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63
신필천하(神筆天下) 63화
곽연은 유설의 방을 찾아갔다.
유설은 곽연이 올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방을 나와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후원에 서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곽연은 새삼 유설과 단둘이 후원에 남아 있게 되자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자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기분에 젖어 버렸다.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에 곽연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했다.
“사실 유 낭자께 오늘 고백할 말이 있소.”
“무엇인지요?”
유설이 담담하고도 차가운 태도로 되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곽연은 내심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호기심을 보이며 물어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한데 지금 유설의 태도는 어찌 보면 굉장히 귀찮은 듯한 기색마저 느껴졌다.
‘하긴 밤이 깊었으니 오늘 손님들을 맞느라 많이 피곤했을지도 모른다.’
곽연은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혹시…… 그게…… 유 낭자께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소.”
“말씀하시지요.”
“유 낭자는 오래전 한 남자와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있지 않소?”
질문을 꺼낸 곽연은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한데 유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요?”
곽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보통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내면 뭔가 동요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렇게 태연하게 반응한단 말인가?
‘그래, 피곤해서 그런 거다.’
곽연은 다시 한번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 서신의 상대가 바로 나였소, 유 낭자. 나는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소이다.”
그 말에 유설이 잠시 놀란 표정으로 곽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아주 잠깐이었다. 사실 그녀는 곽연이 이처럼 갑자기 본론을 꺼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에 좀 놀란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었다.
하나 곽연은 그녀가 멈칫하는 기색을 보며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상대방의 작은 행동 하나도 크게 보이는 법이다. 곽연은 유설이 잠깐 놀란 기색을 보이자 필시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유설이 물었다.
“저와 서신을 주고받던 사람이 곽 부당주님이란 말인가요?”
“바로 그렇소.”
“그럼 곽 부당주님 말고 또 누가 있죠?”
곽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곽 부당주님은 저를 바보로 아시나요? 제게 온 서신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체가 때때로 바뀌었지요. 하지만 그 서신들은 모두 한 사람인 척했습니다. 그 말은 곧 곽 부당주님께서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서신을 적었거나 반대로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곽연은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나? 그래서 최근 서신에 답장을 보내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정확히 양진양이 죽고 나서부터 유설은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 몇 통의 서신을 더 보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곽연 역시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필체가 갑자기 달라졌으니 유설이 의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급류에 휩쓸려 죽어 버렸을 진양을 어디에 가서 살려온단 말인가? 더욱이 천상련에서 죽이고자 했던 아이를 다시 살려서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급한 대로 다른 이에게 부탁해서 서신을 적어 보냈던 것이다.
곽연이 다급하게 말했다.
“들어보시오. 그건 모두 내 진심이었소. 다만 내가 글재주가 없어 지인에게 어쩔 수 없이 부탁을…….”
“이것 하나는 분명하죠. 제가 상대한 사람은 곽 부당주님이 아니었다는 것이에요.”
“그, 그럼 누구를…….”
“그 서신을 직접 적은 사람이에요.”
“그런……!”
“곽 부당주님이 저를 보고 그리워하신 건 소녀가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서신을 직접 적은 사람이 그리웠던 겁니다. 그 사람의 필체와 문장에서 그를 상상했으니까요. 그리고 전 실제로 곽 부당주님을 뵌 적도 없으니까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곽연은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이놈 양진양은 죽어서도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구나!’
곽연은 어금니를 쿡 씹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 양진양이 지금 어디선가 몸을 숨기고 자신을 지켜본다는 것을. 그리고 여전히 진양은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한편 지금까지 남몰래 모퉁이 뒤에서 지켜보던 진양은 유설의 말에 내심 감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리워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심장 소리가 들킬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곽연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미, 미안하오, 유 낭자. 나는 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떳떳하지 못한 방법을 썼소. 그건 인정하겠소. 하지만 낭자께서 내게 이리도 차갑게 대하니 어쩔 줄을 모르겠소.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날 용서해 주시오.”
“곽 부당주님께선 제가 감당하지 못할 말씀을 거두어주세요. 이건 용서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곽 부당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곽 부당주님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일 뿐입니다.”
유설은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곽연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 눈앞에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 한 떨기 꽃 같은 여인이 있건만, 도저히 자신이 품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이 여인을 떠올리면서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혼자서 얼마나 많은 망상을 해왔던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으로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 양진양! 그놈은 정말 내게 도움이 안 되는구나. 내 사랑마저 죽은 그놈에게 빼앗기게 생겼구나.’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유설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곽 부당주님께선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혹여 남들의 오해를 살까 걱정입니다.”
유설이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곽연이 얼른 그녀를 가로막았다.
“잠깐! 우리 잠깐만 더 이야기를 합시다.”
“아직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지요?”
유설이 다시 보석 같은 눈을 들어 곽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 곽연은 복잡한 생각일랑 싹 접어치우고 단숨에 그녀를 품고 싶었다.
사실 마땅히 더 할 말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유설을 그냥 보내게 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낭자를 만날 날을 고대하며 기다려 왔소. 혹시 내게 오해를 하고 있다면 풀어주시오.”
“저는 아무런 오해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곽 부당주님께서는 제게 모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을 어찌 이리 몰라준단 말이오?”
“곽 부당주님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녀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곽 부당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의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요? 저는 이미 서신을 쓴 자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기 어렵게 됐답니다.”
곽연은 계속해서 유설이 진양을 들먹이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흥! 어찌 한 번 보지도 않은 자를 마음에 둔단 말이오?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유설이 곽연을 담담히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표국의 일을 하면서 먼 거리를 오갈 때 여러 가지 부탁을 받습니다. 그중 서신을 전해달라는 부탁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서신들을 함부로 읽지 않지만 서신 대부분이 연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서를 주고받는 남녀들은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사랑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굳이 눈으로 보아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장님들은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곽연은 이제 그녀가 ‘사랑’이라는 단어까지 들먹이자 아예 눈이 뒤집히는 심정이었다.
곽연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설이 다시 목례를 하고는 옆을 지나쳐 갔다.
순간 곽연이 손을 불쑥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기다리시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유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곽연도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움찔 떨고는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유설의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었다.
유설이 손목을 매만지며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지금 무슨 짓이죠?”
“미안하오. 하지만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그게…… 그러니까…….”
곽연은 우물거리면서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유설이 냉랭하게 말했다.
“미련을 버리세요. 미련 때문에 매달린다면 그건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한 집착일 뿐입니다.”
그 말에 곽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곽연은 유설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그녀의 사랑스러운 필체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서신 속의 그녀는 늘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한데 지금 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대하고 나니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괘씸한 생각까지 들었다.
‘도대체 네가 얼마나 잘났기에 천상련의 나 곽연을 이렇게 무시한단 말이냐?’
곽연이 사나운 표정으로 유설에게 성큼 다가섰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큰일을 저지를 사람처럼 섬뜩하게 보였다.
유설은 그가 갑자기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근히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허리춤의 검을 잡으며 말했다.
“비키세요. 물러서지 않는다면 무례를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상대가 자신을 적대시하자 곽연은 더욱 화가 났다.
본래 치정 사건의 구 할 이상은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특히 치정 살인 사건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범행이 상당수다. 사람이 정에 얽히는 순간 이미 감정이 이성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곽연도 그런 상태였다.
그는 뜻밖에도 유설이 단호히 거절하자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친 것이다. 게다가 손목을 잡으면서 한차례 거친 행동을 한 직후여서 더욱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유설과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곽연이 입을 꾹 다물고 유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유설이 바짝 긴장하며 검을 ‘스릉!’ 뽑아냈다.
“곽 부당주! 물러서세요!”
“후후, 날 벨 수 있겠소?”
곽연이 입꼬리를 올렸다.
유설이 기수식을 취하며 위협했다.
“당신은 월야검법의 위력을 몸소 체험하셨을 텐데요?”
“흥!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말을 마친 곽연이 순간 보법을 밟았다. 그의 몸이 가볍게 날아가듯 유설에게 다가갔다. 유설이 깜짝 놀라 몸을 물리며 검을 뿌렸다.
하지만 곽연은 순식간에 그녀의 팔꿈치를 돌아가더니 등 뒤에서 그녀의 양 어깨를 잡고 눌렀다.
“앗!”
유설이 짤막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곽연은 이어서 그녀의 등을 내찌르려고 했다. 혈도를 찍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해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녀를 얌전하게 만든 후 차근차근 이야기로 풀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막 등의 혈도 한 군데를 내찌른 순간 검은 바람이 훅 불어왔다. 순간 곽연은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누구냣!”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유설의 어깨를 감싸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는 곧바로 유설의 등에 손을 대고 혈도를 풀어주었다.
“괜찮습니까, 유 낭자?”
“감사합니다, 양 소…… 양 대협.”
진양이 고개를 돌려 곽연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가씨께 이 무슨 무례요?”
“흐음. 난 또 누구시라고. 양 형이 아니십니까? 이 밤중에 여기에는 어쩐 일로?”
“지금 그게 중요한 거요? 당신이야말로 이 밤중에 어째서 아가씨에게 무례를 범하고 있소?”
곽연이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잠시 오해가 있었을 뿐이오.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소이다.”
“그런 자가 혈도를 짚는 것은 어찌 설명할 테요?”
“그러니까 오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양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곽연을 응시했다. 곽연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양을 마주 보았다.