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6
신필천하(神筆天下) 6화
풍천익은 천보각을 나서자마자 곧장 천상궁으로 향했다. 천상궁은 그 이름처럼 천상련 내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상궁까지 이어진 계단도 몹시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기에 범인이라면 도중에 두어 번쯤은 꼭 가쁜 숨을 돌려야만 할 정도였다.
하지만 풍천익은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 번에 높은 계단을 대여섯 칸씩 가뿐히 뛰어오르니 그의 경공술이 능공도허(凌空渡虛)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리라.
그가 천상궁 문전에 도착하자, 문지기가 들어가서 보고를 올렸다. 잠시 후 문지기가 돌아 나와 풍천익에게 들어갈 것을 권했다.
풍천익은 곧장 의사청으로 찾아갔다.
텅 비어 있는 실내에 들어서니 맨 앞쪽 서너 계단 위의 단상에 노인이 위엄있는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굵직한 기둥과 단상 좌우에 늘어선 호법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황궁의 대전을 방불케 할 만큼 장엄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은 백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양 눈초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가서 전체적으로 매섭고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그가 바로 천상련의 련주 냉이천(冷理天)이었다.
풍천익은 의사청 한가운데로 걸어가 무릎을 털썩 꿇고는 양손을 맞잡았다.
“천보각 풍천익이 련주님을 뵙습니다!”
“수고했네. 간 일은 어찌 되었는가?”
냉이천의 목소리가 의사청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님에도 공기가 진동하며 한참 동안 메아리쳤다.
“학립관에서 적당한 아이를 하나 찾아왔습니다.”
“잘됐군. 자네가 직접 고른 아이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한데 아이의 재주가 워낙 비상한지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무공이 뛰어난가?”
“아닙니다. 무공은 전혀 할 줄 모르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글자에 대한 이해력이 남달리 뛰어납니다.”
“흠.”
냉이천이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가장 깔끔한 방법이라면 일이 끝난 후에 아이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냉이천이 일말의 재고도 없이 말했다.
그의 말은 곧 바뀔 수 없는 명령과도 같다는 것을 풍천익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3. 필사(筆寫)
양진양은 다음 날 풍천익을 따라 천보각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 들어서자마자 짙은 묵향이 코를 찔렀다.
지하실 한쪽에 놓인 은쟁반 위에는 야명주(夜明珠)가 은은한 빛을 밝히고 있었는데,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여러 겹의 책장에 서적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풍천익이 특유의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이곳에서는 함부로 불을 써서는 안 된다. 여기 있는 책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자칫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그러니 이곳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야명주만 이용해야 한다.”
그는 양진양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너는 앞으로 여기 있는 책들을 필사(筆寫)해야 한다. 오래되고 낡은 책들이 많고 지난번 홍수 때 천보각도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습기에 글자가 번진 책도 많을 것이다. 그런 책들을 모두 필사해서 새로 보관해야 하는데, 네가 맡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생각처럼 간단하진 않을 것이다. 혹시 모르는 글자가 있거든 절대로 네 추측대로 쓰지 말고 일일이 내게 물어보도록 해라. 그리고 네가 천보각의 무공서를 필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해서는 안 된다. 또한 너는 필사하는 동안 내 허락 없이 어떤 책도 외워서는 안 된다. 너는 그저 글자 하나하나 베껴 쓰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해라.”
“예.”
“다른 사람이 네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거든 천보각에서 잡일을 맡아 한다고 해라.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알겠어요.”
양진양은 순순히 대답했다.
사실 천상련으로 올 때는 온갖 궂은일을 다 하게 될 줄 알았다.
한데 주된 일이 책을 필사하는 것이라니,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한 진양으로서는 내심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천보각의 각종 무공서를 필사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었다. 때문에 천상련에서는 이 일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필사본을 만들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오래되고 낡은 무공서들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필사본을 만드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도 없었다.
보통의 무인이나 문인에게 필사를 맡겼다간 사리사욕에 눈먼 그들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오랜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이, 세상물정에 어둡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 중에서 필체와 필력이 좋은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또한 여차하면 살인멸구하기에 좋도록 부모가 없는 고아를 선별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양진양은 그저 들뜬 마음으로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장서들을 훑어보았다.
풍천익은 양진양을 이끌고 구석진 안쪽으로 걸어갔다.
“우선 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부터 필사하도록 해라. 명심해라.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된다. 글을 쓰다가 필획 하나라도 어긋나면 종이를 찢고 다시 써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가 서너 권의 책을 꺼내 진양에게 건네주었다. 진양은 얼른 그 책을 받아 들었다. 퀴퀴한 곰팡내가 코끝을 찔렀다.
“앞으로는 네가 직접 이곳으로 와서 차례대로 책을 가지고 가면 된다. 필사는 네 방에서 하면 된다. 다른 질문이 있느냐?”
“만약 여기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어떡해요? 제게 무슨 일을 하는 중이냐고 물으면요.”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라면 네가 누군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도 된다.”
“지필묵(紙筆墨)은 어디서 가져오나요?”
“그것 역시 천보각의 시동이 매일 네게 가져다줄 것이다. 너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필사를 다 끝낸 책은 어떻게 하죠?”
“매일 한 번씩 내가 네 방을 찾아갈 것이다. 그때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질문이 있느냐?”
“이제 없어요.”
풍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책을 우선 네 방에 갖다 놓고 내려와라. 부각주가 너에게 몇 가지 세세한 것들을 안내해 줄 것이다.”
“예.”
양진양은 대답을 하고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책들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청소를 했기 때문에 진양의 방은 어지간한 객점의 객방보다도 깔끔한 모습이었다.
일층으로 내려가자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족제비처럼 가늘게 찢어진 눈과 보통 사람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키가 인상적이었는데, 자신을 곽연(郭演)이라고 소개했다.
곽연은 진양에게 천보각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수칙에 대해서 일러주었다.
고개를 끄덕여 가며 얌전히 듣고 있던 진양은 그의 마지막 말에 깜짝 놀라며 머리를 들었다.
“예? 천보각을 벗어날 수 없다고요?”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천보각 정원과 후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지.”
진양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앞으로 지하에 있는 저 많은 장서들을 필사하려면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한데 그동안 천보각을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니!
물론 곽연의 말에 따르면 예외는 있다고 했다. 천보각주인 풍천익이 동행한다는 조건에 한해서란다.
하지만 곽연은 그조차도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보각주가 자신을 데리고 다닐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자신이 옥살이하는 죄수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또 한 번 처량한 신세를 깨닫게 되니 진양은 서글픔이 밀려들어 목소리가 잔뜩 젖어들었다.
“그럼…… 전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네가 맡은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곽연의 냉담한 목소리를 들으며 진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양진양은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진양은 잠시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천상련에 적응되지 않아 학립관에서 자고 있었던 줄로만 알았다.
똑똑똑!
다시금 들려온 소리에 진양은 얼른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방에 돌아와서 바로 잠들었구나. 바보 같이 이렇게 늦잠을 자다니, 각주님이 엄청 혼내시겠지?’
진양은 방문 앞에 와 있는 사람이 천보각주 풍천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어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 문방사우를 챙겨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이는 진양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고, 옷차림새가 여느 시동들처럼 꼬질꼬질했다. 사각턱에 희미한 눈썹이 특징인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양진양이니?”
“네…… 누구세요?”
“반가워. 난 천보각에서 일하는 공소부(孔紹副)라고 해. 오늘부터 내가 매일 네가 쓸 물건들을 챙겨줄 거야. 잠시 들어가도 돼?”
공소부의 말에 양진양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러났다.
“아, 네. 들어오세요.”
공소부는 방으로 들어오더니 한쪽에 놓인 탁자로 걸어가서는 들고 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가 방을 한차례 휘 둘러보면서 찬탄을 내뱉었다.
“이야! 이 방이 이렇게 깔끔해질 수 있다니, 놀라운데?”
진양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공소부 형님은 이곳 입련생이신가요?”
“아니. 나도 너랑 같은 시종이야. 서로 하는 역할만 다를 뿐이야.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
양진양은 공소부의 너그러운 미소를 보면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서너 살 나이 차가 있지만 공소부는 진양을 친구나 친동생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진양도 공소부가 친형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진양은 공소부에게 천상련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과연 공소부는 천보각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시동이었기에 세세한 것들까지 교육받아 잘 알고 있었다.
천상련의 주요 조직은 이당(二堂), 삼각(三閣), 사대(四隊)로 나눌 수 있었다.
이당은 입련생들을 가르치는 천기당과 실무를 총괄 담당하는 창천당(暢天堂)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고, 삼각에는 각종 무공비서를 보관하는 천보각과 신병이기를 보관하고 개발하는 철기각(鐵器閣), 무공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승천각(昇天閣)이 해당됐다. 끝으로 사대에는 궁수로 이루어진 풍기대(風氣隊), 첩자로 이루어진 암천대(暗天隊), 살수로 조직된 혈귀대(血鬼隊), 전면에 나서는 타격대인 파멸대(破滅隊)가 이에 속했다.
진양은 공소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웅장한 천상련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공소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다가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진양은 먼저 탁자로 걸어가서 어제 풍천익에게 받은 책들을 대충이나마 훑어보았다. 외워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들었기 때문에 꼼꼼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대신 대략의 분량만을 파악한 진양은 오늘 하루 동안 쓸 범위를 정한 뒤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양진양이 먹을 가는 행위는 글을 쓰기 전에 마음을 갈고닦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먹물이 짙어질수록 진양은 점점 경건하면서도 고요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이윽고 진양이 붓을 들어 먹물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