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57
신필천하(神筆天下) 57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연회의 날짜는 점점 다가와서 이제 오 일을 남겨두고 있었다.
유인표는 지금부터라도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기에 도장옥과 정여립, 그리고 유설과 진양을 대청으로 불렀다. 그들은 먼저 손님들이 머물 객청을 정리하고 방을 배정할 계획을 세웠다. 표국을 찾아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무림의 인사들인 데다 정파와 사파의 무인들이 함께 섞여 있으니 방을 배정하는 것도 유심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대략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유설이 문득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연회가 되면 양 소협도 그분들께 소개시킬 건가요?”
“물론이다. 양 소협은 우리 표국의 은인이나 다름없으니 반드시 소개시킬 생각이다. 그리고 여러 영웅들과 함께 천의교의 음모를 상의할 때 양 소협이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양 소협이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는 것은 어떨까요?”
“음? 그건 무슨 말이냐?”
“양 소협은 지금까지 우리 표국을 도와주려다가 여러 번 위기를 넘겼잖아요. 혹시 이번 연회에 천의교의 무리 중 누군가가 잠입할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요? 그가 또 양 소협을 알아보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안전하게 양 소협이 변장을 하고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유설의 말에 진양은 내심 감동했다.
그녀는 얼마 전에 진양이 한 말을 계속 마음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말은 천의교 무리를 조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천상련의 무인이 진양을 알아보게 될까 봐 염려한 것이리라.
유인표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천의교의 무인들은 지금껏 진양의 목숨을 위협해 오지 않았던가? 한편 생각하니 딸의 이야기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양 소협, 자네 생각은 어떤가?”
“국주 어르신과 유 낭자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세.”
유인표가 시원스레 말했다.
그때 도장옥이 한마디 더했다.
“이번 생신에 쓸 수련(壽聯: 생일날 대청 벽에 붙이는 축시의 일종)을 양 소협께 부탁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양 소협의 필체가 몹시 수려합니다.”
“하하! 양 소협이 수련을 써준다면 나야 영광이지 않겠소.”
유인표의 말에 모두 웃음을 지었다.
3. 무림인사들이 모이다
유인표의 예상대로 다음 날부터 무림의 인사들이 표국을 찾아들었다. 먼 지역에 문파가 있는 사람은 일찌감치 길을 떠나면서 연회 날짜가 되기도 전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유인표는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환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그는 직접 대문까지 나가서 인사를 나누고 객방을 안내해 주었다. 상대가 유명하지 않더라도 결코 얕잡아보는 기색이 없었다. 유인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진양은 내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편 진양은 눈썹을 짙게 그리고 가짜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붙였다. 거기에 뺨에 점을 몇 개 찍은 뒤에 거울을 보니 자신도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다.
연회를 하루 남기게 되자 찾아오는 손님들은 더욱 많아졌다. 표국의 시종과 시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여러 보표들 역시 손님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그중에는 진양도 섞여 있었다. 진양은 손님들의 무공 실력이 저마다 출중한 것을 알아보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
‘과연 금룡표국이 이처럼 많은 인맥과 교분을 나누고 있으니 무림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구나. 국주 어르신의 성품이 너그럽고 호방하니 많은 친구들을 사귀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도 많이 배워야겠다.’
이윽고 다음 날이 됐다.
진양은 연회가 벌어질 대청에 커다란 대련을 써서 내걸었다. 물결처럼, 바람결처럼 새겨진 글씨는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느낌이 있어 절로 신묘함을 풍겼다. 대련을 본 사람들마다 혀를 내두르며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유인표 역시 크게 흡족해하며 진양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날 제일 처음 표국을 찾아온 사람은 바로 무당파의 제자였다. 그는 바로 범여자(範如子)라는 도명을 쓰는 구정광(丘正洸)이었는데, 무당파 장문인의 대제자로 사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유인표가 극진히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네자 구정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겸사했다.
“아닙니다. 응천부에는 이틀 전에 도착해서 푹 쉬고 오는 길입니다.”
“이틀 전에 도착하셨다고요? 그럼 더 일찍 찾아오시지 않고…….”
“하하! 제가 너무 서둘러 일찍 도착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국주님께 신세를 지겠습니까?”
“신세라니요, 오늘만이라도 푹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구정광이 공손히 읍을 하며 대꾸했다.
진양은 곁에서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과연 당금의 무당파는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하더니 명불허전이로다. 이처럼 예를 다하니 어찌 문 내에서 영웅이 나오지 않겠는가?’
구정광을 안내하고 나자 중원 각지에서 온 무림 인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연이어 찾아오자 유인표는 그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접대할 수가 없었다. 한 명을 안내해 주면 그사이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정오가 지날 때쯤이었다.
갑자기 표국의 정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왜 막는 거야?”
“저…… 나리, 막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신분을 알아야 안내를 해드릴 수가 있는지라…….”
“아까 말했잖아! 나는 서요평(徐要平)이고, 이쪽은 서운지(徐雲芝)라고!”
“그러니까 저희가 알아보는 동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뭘 또 기다리라는 거야? 우리를 모른단 말이냐?”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형님, 이자들은 그저 잠시 기다려 달라는 것뿐인데 뭘 그리 성질 급하게 구시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이 멍청아! 너는 화가 나지도 않냐? 이 바보들이 우리를 몰라보잖아!”
“하하, 우리보고 욕하면서 알아보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낫지 않겠수?”
“흥! 알아보면 알아보는 거지, 왜 욕을 하면서 알아보냐?”
“형님이 괴롭힌 사람이 많으니까 욕하는 사람도 많은 것 아니오?”
“나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아! 날 괴롭힌 사람만 혼내줄 뿐이야!”
진양은 이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면서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명은 연신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였고, 다른 한 명은 시종 화가 잔뜩 난 사람의 목소리였다.
진양이 문으로 다가가서 시종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아, 양 표두님, 이분들이 연회에 참석하시겠다고…….”
진양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무척 키가 작고 통통한 몸이었고, 다른 한 명은 키가 멀대 같이 크고 비쩍 마른 몸이었다. 이 두 사람은 체구와 키가 몹시 차이가 났지만, 얼굴 생김새는 어지간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친형제인 모양인데 나이는 둘 다 육순이 넘었을 듯했다.
두 사람 역시 진양을 보더니 동시에 말했다.
“참 기품있게 생기셨군!”
“참 못생겼다!”
칭찬한 사람은 키가 큰 자였고, 흉을 본 자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그러자 키가 작고 통통한 자가 버럭 소리쳤다.
“이 멍청아! 이 얼굴 어디가 기품있게 생긴 거냐?”
“눈썹이 짙고 수염을 멋들어지게 길렀으니 기품이 있지 않소? 게다가 왼쪽 뺨에 난 굵은 점은 그야말로 복점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멍청아! 눈썹은 꼭 먹칠한 것 같고 수염은 염소 같은데 뭐가 기품이야? 게다가 저 뺨에 난 점은 길보다 흉이 많은 자리다!”
“하하, 형님은 너무 부정적이시오.”
“네가 너무 생각이 없는 거지!”
진양은 옥신각신하는 두 형제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나기보다는 어이가 없고 우습기만 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두 분의 높으신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몇 번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테다!”
키 작은 영감이 말하자 옆에 있던 멀대영감이 대꾸했다.
“하하, 우리 형님을 이해해 주시오. 나는 서운지라고 하고 이쪽은 내 친형님으로 서요평이라고 하오. 우리는 복건 지방에서 왔다오.”
“그렇군요. 두 선배님께서는 혹시 초청장을 가지고 계신지요?”
진양은 강호 인물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었기에 초청장을 보고자 했다. 초청장을 보면 그들이 정사의 어디에 속하는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마침 손님 한 명을 안내해 주고 돌아 나오던 유인표와 유설이 이들을 보고 얼른 달려왔다.
“이게 누구십니까? 사상이협(思想二俠)이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흥! 이제야 우리를 알아보는구만!”
유인표의 인사에 서요평이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외면했다. 유인표가 거듭 사죄를 하며 그 두 사람을 안내했다. 진양과 유설은 감히 나서기가 어려워 다른 손님을 안내했다.
나중에 진양이 유인표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국주 어르신, 그분들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유인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사상이괴(思想二怪)라고 하네. 하지만 그들은 그 별호를 좋아하지 않아서 내가 사상이협이라고 고쳐 불렀던 것일세.”
“그 두 분의 성품이 독특하시더군요. 한 분은 시종 화만 내시고 동생 되는 분은 내내 웃음을 머금고 계시더군요.”
“그건 그들이 익힌 무공 때문이라네. 형인 서요평은 부정심공(不定心功)을 익혔고 동생인 서운지는 긍정심공(肯定心功)을 익혔지. 부정심공은 음의 기운이 강하고 긍정심공은 양의 기운이 강해서 두 형제가 따로 싸우면 효력이 보잘것없지만 함께 싸우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어지간한 고수도 당해내기 어렵다네. 하지만 이는 심공이기에 무공을 익히는 자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지. 때문에 형은 사사로운 것에도 툭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됐고, 동생은 무엇이든 대책없이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생긴 거지. 그래서 저 둘이 막상 대결을 펼치게 되면 매우 강하지만, 대결을 펼칠 때까지 좀처럼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가 없다네. 그래서 거의 싸울지 말지 생각만 하다가 상황이 끝나 버린다네.”
함께 이야기를 듣던 유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정말 재미있는 분들이네요. 그래서 별호도 사상이괴군요? 그런데 저분들도 아버지가 초청하신 거예요?”
“아니다. 나도 저들을 한두 번 보았을 뿐이다. 마땅히 정해진 거처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초청장을 보내지 않은 것인데, 우연히 우리 연회 소식을 들은 모양이구나.”
그러는 사이 또 한 사람이 표국을 찾아왔다. 그는 황색 가사를 걸친 승려였는데, 눈썹이 짙고 길며 꾹 다문 입술이 강직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바로 소림에서 온 혜방 선사(蕙芳禪師)였다.
진양은 그를 보자 첫눈에 무공의 깊이가 몹시 심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인표는 극진히 예를 다하며 혜방 선사를 안내했다.
그 뒤에도 개방, 청성파, 공동파 등 구파일방에 속한 무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또한 남옥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 역시 유인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렇게 해가 질 때까지 찾아온 손님만 해도 무려 일흔 명이 넘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