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55
신필천하(神筆天下) 55화
다음 날 아침 진양은 시종을 불러 밤새 쓴 초청장을 건네주었다.
“도 표두님께 전해주어라.”
“알겠습니다.”
시종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곧장 초청장을 받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가 정원을 지나 막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유설이 그를 보고 불렀다.
“그것이 무엇이냐?”
“이번에 연회에 참석하실 분들에게 보낼 초청장인 줄로 압니다.”
그 말에 유설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평소 이런 연회가 자주 있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테지만, 유설의 입장에서도 이번처럼 큰 연회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사실 그녀가 철이 들고 나서는 처음으로 펼치는 연회였다. 때문에 그녀는 누가 오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 어떤 내용의 초청장이 전해질지 궁금했던 것이다.
“어디, 잠깐 보자.”
그녀의 말에 시종이 다가가서 초청장을 내밀었다. 유설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펼쳐 보았다.
순간 유설의 두 눈동자가 크게 부풀었다. 그녀의 가녀린 손이 미세하게 떨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녀가 걱정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시나요?”
“이…… 이 글씨……!”
“예?”
시녀가 되물었지만 유설은 시종을 돌아보더니 다시 다른 초청장을 집어 들었다.
초청장에는 마찬가지로 수려한 필체로 쓰인 글귀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필획의 굵기가 다채로우면서도 아름답게 흘렀고, 글의 내용은 막힘이 없이 술술 읽혔다. 글 자체도 정중하고 다정다감한 내용이었지만, 글씨체가 몹시 뛰어나니 그 진실성이 배로 느껴지고 있었다.
유설은 다시 다른 초청장을 집어 들어 펼쳐 보았다. 역시나 아름다운 필체가 마치 유혹하듯 펼쳐져 있었다. 유설은 한참이나 그것들을 들여다보다가 시종에게 말했다.
“그대는 잠시 나를 따라오도록.”
“예, 아가씨.”
유설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시종은 영문도 모른 채 초청장을 들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곧바로 찾은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그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두어라.”
“알겠습니다.”
시종이 탁자에 초청장을 올려놓는 동안 유설은 수납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지고 왔다. 그것들은 바로 진양으로부터 받은 서신이었다.
그녀는 여러 장의 서신 중 몇 장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초청장의 글씨와 하나하나 비교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같은 글자를 찾아보니 과연 필체가 상당히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설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그동안 주고받은 서신의 필체와 초청장에 쓰인 필체가 같은 거지?’
글자는 쓰임새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썼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유설이 시종을 돌아보며 다그쳐 물었다.
“이 초청장을 쓴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양 표두님이 오늘 아침 제게 주시면서 도 표두님께 전해 달라 했습니다.”
시종이 공손히 읍을 하며 대답했다. 사실 진양의 정확한 직위는 표두가 아니었지만, 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양 표두’라고 불렀던 것이다.
유설은 가만히 초청장의 글씨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도 표두께 전해 드리게.”
“예, 아가씨.”
시종이 물러가자 유설은 주위를 물리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틀림없이 초청장과 서신의 필체는 한 사람의 것이었어. 그럼 양 소협이 바로 서신의 상대라는 말일까? 하지만 서신의 남자는 처음 자신을 소개할 때 곽(郭) 씨라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상대를 사칭하는 가짜 서신도 왔었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유설은 머릿속이 혼란했다. 이제는 진양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기까지 했다.
‘만약 양 소협이 처음부터 내게 서신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가 언제 날 본 것일까? 분명 그는 날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나?’
유설은 방 안을 서성이며 거듭 고민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여립이 왜 그토록 진양을 경계했는지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어. 다음에 서신이 오면 답신을 적어준 뒤 미행을 해보아야겠다.’
결심을 굳힌 유설은 그날부터 서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닷새 뒤에 기다리던 서신을 받을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낭인으로부터 서신을 받은 유설은 떨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펼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전에 받았던 서신과 마찬가지로 수려한 필체가 물 흐르듯이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처럼 간단한 시가 한 소절 적혀 있었고, 안부를 묻는 인사말이 이어져 있었다. 이미 의심으로 가득한 유설은 서신을 보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진양의 필체는 그러한 각오마저도 뒤흔들 만큼 아름다웠다.
유설은 심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글씨는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한데 이토록 수려한 글씨를 쓰는 자가 어째서 남을 속인단 말인가?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지 않나? 단지 글씨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유설은 낭인을 향해 말했다.
“내 답신을 적어줄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헤헤, 물론입지요.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요.”
유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돌아가서 간단하게 서신을 적었다. 서신은 조만간 있을 연회에 참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서신을 적으면서도 이 서신이 진양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랐다.
‘양 소협이 나를 속일 리가 없다. 그가 왜 우리에게 접근을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진양의 접근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설은 답신을 마저 적은 뒤 서신을 낭인에게 건네주었다.
“잘 부탁드리겠소.”
“걱정 마십시오. 안전하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낭인은 히죽 웃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유설은 얼른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은 뒤 표국을 나섰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낭인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은밀히 미행하기 시작했다.
낭인은 길을 가다가도 이따금씩 주위를 자연스럽게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미행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는 듯했다. 유설은 그때마다 인파에 섞여 몸을 숨기거나 건물 모퉁이로 들어가 기척을 숨겼다. 낭인은 무인이 아니었기에 그의 이목을 속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낭인은 점점 응천부의 외곽으로 가고 있었다. 유설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응천부를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응천부를 벗어나면 더 이상 미행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녀는 이제 서신을 보낸 사람이 진양이 아닐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러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인지도 몰랐다.
한데 어느 순간 줄곧 서쪽으로 가던 낭인이 북쪽으로 걸음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이내 서서히 북동쪽으로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그런 중에도 낭인은 줄곧 주위를 살피며 미행이 없는지 살피는 듯했다.
유설은 다시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자는 어째서 응천부 외곽 지대를 거닐고 있는 거지?’
사실 이 모든 것이 진양의 부탁을 받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진양은 낭인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미행이 따라붙을 것을 의식해서 먼 길을 돌아오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이미 이 낭인은 몇 번이나 서신 심부름을 담당했기에 이런 행보가 익숙했다.
그는 발길 닿는 대로 마구 돌아다닌 뒤에 점점 진양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한편 그를 미행하던 유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응천부를 배회하던 낭인이 점점 금룡표국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정말 서신의 상대가 양 소협이란 말인가?’
그녀의 표정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저잣거리를 지난 낭인은 오른쪽에 나타난 다루 안으로 들어갔다. 유설은 더 이상 따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다루 근처에 서성이며 살펴보았다.
대략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쯤이 지나자 들어갔던 낭인이 다시 되돌아 나왔다.
그를 본 유설은 순간 망설였다.
낭인을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다루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나?
낭인이 다루 안에 들어간 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지금쯤 그녀의 서신은 낭인이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루에서 누군가에게 전해줬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단지 차를 마시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라면?
그럼 낭인을 따라가야 한다.
아니다. 낭인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다루에서 차를 마시겠는가?
‘분명히 저 다루 안에서 서신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을 거야!’
하지만 무슨 수로 서신을 받은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까? 서신을 전해 받았다고 이마에 써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다고 이대로 머뭇거릴 수만은 없는 일.
마음이 급해진 유설이 성큼성큼 걸어서 다루 입구로 다가가는데, 마침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바로 양진양이었다.
유설은 깜짝 놀라서 얼른 몸을 돌리고는 옆의 포목점을 기웃거렸다.
진양은 자연스럽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유설은 더욱 진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롭지 않은가?
이제 유설은 자신이 적어준 답신이 진양에게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남은 일은 진양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유설은 지금까지 진양을 좋게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자 몹시 배신감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진양에게 달려가서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가만히 진양의 뒤를 밟았다.
진양은 곧장 금룡표국으로 돌아왔다.
유설 역시 그를 따라 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방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은 뒤 진양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진양은 표사들의 무공 수련을 돕기 위해 연무장으로 간 후였다.
그녀는 지금껏 진양의 방에 함부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진양이 다쳐서 황궁에 있을 때도 그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양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예를 차릴 이유가 없었다. 망설임없이 진양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방 안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베개를 들췄는데, 오늘 자신이 적어준 서신이 곱게 접혀 있는 것이 아닌가?
서신을 펼쳐 든 유설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정말…… 그가 양 소협이었다니, 어쩌면 이럴 수가!”
의심이 완전한 사실로 드러나자 유설은 밀려드는 배신감과 분노를 어쩌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진양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허리춤에서 검을 ‘스릉!’ 뽑아내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마침 문이 열리더니 진양이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진양은 유설을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어?”
진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유설이 일언반구도 없이 검초를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