군요. 다친 곳은 좀 어떠신가요?”
옥구슬이 구르듯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자 진양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쿵쾅거렸다. 마음 한편에서 달콤한 기운이 퍼져 나와 사지백해로 녹아드는 듯했다.
‘아직 유 낭자는 내가 서신의 상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을 할까?’
진양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설이 다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양 소협? 어디 안 좋으신가요? 얼굴색이 붉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유 낭자.”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하지만 당분간 몸을 다스리시고 안정을 취하세요.”
유설이 걱정 서린 목소리로 말하자 진양은 마음이 못내 흐뭇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유인표 일행은 진양과 함께 먼저 대청으로 들어갔다. 유인표는 진양이 귀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연회라도 베풀 기세였지만, 진양이 끝내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뜻을 거두었다.
진양은 제일 먼저 흡혈마가 어찌 되었는지 물었다. 다행히 영리한 흡혈마는 주인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자 제 발로 금룡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가벼운 잡담을 나누고 나자, 분위기는 자연히 무거워지며 진지한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유인표는 어쩌다가 진양이 봉변을 당하게 됐는지 물어보았다. 이는 모두가 궁금하던 참이기에 도장옥과 유설, 그리고 정여립과 총관 심일태가 하나같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은 병기포에 갔다가 우연히 종지령을 본 일부터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곤삼왕 갈지첨과 싸운 일, 마지막에는 황태손 주윤문이 자신을 도와준 일까지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유인표가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음, 아무래도 그 천의교라는 조직이 큰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겠군.”
그러자 도장옥이 말을 받았다.
“그들은 금룡표국을 통해 천상련까지 건드리려고 했습니다. 또한 고위 관료들마저 의식하고 있었으니 꾸미고 있는 바가 예사롭지 않을 듯합니다.”
그때 유설이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사실을 빨리 알려야 좋지 않겠어요?”
“맞는 말이다. 우리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듯싶다.”
유인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자 도장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섣불리 무림 동도들을 소집하면 천의교는 필시 또 다른 간계를 꾸밀 것입니다. 그럼 오히려 천상련 등의 사파에서 이쪽의 동향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 또한 일리가 있는 말이오. 심 총관,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금룡표국의 총관인 심일태는 비록 무공 실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표국을 운영하는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자였다. 그만큼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었으며,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심일태가 짧은 턱수염을 두어 번 쓸다가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이번 일은 표국의 문제만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무림 동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문제는 얼마나 그 계기를 자연스럽게 가지는 것인가 하는 일인데, 한 가지 떠오른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국주님께서 괜찮으실지…….”
“무엇인가? 말해보게. 우선은 들어봐야 결정도 내릴 일이 아니겠는가?”
“두 달 후면 국주님의 생신이니 이때 연회를 열어 무림 동도들을 초빙한다면 그 모양새가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때 평소 뜻 맞는 영웅들에게 은밀히 이 사실을 알리고 논의한다면 대책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도장옥이 손뼉을 짝 마주 쳤다.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요!”
하지만 유인표의 표정은 썩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생일을 챙겨 연회를 벌인 적이 거의 없었다. 부인이 살아 있을 때는 강요를 이기지 못해 몇 번 생일잔치를 벌인 적이 있지만, 칠 년 전 부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뜬 후에는 단 한 번도 연회를 연 적이 없었다.
유인표가 몹시 사교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높이거나 중심이 되는 행위는 좀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유인표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심일태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역시 부담이 되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유인표에게 향하자 그 역시 별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부담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번 연회의 목적은 따로 있으니 심 총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그 말에 좌중의 사람들이 저마다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심일태의 말대로 생일잔치를 핑계로 무림 동도들을 초빙한다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더욱이 금룡표국과 친분이 있는 자들은 반드시 참가할 것이므로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었다.
진양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면서도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은근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강호의 무인들을 만나볼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여러 무림의 영웅들을 만날 수 있게 됐으니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대략의 이야기를 마친 진양은 먼저 마구간으로 가서 흡혈마를 살펴보았다. 흡혈마는 진양을 알아보자 기분이 좋은지 연신 푸르릉거리며 콧김을 뿜어대고 얼굴을 비벼왔다. 흡혈마를 한동안 다독거려 준 다음 그는 거처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방에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푸근했다.
‘어느덧 이곳을 내 집처럼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진양은 창가로 걸어가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따뜻한 햇살이 창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마당을 분주히 오가는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마침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유설이 시녀 한 명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표국의 일에 관한 업무를 이야기하는 중인 듯했다.
진양은 유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들뜨면서 달콤한 기분에 흠뻑 취했다.
‘그동안 내가 유 낭자에게 서신을 보내지 못했으니, 오늘 또 한 통의 서신을 보내야겠다.’
진양은 기쁜 마음으로 문방사우를 챙겨 탁자에 가져왔다. 그리고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날 이후 진양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유설에게 서신을 보내곤 했다. 그때마다 유설은 매번 답장을 써서 보내주었다. 진양은 유설의 서신을 받아 읽으면서 내심 흐뭇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바로 서신의 상대라는 것을 밝혀야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설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한편 진양은 황태손의 부름을 받아 입궁하는 경우도 잦았다. 주윤문은 진양을 만나기만 하면 항상 서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따금씩 자신의 글씨를 보여주며 진양의 감평을 들어보기도 했다. 진양 역시 서예에는 관심이 무척 많은 터라 주윤문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두 사람은 나이도 엇비슷했기에 더욱 뜻이 잘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양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윤문의 부름을 받고 입궁할 때였다. 진양은 내정의 후원을 거닐면서 궁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는 사람들마다 낯빛이 어두웠고 평소보다도 더욱 몸가짐을 조심히 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진양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가 마침내 어느 대청 앞에 멈췄다. 주윤문이 있는 곳이었다. 문을 지키던 자들이 안을 향해 소리치자 평소와 마찬가지로 번웅이 나와서 진양을 안내했다.
진양이 대청으로 들어서자 주윤문이 두 팔을 벌려 맞이했다.
“잘 왔소. 기다리고 있었소.”
주윤문은 진양에게 만날 때마다 구태여 예를 차리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때문에 진양은 양손을 맞잡고 허리를 굽혀 읍을 하며 말했다.
“저하를 뵙사옵니다.”
주윤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진양의 손을 이끌었다.
“이리 와보시오. 내가 오늘 그대를 위해 무얼 준비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