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59
신필천하(神筆天下) 59화
밤이 깊어가면서 술자리는 더욱 무르익어 갔다. 고위 관료들이 함께 있는 만큼 이따금씩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요즘 같이 흉흉한 시기에 자칫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가는 무슨 변고를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이야기는 무공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개방의 장로인 취적개(醉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역시 검공하면 또 금룡표국의 월야검법을 빼놓을 수 없을 게요. 특히 오늘처럼 달 밝은 밤이야말로 월야검법을 견식하기에는 더없이 좋지 않겠소? 어떻소, 유 국주께서는 이 기회에 여러 사람들의 안목을 높여주시는 것이?”
“하하, 과찬이십니다. 월야검법은 우리 선조가 만든 검법으로 그 깊이가 심오한 것은 사실이나 불초는 그 뜻을 모두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킬킬, 유 국주께서는 너무 겸사하지 마십시오. 제가 예전부터 월야검법의 명성을 들어왔던지라 이 기회에 한번 견식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오.”
그러자 무당파에서 온 대제자인 구정광이 말했다.
“저도 이 기회에 한번 견식해 보고 싶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인표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여식을 통해 잠깐 보여 드리지요. 전 이미 저물어가는 몸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국주님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십니다. 하지만 따님의 자태가 고우니 필시 검법도 아름답게 펼칠 것 같습니다. 한번 견식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유인표가 유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원 한가운데로 걸어나가 사방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자세를 잡았다.
이윽고 그녀가 월야검법의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치 밤의 정원에 달빛이 떨어져 수 놓이듯이 아름답고 찬란한 검식이 우아하게 펼쳐졌다. 보는 이마다 입을 쩍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패도적인 면에서 보자면 분명 유설의 검초는 어딘지 많이 미흡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더불어 달빛 아래 너울너울 춤을 추듯 이어지는 검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일검을 내찌른 후 자세를 바로잡자 한동안 좌중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갈채를 터뜨렸다.
“유 낭자의 아름다움에 달빛마저 숨을 죽이는 듯합니다! 하하하!”
“태어나서 이처럼 아름다운 검식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천하의 미인이십니다!”
저마다 과장을 보태가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인표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그때 좌중에서 누군가 불쑥 소리쳤다.
“흥! 월야검법은 계집의 검법이로군. 움직임이 부드럽지만 너무 가벼워서 어디 풀포기나 베어내겠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옮겨갔다. 진양도 그들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바로 낮에 보았던 사상이괴 중 한 명인 서요평이 팔짱을 낀 채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그의 옆에서 술을 한 잔 마신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형님, 선녀처럼 아름다운 유 낭자가 아주 화려하고 멋진 검식을 펼쳤는데 그게 무슨 무례한 말씀이오? 내 보기에는 아주 좋더이다.”
“멍청아, 그러니까 넌 무공이 늘지 않는 거야. 저렇게 나풀나풀 춤추는 듯한 무공이 뭐가 화려하고 멋있단 말이냐? 저건 단순히 검무(劍舞)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자리는 흥겨운 자리이니 굳이 살벌한 초식을 전개할 필요는 없지 않수?”
“흥겨운 자리라면 살벌한 초식을 펼쳐도 흥겨울 것이다!”
“자자, 그리 화내지 마시고 술이나 드십시다. 여기 유 대인께서 도량이 넓어 우리를 내치지 않고 받아준 것만 해도 어디요? 그래서 이렇게 공짜 술을 실컷 마실 수도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소?”
“흥! 그자의 하인들은 우리를 문전박대하려고 했다! 너는 그새 그걸 잊었느냐?”
“하지만 이렇게 술자리에 앉아 있지 않소?”
“멍청아! 그건 우리가 소란을 일으킬까 봐 그런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소? 유 대인은 예로써 우리를 대한 것이외다.”
“네가 유 국주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느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라!”
“좋게 생각합시다, 좋게.”
“좋게? 그렇게 안일하게 지내다간 언젠간 큰일당할 날이 올 게다!”
“그런 날이 안 오도록 하면 되지요.”
“올 거다! 반드시!”
사상이괴는 이제 전혀 다른 소재를 놓고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데, 척금송이 콧방귀를 뀌며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은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그리 크게 소리친 것이 아님에도 뭇 사람들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것만 보아도 내공이 몹시 심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요평이 고개를 돌려 보더니 되물었다.
“그러는 귀하는 뉘시오?”
척금송은 상대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는 이 두 사람이 사상이괴라는 것을 척 보고 알 수 있었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주의를 주려는 뜻에서 모르는 척 이름을 물은 것이다.
한데 자신을 몰라보고 되물어오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나, 청성파 척금송이오.”
“우리는 사상이협이외다. 난 서요평, 이쪽은 내 동생 서운지.”
“이제 보니 사상이괴 분들이로군. 과연 소문이 무성하더니 두 분의 호기가 느껴지는구려. 한데 두 분의 목소리가 너무 크니 좀 조용히 해주시구려.”
“이 자리는 떠들썩하게 놀고 즐기는 자리가 아니오? 왜 우리가 목소리를 낮춰야 하오? 그쪽이 더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시는구려!”
서요평의 반박에 척금송은 내심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물론 즐거운 이야기라면 크게 웃고 떠들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조금 전 그쪽의 이야기는 오늘의 주인공인 유 대인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었소?”
“난 유 국주를 비방한 적이 없소. 단지 월야검법이 보잘것없다고 했을 뿐이지.”
“바로 그렇소. 당신이 보잘것없다고 악평한 월야검법은 바로 금룡표국의 대표 검술이오. 이는 유 대인에게 매우 실례되는 언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럼 없는 소리라도 해야 하오? 보잘것없는 걸 보잘것없다고 하는 것뿐이외다.”
그러자 척금송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차게 내려쳤다.
쾅!
“보자보자 하니 정말 무례하군! 당신네들의 검술은 얼마나 고명하기에 그리 막말을 하는가?”
“우리의 검술? 우리의 무공은 월야검법 따위보다 훨씬 강하지!”
“어디 그렇다면 우리 앞에서 보여주든지!”
그러자 서운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저희 형제가 가볍게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이왕이면 멋진 월야검법과 함께 어울려 보고 싶군요. 유 낭자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함께 검술을 논하고 싶습니다. 모쪼록 눈여겨보시고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서운지는 정말로 월야검법을 대단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가벼운 대련을 통해서 검을 섞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뜻밖에도 서요평이 서운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
“앉아라! 멍청아! 우리는 시범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시오, 형님? 많은 분들께 우리 검술을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오?”
하지만 매사에 부정적인 서요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멍청아, 저자들은 우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인데 우리가 나선다고 한들 저들이 인정해주겠느냐?”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소? 이 기회에 월야검법과 어울려 볼 수 있지 않겠소?”
“흥! 저딴 검법에 어찌 내 검을 섞는단 말이야? 나는 하기 싫다!”
이렇듯 두 형제의 성격과 생각이 완전히 다르니 두 사람은 다시 한동안 옥신각신하며 설전을 벌였다.
그런 모습을 가만 보고 있자니 진양은 웃음만 나왔다. 저렇게 뜻이 안 맞아서야 싸울 때는 어찌 서로를 지킬 수 있을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저 둘이 합심하면 천하에 적수가 몇 없다고 하니 괴인은 괴인이다.
사상이괴가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벌이자, 척금송을 비롯한 상석의 무인들은 어이가 없어지고 금방 시들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관심을 끊고 술을 마시려고 하는데, 마침 한 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두 분이 주저하시니 대신 제가 나서서 한 수 배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유 낭자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는 바입니다.”
사람들이 다시 바라보니 그는 바로 천상련에서 온 곽연이었다.
그는 지금껏 어떻게 하면 유설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 계속 궁리하고 있었다. 천상련을 떠나올 때만 해도 유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유설을 만나고 보니 그녀는 냉랭한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 상석에 앉으려던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며 쫓아내기까지 하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사상이괴가 유설의 검술을 혹평했다. 곽연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 유설에게 접근할 기회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대련을 핑계로 일어난 것이다.
그가 일어나면서 슬쩍 왕자헌의 눈치를 살피니 그 역시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 기회에 천상련의 무공이 얼마나 매서운지 만인 앞에서 보여줄 기회였으니 왕자헌도 말리지 않은 것이다.
연회 중에 무인들이 서로 무예를 겨루는 일은 흔한 경우였다. 실제로 감정이 상해서 싸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좋은 취지에서 서로 공부를 삼아 겨루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이 자리의 누구도 곽연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파인 천상련의 무인과 정파라고 볼 수 있는 표국의 유설이 대련을 하니 더욱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유설이 시선을 돌려 유인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묻는 것이었다.
유인표는 상황이 뜻밖으로 돌아가자 다소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곽연이라는 자는 척 보아도 자신의 딸보다 무공 실력이 우수해 보였다. 만약 대련을 하다가 자칫 딸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염려되었던 것이다. 특히 천상련의 무공은 거칠고 잔인하기로 유명하니 더욱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그만 물러서라고 하자니 여러 정파의 무인들이 이를 곱게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럼 곽 부당주님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하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진양이었다.
이제는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진양에게 일제히 향했다. 모두 유인표에게 소개를 받긴 했지만, 진양을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변장한 진양은 겉보기에 마흔 살 정도로 보였는데, 아무도 알아보질 못하니 그저 그런 무인이라고 여긴 것이다.
한데 그런 자가 갑자기 천상련의 부당주를 상대하겠다고 하니 몇 사람은 깜짝 놀라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시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도대체 저자는 누구기에 겁도 없이 천상련의 부당주와 대련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곽연이 돌아보자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가 진양을 알아보지 못한 채 물었다.
“귀하의 존함이 어찌 되는지요?”
“불초는 양씨이고 이름은 가명이라고 하오. 가족할 때의 ‘가’에 밝다는 뜻의 ‘명’자를 쓰오.”
진양이 목소리를 변조해서 말했다.
사실 거짓 이름이라는 뜻의 ‘가명’이었지만, 곽연을 비롯한 사람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곽연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진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월야검법과 겨뤄보고 싶은 거요. 당신은 월야검법을 모르실 텐데…….”
진양이 흘깃 유설을 바라보자 그녀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가 일전에 월야검법을 잠시 익힌 적이 있습니다. 국주 어르신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 기회에 유 낭자를 대신해서 곽 부당주님께 가르침을 받도록 하지요.”
“그럼 그대는 유 대인의 제자란 말이오?”
“아니오. 유 대인께서 그저 불초에게 월야검법 몇 가지 초식을 가르쳐 주시긴 했으나 정식 제자는 아니오.”
곽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 유설과 함께 검을 섞은 다음 그녀에게 자신의 무공을 확실히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자신을 다시 보게끔 만들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