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58
신필천하(神筆天下) 58화
이날 저녁 금룡표국은 너른 후원에 자리를 마련해 연회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인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유인표 역시 미소로 답례했다.
연회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됐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묘한 긴장감이 시종 지속되고 있었다. 금룡표국이 주로 정파와 교분을 쌓고 있긴 하지만, 이 자리에는 사파의 무인들도 꽤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님 중 상당수가 정파의 무인들이었고, 사파에 속한 무인들은 아직까지 소수에 불과했다. 때문에 사파에서도 적당히 몸을 사리며 분위기에 녹아들었고, 정파의 무인들도 유인표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사상이괴의 경우에는 정사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들이었기에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연회를 즐겼다.
그런데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이 몇 순배 돌자 연회의 상석에 앉은 누군가가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흥! 요즘이야 정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때때로 무리없이 어울리지만, 옛날에는 가당키나 한 소리였소? 우리 정도의 무인들은 사도의 무리를 보면 모조리 죽여 악을 뿌리 뽑겠다는 일념밖엔 없었지!”
그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빛이 불그스름한 노인이었는데, 얇은 입술과 커다란 코, 그리고 쭉 찢어진 눈매는 어쩐지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바로 청성파의 장로인 청성고검(靑城古劍) 척금송(戚金松)이라는 노인이었다. 그는 사마외도의 무리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였는데, 오늘 표국에 와서 보니 사파의 무인들이 다수 있는 것을 보고 몹시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마침 술자리에서 사파의 이야기가 나와 불쑥 소리친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느낀 도장옥이 유인표의 체면을 의식해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척 장로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하나 몽골족 오랑캐의 지배를 받던 시절, 정사의 무인들이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했기에 오늘과 같은 날이 오지 않았겠습니까?”
“흥! 하나 여전히 사마외도의 무리는 나쁜 짓을 일삼고 있으니, 그들과 오랑캐가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이오?”
척금송이 냉랭하게 말하자 도장옥이 입을 다물며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반박을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이 고집스러운 노인은 그 반박에 다시 토를 달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자칫 술자리를 흉흉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는 이쯤에서 매듭짓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다른 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무인 한 명이 버럭 소리쳤다.
“그럼 정파의 무인들은 모두 광명정대하단 말인가? 정공을 익히고도 악한 짓을 일삼는 위선자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또한 사공을 익혔지만 정의를 위하는 자들은 없단 말인가?”
그 소리에 척금송이 눈알을 희번덕이며 소리쳤다.
“방금 말한 자가 누구냐?”
그러자 무리에 섞여 있던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흑색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는데, 한쪽에 검은 안대를 차고 있는 애꾸였다.
“후배, 섬서에서 온 지승악(池承惡)이라고 합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의 표정과 억양은 자못 거칠어 보였다. 그는 요즘 섬서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철혈문(鐵血門)의 대제자였다. 철혈문은 검술과 암기를 주로 다루는 문파였는데, 그 손속이 매우 잔인해서 사공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를 본 척금송이 코웃음을 쳤다.
“금룡표국도 이제는 인맥을 정리할 때가 됐구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설치는군.”
그 말에 지승악이 발끈해서 나서려고 하는데, 유인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지 대협은 섬서에서 유명한 철혈문을 대표해서 온 것입니다.”
“지 대협? 철혈문? 철혈문이 어느 틈에 그리 유명해졌단 거요? 거긴 뭐하는 곳이오?”
그러자 지금껏 듣고만 있던 텁석부리사내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는 바로 혈사채를 대표해서 온 위사령이었다.
“척 선배께서는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철혈문이 청성파에 저지른 잘못이 없다면 어찌 그리 함부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거긴 또 뉘신가?”
“혈사채의 위사령이외다.”
척금송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지었다.
“가지가지 모였군!”
그러자 지승악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척 장로께서 그토록 경멸하시는 사마외도의 무리가 오랑캐를 물리친 것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몽골족 오랑캐가 우리 한족을 지배하고 있을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운 자들은 바로 그대들에게 마교라고 지탄받던 명교의 신도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대명제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어찌 보십니까? 설마 이 나라를 세우신 황제 폐하마저도…….”
“닥쳐라! 네놈의 입이 방종이구나!”
척금송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소리쳤다.
이 자리에는 대장군 남옥을 비롯한 여러 관료 대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데 이런 자리에서 저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자신을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만들고 있으니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가자 지켜만 보던 남옥이 껄껄 웃으며 나섰다.
“됐소, 됐소. 오늘은 유 국주의 생일인데 이렇게 흉흉한 분위기를 만들어서야 되겠소? 자자, 모두 한잔들 하십시다! 유 국주, 다시 한번 생일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대장군.”
그제야 사람들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저마다 유인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때 시종 하나가 달려와서 유인표를 향해 말했다.
“국주 어르신, 천상련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 말에 다시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편 지금껏 사마외도라고 은근한 무시를 받고 있던 지승악과 위사령은 조금 어깨를 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상석에는 온통 정파의 무인들만 가득했는데, 이제 천상련에서 사람이 왔다니 어쩔 수 없이 상석에 자리를 만들어야 할 터였다.
유인표가 얼른 손님을 맞이하러 가는데,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중 중년 사내가 말했다.
“유 국주님은 일부러 나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상련을 대신해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진양은 천상련에서 왔다는 이 두 사람을 보다가 흠칫 떨었다.
‘왔구나, 곽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분명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곽연이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창천당주(暢天堂主) 왕자헌(王子軒)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곽연을 가리켜 부당주라고 소개했다. 아마도 그사이에 곽연의 지위가 조금은 상승해서 천보각에서 창천당으로 옮겨 부당주가 된 모양이다.
진양은 오랜만에 곽연을 보자 내심 가슴이 떨려왔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곽연이 첫눈에 반했다는 사람이 바로 유설이었으므로 분명 이번 기회에 그가 금룡표국을 찾아오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어쩌면 천상련 내에서 곽연이 꼭 가기를 원했기에 창천당주가 직접 그를 데리고 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곽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유설을 찾더니 이내 그녀에게 한번 던진 시선을 거둘 줄을 몰랐다. 그는 유설 옆에 앉아 있는 진양을 보긴 했지만, 변장을 한 모습이었기에 누군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진양이 귓속말로 유설에게 말했다.
“저자가 바로 곽연입니다.”
유설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곽연을 보았다. 막상 그를 보자 실망감과 함께 묘한 분노마저 느껴졌다. 곽연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서신을 보냈다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닌가? 물론 진양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진양은 아주 어린 소년이 아니었던가. 단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서를 쓴 것이다. 그 때문에 진양은 며칠 전 몸에 검상까지 입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 자리에서 가장 큰 피해자이자 수혜자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양진양이었다.
유설은 진양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라 이러한 감정이 모두 곽연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옮겨갔다. 그러니 곽연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진양의 귀에 대고 물었다.
“그럼 저자가 양 소협을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요?”
진양이 씁쓸히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설은 더욱 차가운 표정으로 곽연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후원에 천상련의 창천당주가 등장하자 좌중은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왕자헌과 곽연이 상석으로 와서 앉으려 했다.
그때 유설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유설이라고 합니다. 어느 분이 창천당주이신지요?”
유설은 일부러 질문을 하면서 곽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창천당주라고 생각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곽연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반면 왕자헌은 내심 기분이 나빠졌다. 이토록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의 부하를 보고 더 예를 차리니 질투심마저 일어난 것이다.
그가 헛기침을 하자 곽연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 예. 이분이 당주님이십니다.”
그제야 왕자헌도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이 왕 아무개가 유 낭자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별말씀을요. 당주 어르신께서는 이리 앉으시지요.”
“허허, 고맙소.”
유설은 일부러 왕자헌에게만 자리를 권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고 나자 곽연도 막 앉으려는데 유설이 시종을 소리쳐 불렀다.
“뭣들 하느냐? 곽 부당주님께 자리를 안내해 드리지 않고.”
“예, 아가씨.”
시종들이 멀리서 대답하며 달려왔다.
그녀는 곽연을 상석이 아닌 다른 자리에 안내하라고 이른 것이다.
사실 유인표와 남옥 등이 함께 있는 상석의 자리에는 각 문파의 대표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처사는 그리 야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상련의 권세를 믿고 아무 생각 없이 상석에 앉으려고 한 곽연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마침 그 모습을 본 척금송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천상련의 부당주가 이런 곳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정신이 없나 보구려.”
곽연은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내심 유설이 원망스러웠지만, 오랫동안 흠모하던 여인인만큼 내색은 하지 않았다.
왕자헌은 척금송의 가시 박힌 말이 듣기 싫어 툭 쏘듯이 말했다.
“이곳에 앉으신 것을 보니 무공이 출중하신 분인 듯한데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흥! 천상련의 창천당주도 안목의 깊이는 어쩔 수 없나 보구려. 나, 척금송이오.”
그러자 왕자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척금송…… 척금송이라…… 흐음, 곽 부당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곽연은 왕자헌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글쎄요. 속하가 아둔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척금송은 이들이 일부러 무례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막 소리 치려는데 왕자헌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바로 청성고검이시군요. 한참 생각했습니다. 여기 계신 다른 분들은 모두 바로 기억이 났는데 하필…… 정말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 안목의 깊이가 얕은가 봅니다. 하하하!”
“흥!”
척금송이 코웃음을 치고는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한편 곽연은 유설과 함께 앉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으니 다른 자리로 옮겨 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